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Ⅲ. 포메스티예의 확산과 정착
베르나츠키와 오스트로우스키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은 몽골제국기 이크타-소유르갈(soyūrġāl)에는 포메스티예체제에서 보이는 엄격한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포메스티예를 받은 봉직자는 국가가 소집하는 때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하고 해당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 포메스티예는 회수될 수 있었다. 또한 포메스티예는 원칙적으로 상속되지 않았고, 봉직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봉직을 수행하는 경우 아버지의 포메스티예 전체가 아니라 신참에게 할당되도록 규정된 만큼의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²⁵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이자 구체적인 봉직의 대가로 지급되는 생계수단인 포메스티예의 모습은 오스만제국의 티마르와 유사하다. 티마르는 특정 수준의 조세 수입을 산출하는 조세 행정단위를 의미한다. 오스만정부는 국가의 토지 자원을 모두 조사한 뒤 그 조세 수입을 군인과 정부 관료들에게 티마르의 형태로 분배해주었다. 그 대가로 티마르 보유자는 평시에는 해당 지역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전시에는 말과 무기, 시종을 갖추어 전투를 치를 의무가 있었다.²⁶
티마르제도는 포메스티예와 마찬가지로 오스만국가가 다족류 · 다종교 사회를 통합하여 ‘오스만인(Osmanlı)’을 창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5세기 후반까지도 티마르를 받은 기병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적지 않았던 점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1431-32년 알바니아 중부와 남부에 존재하는 티마르 보유자 18%, 1454-55년 그리스 테살리아에 존재하는 티마르 보유자 17%가 기독교도였다.²⁷ 1467-68년 북세르비아 지방 티마르의 60%가량은 기독교도 소유였고, 1469년 보스니아 티마르의 82%는 비무슬림 소유였다. 이렇게 오스만국가에 포섭된 기독교도 귀족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이슬람을 수용, 오스만인으로 변화했다.²⁸
티마르와 포메스티예의 유사성은 제도의 운영 방식에서도 관찰된다.²⁹ 14세기말부터 정부는 매 산자크(sanjaq) 단위로 티마르를 비롯한 모든 봉토와 봉토 보유자의 이름, 각 마을에 거주하는 모든 가구주의 이름, 세금의 양과 종류 등 정보를 종합하여 상세히 기록한 장부를 정기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15세기가 되면 이에 더해 티마르에서 산출되는 수익에 따라 전장에 나설때 동반해야 할 종자와 장비, 무장에 대한 규정에 따라 각 티마르에 할당된 양도 기록했다. 이렇게 작성된 장부의 사본은 쿠스탄티니야(Qosṭanṭīniyya)³⁰의 데프테르하네(defter-ḫāne)에 보관하여 언제라도 참고할 수 있게 조치했다. 이후 17세기초까지 원칙적으로는 정기적으로 토지 및 세금 조사가 진행되고, 매번 카눈나메가 새롭게 갱신 · 작성되었다.³¹ 1530년대에는 티마르 상속을 엄격히 규제,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게끔 한 원칙이 규정화되었다.³²
이러한 티마르와 포메스티예의 공통성은 우연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1556년 포메스티예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이 마련되는 이반 4세 시기 활동한 이반 세묘노비치 페레스베토프(Ivan Semënovich Peresvétov)의 저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페레스베토프는 리투아니아령 루시의 정교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헝가리의 서포여이 야노시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 폴란드의 ‘노인’ 지그문트 1세, 몰다비아의 페트루 4세 라레슈(Petru IV Rareș; 재위 1527-38년, 1541-46년)의 아래에서 봉직한 잔뼈 굵은 군인이었다. 1530년대말 모스크바로 이주한 페레스토프는 차르 이반 4세의 총애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페레스토프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보야르들이 모스크바국가의 발전을 막는 원흉이라 간주하며 이반 4세에게 『대청원(Bol’shaia chelobitnaia, 大請願)』과 『소청원(Malaia chelobitnaia, 小請願)』을 바친다.³³
페레스베토프의 이상은 오스만제국의 예를 따라 군주가 곧 군인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주권의 기반은 강력한 전사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모스크바국가에 비상한 문제는 군제 개혁이었다. 페레스베토프는 이를 설득하기 위해 비잔틴로마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정복자 메흐메드 2세를 비교했다. 콘스탄티노스의 제국에서는 “심지어 가장 뛰어난 사람들마저도 유력자의 구속을 받았지만(u vel’mozh ego i lutchie liudi poraboshcheny byli)” 현명한 술탄 메흐메드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의 군대로 포섭했고, 한때 황제의 유력자들에게 노예처럼 시달렸던 이들은 술탄의 아래에서 능력을 떨쳤습니다 (dal im voliu, i vzial ikh k sebe v polk, i oni stali u tsaria lutchie liudi, kotorye u vel’mozh tsarevykh v nevole byli).” 그런데 모스크바의 상황은 어떠한가. 페레스베토프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작은 포메스티예를 사여 받았다. 그러나 “폐하께서 내려주신 포메스티예는 강력한 이들의 농간으로 파괴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중략] 농간과 속임수는 저를 헐벗고, 말도 없는 처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Tvoe, gosudar’, zhalovan’e, pomest’e ot velikikh liudei ot obid nariadili pusto. … Ot obid i volokit nag i bos i pesh)”³⁴
이반 4세가 페레스베토프의 청원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50년대 이반 4세가 추진한 개혁은 페레스베토프의 개혁안에 자극을 받은 듯 보인다. 페레스베토프의 주장대로 포메스티예의 관리는 더욱 철저해졌다. 이제 포메스티예의 규모 및 포메스티예 보유자들이 필요할 때에 제공해야 하는 군사들과 말의 수 사이의 일정한 관계가 처음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이반 4세는 크냐지와 보야르 등 페레스베토프가 비난한 유력자들을 살해, 중앙집권화 · 절대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다른 계급의 이해를 포메스티예 보유자의 이해에 종속시켰다.³⁵
마침내 포메스티예는 거대한 다양한 언어와 종교, 족류가 존재하는 제국에서 발생하는 원심력을 억제하고 진정한 ‘제국’의 엘리트가 형성될 물질적인 기반을 공급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제국의 질서에 의존하게끔 만드는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포메스티예 제도가 성장하고 국가 봉직이 통일성 있게 확대 · 표준화됨에 따라서 다양한 지주들이 아주 동질적인 봉직귀족 계급으로 통합되어 나갔던 사실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제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모스크바 군주의 복무에 묶인 처지가 되었다.³⁶
²⁵ 박지배, 「근대 초 러시아 국가의 군사개혁과 동서양의 영향」, 43쪽.
²⁶ 도널드 쿼터트, 『오스만 제국사: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이은정 옮김 (파주: 사계절출판사, 2008), 61쪽; Colin Imber, “Government, administration and law”, in Suraiya N. Faroqhi and Kate Fleet,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Turkey, Vol. 2: The Ottoman Empire as a World Power, 1453-1603 (Cambridge, et. 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pp. 229-30.
²⁷ Pál Fodor, “Ottoman warfare, 1300-1453”, in Kate Fleet, ed., The Cambridge History of Turkey, Vol. 1: Byzantium to Turkey, 1071-1453 (Cambridge et 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 199.
²⁸ Géza, Dávid, “Ottoman armies and warfare, 1453–1603”, in Suraiya N. Faroqhi and Kate Fleet,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Turkey, Vol. 2: The Ottoman Empire as a World Power, 1453-1603 (Cambridge, et. 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pp. 287-89.
²⁹ 티마르제도와 포메스티예제도를 직접 비교, 이를 근거로 포메스티예가 티마르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처음 한 학자는 세르게이 네페도프(Sergey A. Nefedov)로 보인다. Sergey A. Nefedov, “Eski Rusia’ da Osmanli sistemi: Timar”, Diyalog Avrasya, 8 (2003), s. 34-40. 세르게이 네페도프는 이 점을 “Reformy Ivana III i Ivana IV: osmanskoe vliianie”, Voprosy istorii, 11 (2002), c. 30-53; “K voprosu o tsivilizatsionnom vliianii Zolotoĭ Ordy i Osmanskoĭ imperii na russkie kniazhestva”, Zolotoordynskoe obozrenie / Golden Horde Review, 8/4 (2020), c. 753-70에서 이 점을 더욱 상세하게 기술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확인하지 못했다.
³⁰ 오스만 시대 공문서에서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오스만어형인 코스탄티니예(Qosṭanṭīnīye)를 포함, ‘위대한 칼리프의 좌이자 고귀한 술탄들의 중심인 코스탄티니예 대도시(Dār al-Ḫilāfa al-ʿaliyya ve maqarr-i Salṭana-i seniyyem olan maḥmiyye-i Qosṭanṭīnīyye)’이라고 지칭되는 경우가 가장 다수였다.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이 도시의 정식 명칭이 된 것은 현대의 일이다. Halil İnalcık, “İstanbul”, TDV İslâm Ansiklopedisi, XXIII (İstanbul: Türkiye Diyanet Vakfı, 2001), s. 220.
³¹ Imber, “Government, administration and law”, pp. 231-32.
³² Colin Imber, “The Ottoman empire (tenth/sixteenth century)”, in Maribel Fierro, ed., The New Cambridge History of Islam, Vol. 2: The Western Islamic World, Eleventh to Eighteenth Centuries (Cambridge et 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p. 355-56.
³³ Yeshayahu Gruber, “Ivan Peresvetov”, in David Thomas and John Chesworth with John Azumah, Stanisław Grodź, Andrew Newman, Douglas Pratt, eds., Christian-Muslim Relations A Bibliographical History, Vol. 7: Central and Eastern Europe, Asia, Africa and South America (1500-1600) (Leiden, Boston: Brill, 2015), pp. 278-79.
³⁴ Ruslan G. Skrynnikov, Reign of Terror: Ivan IV, Paul Williams, trans. (Leiden, Boston: Brill, 2015), pp. 34-36. 한편 페레스베토프는 예니체리와 같은 부대가 모스크바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Gruber, “Ivan Peresvetov”, p. 288.
³⁵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上』, 219, 237-38쪽. 찰스 핼퍼린(Charles J. Halperin)은 오스만국가의 티마르는 수조권을 받았던데 반해 모스크바국가의 포메스티예는 토지 자체를 받았다며, 페레스베토프의 ‘청원’은 이반 4세의 개혁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Ivan The Terrible: Free to Reward and Free to Punish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19), p. 120. 그러나 이 차이는 오히려 모범 사례를 모스크바의 사정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한 이반 4세의 유연성을 증명한다고 보아야 한다.
³⁶ 베르나츠키, 『몽골 제국과 러시아』, 503-05쪽;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上』, 219,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