목성과 토성의 만남, 그리고 합일의 주인
이슬람 세계에서 목성과 토성은 ‘두 행운[의 별]’(al-saʿdān)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 두 별이 유달리 가까워지는 순간을 이슬람 세계의 점성술사들은 ‘두 행운의 합일’(qirān al-saʿdān)이라 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이 관념은 사산조 시대 이란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파흘라비 문학에서는 ‘두 행운의 합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태어난 왕은 ‘세계정복자’ 또는 ‘명군’의 탄생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예컨데 6세기 중반 페르시아어 문헌 『파파크의 아들 아르다시르 행장록』(Kārnāmak-ī Araxsīr-ī Pābākān)은 사산조의 시황제가 ‘두 행운의 합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Chann, 2009: 94; 한편 일부 점성술사는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이 운명을 타고났다는 의견을 지녔다고 한다. 이주연, 2020: 30, n. 106)
이 관념은 이슬람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무슬림들은 이 운명을 타고난 왕을 ‘사히브 키란’(Ṣāḥib Qirān), 즉 ‘[상서로운] 합일의 주인’라 불렀다. 사산조 이란에서 ‘사히브 키란’의 개념을 가장 먼저 차용한 것은 페르시아인 사가 무함마드 이븐 알리 라반디(Muḥammad b. ʿAlī Rāwandī)였다. 그는 『가슴의 안식』(Rāḥat al-Ṣudūr)에서 자신의 후원자, 룸 셀주크 왕가의 기야수딘 카이후스라우(Ghiyāth al-Dīn Kaikhusraw)를 ‘사히브 키란’이라 일컫었다.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군을 격파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 또한 자신을 ‘이 시대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히브 키란’(al-Iskandar al-zamān, Ṣāḥib Qirā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Chann, 2009: 94-95)
‘사히브 키란’이라는 칭호가 이슬람 세계의 군주의 통치정당성과 직접적으로 맞닿기 시작한 것은 몽골 시대였다. 알라우딘 아타말릭 주베이니(ʿAlāʾ al-Dīn ʿAṭā-Malik Juwaynī)는 매 시대 ‘사히브 키란’이 태어난다며, 사산조 황제 후스라우 1세(Khusraw I)나 이슬람 이전 아랍의 시인이자 전사, 하팀 알타이(Ḥātim al-Ṭāʾī) 등을 예시로 든 뒤, 당대 자신의 주군 뭉케 카안을 이 전통 속에 자리매김시켰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의 경우 비록 무슬림이 아니긴 했으나 정의로운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주베이니는 당대의 현실을 인식하고 군주의 통치정당성을 종교가 아닌 정의를 통해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Chann, 2009: 95)
그러나 ‘사히브 키란’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오래 기억될 인물은 앞서 언급한 누구도 아니었다. 그 명예는 차가타이 울루스의 정복자, 테뮈르의 것이었다. 티무르조에서 테뮈르를 ‘사히브 키란’이라 칭한 것은 니자무딘 샤미(Niẓām al-Dīn Shāmī)가 처음이었다. 샤미의 『승전기』(勝戰記, Ẓafar-nāma)를 적극 활용하여 또다른 『승전기』를 저술한 샤라푸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īn ʿAlī Yazdī)는 샤미보다 훨씬 많은 사례를 들어 테뮈르가 ‘사히브 키란’ 즉 세계의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음을 간증했다. (이주연, 2020: 13, 23-37)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야즈디가 이슬람력 771년 라마단월 12일 수요일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샤, 사히브 키란’이라 불리었고, 이때 테뮈르의 나이가 태양력으로 34세라고 덧붙였다. 이주연 선생은 이에 대해 과거의 ‘사히브 키란’들 가운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가 33세에 사망하였음으로, 야즈디는 테뮈르가 34세가 되는 때에 왕으로 즉위했다는 서술을 통해 그가 다른 ‘사히브 키란’들보다 위대하다는 인상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제시했다. (이주연, 2020: 29-30)
실제로 야즈디가 기록한 테뮈르의 즉위 날짜는 율리우스력으로 1370년 4월 9일에 해당한다. 한편 야즈디 『승전기』는 테뮈르가 1336년 4월 9일 태어났다고 적었으니, 계산은 맞는 편이다. 계산만. 문제는 테뮈르 생전에 작성된 궁정사서 2종, 니자무딘 샤미의 『승전기』와 기야수딘 알리 야즈디(Ghiyāth al-Dīn ʿAlī Yazdī)의 『인도성전기』(Rūznama-ʼi ghazavāt-i Hindūstān)에서는 테뮈르의 정확한 탄생일자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당대 테뮈르의 궁정에서 지냈거나, 방문했던 다른 기록자들 역시 테뮈르가 1320년대 말에 태어났다는 추정을 적었다. 이런 연유로 현대 학자 대부분은 야즈디 『승전기』 등 티무르조 사서들에서 제시된 테뮈르의 출생일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Manz, 1988: 113, n. 33; 이주엽, 2020: 292, n. 11)
테뮈르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문제는 이쯤에서 접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테뮈르를 기점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제2의 사히브 키란’(Ṣāḥib Ḳirān-i Thānī)을 표방하는 군주들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이는 16세기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퍼진 종말론 그리고 메시아주의와 연관이 있다. 특히 이슬람 세계의 경우 서기 1591-92년이 이슬람력으로 1000년에 해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히브 키란’ 개념은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와 이브라힘 파샤는 통치정당성을 마련하고 이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척추가 되었다고 한다. 어쨋든, 16세기를 전후로 하여 ‘사히브 키란’은 이슬람 세계에서 통치자의 메시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Fleischer, 1992: 167; Haig, 1995: 833)
여하튼 오스만 제국부터 인도의 니잠 왕국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가득 채운 ‘테뮈르병 환자’들 가운데 무굴 제국의 왕자 후람(Khurram)이 있었다. 무굴 제국의 황제 자한기르(Jahāngir)와 라지푸트 공주 만마티(Manmati) 사이에서 난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정말 ‘두 행운의 합일’이 일어난 날 태어났다고 한다. (Balabanlilar, 2015: 47-48) 그래서였을까, 후일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람은 자신의 왕호로 샤 자한(Shāh Jahān), 즉 ‘세계의 왕’을 택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예측이나 했을까.
참고문헌
이주연. 2020. 『티무르조의 사서, 야즈디 저 『승전기』(Ẓafar-nāma)의 역주』. 박사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주엽. 2020. 『몽골제국의 후예들: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책과함께.
Balabanlilar, Lisa. 2015. Imperial Identity in the Mughal Empire: Memory and Dynastic Politics in Early Modern South and Central Asia. Bloomsbury Publishing.
Chann, Naindeep Singh. 2009. “Lord of the Auspicious Conjunction: Origins of the Ṣāḥib-Qirān.” Iran & the Caucasus, Vol. 13, No. 1: 93-110.
Fleischer, Cornell H. 1992. “The Lawgiver As Messiah: The Making of the Imperial Image in the Reign of Sülaymân,” in Gilles Veinstein ed., Soliman le Magnifique et son temps. La Documentation Français: 159-78.
Haig, T.W. 1995. “Ṣāḥib Ḳirān,”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8. Brill: 833.
Manz, Beatrice Forbes. 1988. “Tamerlane and the Symbolism of Sovereignty.” Iranian Studies, Vol. 21, No. 1/2: 105-22.
도판: M.M. Gerasimov, The Face Fi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