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과 오스만국가의 영향 Ⅰ. 머리말
모스크바국가가 대두하면서 루시세계에는 새로운 토지소유권의 형태, 포메스티예(Pomestʹe: 봉직영지)가 등장했다. 분령시기 루시세계에 일반적인 토지 보유의 형태는 보트치나(Votchna: 세습영지)였는데, 이것은 사거나 팔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였다. 그런데 이반 3세와 그 이후 벨리키 크냐지(Velikiĭ kniazʹ)들 사이에서는 보트치나와 달리 봉직자에게 기한을 정하고 통상적으로 직무의 조건이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존 시에만 보유하게 했던 포메스티예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특히 이반 4세는 1556년 포괄적인 조직이나 기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포메스티예 보유자의 봉직을 위한 일반적인 규정을 마련했다. 포메스티예체제의 핵심은 이반 3세와 그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봉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하고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¹
베르나츠키가 지적하였듯, 이 포메스티예체제는 모스크바 벨리키 크냐지-차르 권력의 중요한 원천으로 기능했다.² 보치나는 포메스티예와 달리 사유지의 성격이 강했다. 보트치나 보유자는 이탈의 자유를 지녔고, 그들의 토지도 비제약적이었던 것이다.³ 그러나 포메스티예는 달랐다. 봉직자의 복무가 중단되면, 토지소유권도 중지되었다. 보치나 보유자와 달리 포메스티예 보유자는 이탈의 자유를 지니지 못했다. 또한 포메스티예는 수도원 보유의 포메스티예를 제외하면 증여나 판매가 불가능한 제약적 토지였다.⁴ 또한 도널드 오스트로우스키(Donald Ostrowski)가 지적하였듯 보치나와 달리 포메스티예는 비기독교도에게도 수여되며 다양한 족류(ethnie, 族類)로 구성된 모스크바국가의 구심력을 높이는 기능도 수행했다.⁵
이렇듯 중앙집권적 제도의 성격을 지니는 포메스티예체제는 모스크바국가가 ‘초기근대제국(early modern empire)’이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피터 퍼듀(Peter C. Perdue)는 일찍이 모스크바-러시아제국, 오스만제국, 무굴제국, 명-청제국, 사파비제국 등이 행정적 중앙집권화와 계획적인 다족류적 구성요소, 적극적인 영토 개척이라는 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고 지적했다.⁶ 이런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포메스티예라는 봉토 구조는 모스크바국가라는 거대한, 여러 족류로 구성된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포메스티예는 어떻게 모스크바국가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19세기 콘스탄틴 네볼린(Konstantín A. Nevólin)은 이반 3세와 결혼한 조이 팔레올로기나[Zoi Palaiologina, 결혼 후 소피야(Sofiia)로 개명]를 통해 비잔틴제국의 프로니아(Pronoia)제도가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정했다.⁷ 그러나 조이와 이반이 결혼한 시점은 1472년이고, 그전까지 이탈리아에서 생활하고 있던 조이 주변에 프로니아의 운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다른 설명으로는 몽골제국을 통한 이크타(Iqṭāʿ)의 수용이 있다. 그러나 이 설을 처음 제기한 베르나츠키 스스로도 인정하였듯, 포메스티예체제가 뚜렷한 형태를 띠게 된 시점은 16세기로, 몽골제국의 영향력이 루시세계에서 쇠퇴한 시점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한계가 있다.⁸
이 글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두 설명을 대신하여 오스만제국의 티마르(Timār)체제가 모스크바국가의 포메스티예체제 확립에 영향을 주었음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티마르 역시 봉사의 대가로 조세수입원의 이용을 허락해주는 일종의 세정(稅政) 관행이었다. 티마르와 포메스티예 모두 군사적 봉사에 대한 대가로 제공되는 일이 일반적이었던 만큼, 유사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⁹ 그러나 이들 연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러한 유사성이 발생했는지를 다루지 않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우선 포메스티예가 등장하는 배경과 거기에 몽골제국의 제도가 정확히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음 단락에서는 포메스티예가 진정으로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오스만국가의 티마르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겠다. 이를 통해 모스크바국가가 어떻게 당면한 상황에 맞게 외부의 사례를 참고하고, 이를 유연하고 모스크바의 환경에 맞게 해석하여 적용했는지, 또 다른 초기근대제국들과 모스크바국가가 어떤 면에서 공통점을 가졌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리라 기대한다.
¹ 조지 베르나츠키, 『몽골 제국과 러시아』, 김세웅 옮김 (서울: 선인, 2016), 533-35쪽; 니콜라스 랴자놉스키 · 마크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 上』, 조호연 옮김 (서울: 까치, 2011), 175-76, 219쪽; 바실리 오시포비치 클류쳅스키, 『러시아 신분사』, 조호연 · 오두영 옮김 (파주: 한길사, 2007), 250쪽.
² 베르나츠키, 『몽골 제국과 러시아』, 535쪽.
³ 오두영, 「러시아 봉건제에 대한 재해석」, 『中蘇硏究』, 29/4 (2006), 172쪽.
⁴ Donald Ostrowski, “The Military Land Grant Along the Muslim-Christian Frontier”, Russian History/Histoire Russe, 19/1-4 (1992), pp. 331-32.
⁵ Ostrowski, “The Military Land Grant”, pp. 347-48.
⁶ Peter C. Perdue, “Comparing Empires: Manchu Colonialism”,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20/2 (1998), pp. 258-59.
⁷ Ostrowski, “The Military Land Grant”, p. 335.
⁸ 베르나츠키, 『몽골 제국과 러시아』, 535쪽.
⁹ 박지배, 「근대 초 러시아 국가의 군사개혁과 동서양의 영향」, 『서양사론』 121 (2014), 42-43쪽; Gábor Ágoston, “Military Transformation in the Ottoman Empire and Russia, 1500-1800”, Kritika: Explorations in Russia and Eurasian History, 12/2 (2011), pp. 290-93; Karen Barkey and Rudi Batzell, “Comparisons Across Empires: The Critical Social Structures of the Ottomans, Russians and Habsburgs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in Peter Fibiger Bang and C.A. Bayly, eds., Tributary Empires in Global History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1), pp. 24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