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Ⅱ. 포메스티예의 등장
13세기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는 14세기와 15세기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증대된 군사적 요구에 직면한 모스크바 벨리키 크냐지는 군사 계급을 조직해야만 했다. 더욱이 몽골 등 외부로부터 유입된 많은 전사들을 부역하기 위한 군역지도 필요했다. 이것이 봉사에 대한 대가로 하사되는 조건부 토지, 포메스티예였다.¹⁰
앞서 언급하였듯, 루시세계에 포메스티예 이전에 세습봉토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0세기 중엽에 하자르 제국이 몰락한 이후 루시 세계에서는 자기 방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부유한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고, 최초에는 노예 인력이 이 집단의 중추가 되었다. 유목민의 약탈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이들 상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며 도시로 모여들었다. 이후 루시 세계의 통합이 느슨해지자 이들의 독자 세력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북동부 방면에서 식민화를 추진중이던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각 공후들은 이 상황에서 농민들을 관리할 관리와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무한정인 토지를 하사했다. 이 토지가 바로 보트치나(세습영지)였다. 그러나 광대한 토지에 비해 가신과 정착민의 수는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가신과 정착민 모두 자신의 군주를 바꿀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가 성립하였다. 군사적 가신의 이전 공후의 영역 내에 있는 토지의 상실 없이 다른 공후에게로 옮겨갈 수 있었다. 즉, 가신들은 이탈의 자유를 지녔고, 그들의 토지도 비제약적이었다. 따라서 가신들이 보유한 토지는 사유지의 성격이 강했다.¹¹
요컨데 모스크바 벨리키 크냐지는 봉직귀족을 확보하면서도, 보트치나와 달리 자신들에게 순전히 충성하는 관리를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바로 포메스티예였다. 포메스티예의 첫 등장은 이반 3세의 재위인 15세기 말 노브고로드 정복이었다. 1478년,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를 정복한 뒤 포메스티예를 대규모로 설치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모스크바의 하층 귀족들에게 포메스티예를 내려주고, 노브고로드의 귀족들에게는 대신 모스크바 방면의 토지를 줬다. 요컨데, 포메스티예가 도입된 핵심적인 목적은 이반 3세가 자신들의 군사 봉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절대적인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¹²
그렇다면 보트치나와 포메스티예의 차이는 어디서 기원했던 것일까? 먼저 베르나츠키는 몽골제국의 영향력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이슬람법의 땅이 몽골제국에 통합되었고, 이후 황금오르다의 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음으로, 이슬람식 봉건제(Islamic feud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몽골시대 루시세계에 일부 영향력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 가운데 하나가 이크타라는 것이었다.¹³ 이크타는 10세기 이란의 부야조(āl-e Būya)에서 주화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군인 봉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부야조는 봉사에 대한 보수로 군인에게 일정 토지의 용익권(用益權)을 주었다. 그러나 이크타는 원칙적으로 군주의 선물이었고, 언제건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셀주크조는 이크타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여 군인 외에도 고위관료나 셀주크조 구성원에게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본래 수조권(收租權)만이 부여되던 이크타에 행정권(行政權)도 함께 부여되는 경우가 생겨났다.¹⁴
레우벤 아미타이(Reuven Amitai)와 같은 학자는 황금오르다에 이크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¹⁵ 존재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황금오르다는 훌레구울루스의 성립 이전 후라산과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아란, 조지아 등을 인추(inčü: 사유재산)로 보유(혹은 간주)하고 있었는데,¹⁶ 아마 이 과정에서 이크타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븐 비비(Ibn Bībī)에 따르면 황금오르다의 베르케(재위 1257-66년)는 망명한 셀주크 술탄 이주딘 카이카부스 2세(ʿIzz al-Dīn Kaykāvus II; 1278-79년 사망)에게 오늘날 수다크와 스타리크림을 이크타로 부여했다.¹⁷ 이븐 할둔은 노가이(1299년 사망)이 외손자 카라자 이븐 타슈테무르(Qaraja b. Taš-Temür)에게 크름시[madīna al-Qirim, ─市]를 이크타로 부여했다고 전한다.¹⁸
이러한 관행의 결과 몽골 시대 모스크바 궁정에서는 궁정신하가 복무의 대가로 임시로 소규모 토지 보유를 허락받았고, 복무가 중단되는 경우 토지 소유 또한 중지되는 포메스티예의 원형이 나타났다. 과거 동루시의 귀족이 크냐지에게 불만족하는 경우에는 다른 크냐지에게 복무할 수 있었고, 떠난 귀족의 영지는 보트치나(세습영지)이기 때문에 상실되지 않았다. 그러나 1374년 이반 바실리예비치 벨리야미노프(Ivan Vasilʹevich Velʹiaminov)가 모스크바를 배신하고 트베르공국으로 도망가자 장원이 몰수된 사례나 1433년 모스크바국가의 귀족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프세볼로시스키(Ivan Dmitrievich Vsevolozhskiĭ)가 갈리치편으로 돌아섰을때 장원이 몰수된 사례는 이크타의 원리가 차츰 모스크바로 유입되고 있었던 증거라 할 수 있다.¹⁹
도널드 오스트로우스키는 황금오르다의 이크타가 코르믈레니예(Kormlenie)를 거쳐 포메스티예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²⁰ 그리고 코르믈레니예가 포메스티예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15세기 모스크바국가로 유입된 칭기스조 친왕(oġlan, ulany, 親王)들이었다.²¹ 16세기 후반 노브고로드 지방에서 포메스티예를 받은 하위귀족층이 튀르크 · 몽골인이었다는 사실²²은 베르나츠키와 오스트로우스키의 추정이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랴자놉스키는 심지어 이들 튀르크 · 몽골계 하위귀족들이 이슬람 신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²³ 16세기 모스크바국가에서 몽골 귀족이 귀족층에서 차지한 비율은 17-20%에 달했다고 한다. 몽골 혈통을 이어받은 귀족층 인사 가운데는 모스크바-러시아의 군주 자리에까지 이르기도 했으니,²⁴ 포메스티예가 모스크바국가의 구심력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¹⁰ 오두영, 「러시아 봉건제에 대한 재해석」, 174쪽; 클류쳅스키, 『러시아 신분사』, 249-50쪽.
¹¹ 오두영, 「러시아 봉건제에 대한 재해석」, 171-72쪽;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上』, 175, 238쪽; 베르나츠키, 『몽골 제국과 러시아』, 503-04쪽.
¹²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上』, 176, 238쪽; Carol B. Stevens, Russia’s Wars of Emergence, 1460-1730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3), p. 38.
¹³ George Vernadsky, “Feudalism in Russia”, Speculum, 14/3 (1939), p. 312.
¹⁴ A.K.S. Lambton, “Eqṭāʿ”, Encyclopaedia Iranica Online (Encyclopaedia Iranica Foundation, 2020).
¹⁵ Reuven Amitai, “Review: Donald Ostrowski, Muscovy and the Mongols: Cross-cultural Influences on the Steppe Frontier, 1304–1589. Cambridge, E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p. xvi, 329; black-and-white figures and tables. $59.95”, Speculum, 77/2 (2002), p. 618.
¹⁶ Quṭb al-Dīn al-Shīrāzī, The Mongols in Iran: Qutb Al-Din Shirazi's Akhbar-i Moghulan, George Lane, trans. (Abingdon: Routledge, 2018), pp. 60, 91; 宋濂 等, 「本紀第三: 憲宗」, 『元史』 (北京: 中华书局, 1976), 卷3, 45面.
¹⁷ İbn Bibi, El-Evâmirü’l-ʿAlâʾiyye fi’l-umûri’l-ʿAlâʾiyye (Selçuknâme), Mürsel Öztürk, Haz. (Ankara: T.C. Kültür Bakanlığı, 1996), s. 162.
¹⁸ Uli Schamiloglu, “Tribal Politics and Social Organizationin the Golden Horde”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1986), pp. 139-40.
¹⁹ 베르나츠키, 『몽골 제국과 러시아』, 503-05, 534-35쪽.
²⁰ Ostrowski, “The Military Land Grant”, pp. 347-59.
²¹ Donald Ostrowski, Muscovy and the Mongols: Cross-cultural influences on the steppe frontier, 1304-1589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p. 54-55. 몽골제국 후계국가들에서 보이는 봉토제도의 양상에 대해서는 R. Yu. Pochekaev, “The Evolution of Soyurghal in Chinggisid and Non-Chinggisid States during the Post-Impreial Period”, Zolotoordynskoe obozrenie / Golden Horde Review, 6/4 (2018), pp. 729-40을 참고.
²² Janet Martin, “The Novokreshcheny of Novgorod: Assimilation in the 16th Century”, Central Asian Survey, 9 (1990), pp. 13-38.
²³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上』, 238쪽.
²⁴ 이주엽, 『몽골제국의 후예들: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서울: 책과함께, 2020), 148-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