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세계: 한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와 독일』

hanyl 2021. 10. 24. 13:53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세계: 한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와 독일』, 이종경 옮김 (서울: 지식의풍경, 2002), 359쪽, 15,000원.
Patrick J. Geary, Before France and Germany: The Creation and Transformation of the Merovingian Worl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xii+259 Pages, $29.95 (hard)/$11.95 (paper).

패트릭 기어리(Patrick J. Geary) 선생의 책 『메로빙거 세계』는 후기 고대 세계가 중세로 변화하는 시기를 프랑크 집단이 정착한 갈리아와 서부를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는 작품이다. 기어리 선생 자신이 적었듯이, 이 책은 아주 독창적인 학설이나 주장을 제시하기 보다는 영어권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대륙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해석하고, 또 조합하여 후기 고대와 초기 중세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책이 전혀 독창적이지 않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선학들의 연구 업적에 크게 의존했지만, 선학들의 작업을 해석하고, 그들 사이의 견해 차이를 조정하고, 또 어떤 부분은 취하고 어떤 부분은 취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기어리 선생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개별적, 구체적 서술은 대부분 과거의 학자들에게서 빌려왔지만, 종합적 견해 자체는 기어리 선생의 독자적이고 새로운 견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14-16쪽)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후기 고대에 로마 세계와 야만족 세계의 사이가 단절적이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옳지 않으며, 최후의 메로빙거 군주들이 대단히 무능했다는 식의 인식은 카롤링거의 프로파간다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일반적으로 후기 고대는 로마 제국에서 게르만 왕국으로 유럽이 변모하는 시기라는 인식이 있으나, 저자는 그보다는 이 시기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로마는 바바리안화(Barbarization)되고, 만족은 로마화되어, 결국에는 양쪽 사이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설명을 제시한다. 즉 5세기 말 로마 세계와 바바리안 세계는 크게 보아 하나로 통합되었고, 후기 고대의 세계에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범주는 아무런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동로마 황제가 ‘바바리안’인 루기 족을 수족으로 부렸다거나, 제국의 안정에 대한 위협이 귀족 오도아케르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왕국 내의 ‘로마 인들’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예를 보면, 저자의 이런 설명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25쪽) 이후 저자는 5개 장에 걸쳐 메로빙거 문명이 후기 고대 세계의 틀 속에서 존재하다가 사라졌으며, 프랑크 귀족과 갈리아·로마 귀족이 서로 어떻게 협력하고, 서로가 서로를 흡수하며, 결국 후기 고대의 세계가 초기 중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게으름뱅이’란 말로 상징되는 최후의 메로빙거 왕들에 대한 인식에 반박을 내어놓고 있다. 이러한 인식 아래에서 마지막 메로빙거 왕들은 킬데리크 3세의 퇴위 이전에 이미 모든 권한을 상실하고 단지 이름만 왕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의례에 따라 황소 달구지를 타고 다니며 외국 사절을 접대하고, 연례 회의에서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 전부였다. 카롤링거 왕조가 메로빙거 왕조를 대체한 것은, 메로빙거 왕조가 대단한 폭군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메로빙거 왕조가 대단히 무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한 대로, “금장식된 마차를 타고, 외국 사절들을 접대하며, 의회에서 정당이 작성한 연례 연설문을 낭독하는 영국 군주”를 떠올리면, ‘왕국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의 존재’(symbolic personification of the kingdom)는 그 사회에 상당히 유용하고, 또 중요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01쪽)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저자는 고대와 중세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데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 300년에 대해서는 암흑기이자 야만의 시대, 쇠퇴와 멸망의 우울한 시대로, 그 주역 중 하나인 메로빙거의 왕들은 잔혹한 거짓말쟁이이거나 무능하고 무기력한 게으름뱅이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기어리 선생은 메로빙거 시대가 활력과 창의가 넘치는 시기였으며, 클로비스와 그 후계자들은 로마의 행정체계와 성문법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그 학예에 적응해 나가며 이제까지와 다른 새로운 로마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고 주장한다. “로마의 창조물인 바바리안 세계는 바로 그 로마의 창조자가 되었다”는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저자의 시각을 강렬하게 요약하는 바이다. (310쪽)

한국어판으로 300쪽이 넘는 내용을 간략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을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논지에 대해서 기어리 선생은 나름 탄탄하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고 본다. 피터 히더 선생의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을 어릴때 읽고 나서 후기 고대 서양사 관련 도서는 처음 읽는 것 같은데, 상당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김현진 선생의 The Huns를 읽다가 참고문헌에 제시된 연구 중 한국어판 번역본이 있는 몇 안되는 책이라 한번 살펴보았는데, 대단히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 2021년 8월 31일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10월 23일까지 한번 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