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의 의미 변화: 동로마에서 그리스 제국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부르는 방식”에서도 적었지만, ‘비잔티움/비잔틴 (이하 ‘비잔티움’으로 통일)’이라는 표현은 16세기 히에로니무스 볼프(Hieronymus Wolf, 1516-80년)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오늘날 사람들이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비잔티움 제국’으로 부르지도 않았고, ‘비잔티움인’을 자칭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현대 역사학적 용어인 ‘비잔티움’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기본적인 맥락에는 동의하되,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역사에 대한 시각은 점차 달라지고 있는 듯 하다. 먼저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동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명사로 사용되어 온 역사는 히에로니무스 볼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또한 ‘비잔티움’이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과 분리하여 보기 위해 사용된 시점은 히에로니무스 볼프보다 앞서고, 그러한 의미로 본격 사용된 시점은 히에로니무스 볼프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다.
먼저 ‘비잔티움’이 사용된 가장 이른 예(혹은 그럴 개연성이 있는 예)는 프리스쿠스(Priscus)의 저작이다. 프리스쿠스는 5세기말 활동한 로마 제국의 외교관으로, 5세기말 그리스어로 5세기 중반의 상황을 다룬 역사서를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프리스쿠스의 저작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콘스탄디노스 7세 포르피로예니토스(Kōnstantinos VII Porphyrogennētos, 재위 913-59년)의 ⟪역사서의 발췌(Excerpta Historica)⟫, 통칭 ⟪발췌⟫를 통해 그 내용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남아있는 내용으로 볼때, 프리스쿠스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동방과 서방, 양쪽 모두에 균등하게 관심을 두었는데, 양측 모두를 로마 제국의 한 부분으로 다루되 지리적・행정적으로 구분이 필요한 경우 ‘동로마인’이나 ‘서로마인’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10세기 편찬된 백과사전 ⟪수다(Souda)⟫에서 프리스쿠스의 역사서 제목이 “비잔티움의 역사(Istoria Byzantiakē)”로 서술되었다는 사실이다. 블로클리(R.C. Blockley) 선생은 이 제목이 프리스쿠스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선생이 지적했듯,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5세기와 10세기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동로마인’이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한편, 프리스쿠스와 거의 동시대인인 역사가 말쿠스(Malchus)가 적은 역사책 역시 ⟪비잔티움사(Byzantiaka, —史)⟫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Kaldellis 2021: 350-51; Blockley 1981-83: 1.49, 2.402. ⟪수다⟫에 대해서는 스타타코풀로스 2022: 220 참고)
동로마인이 ‘비잔티움’을 자칭으로 사용한 예는 7세기 후반에도 존재하는데, 이 경우는 더욱 직접적이다. 로마 황제 콘스탄디노스 4세(Kōnstantinos IV, 재위 668-85년)는 로마 교황 도누스(Donus, 재임 676-78년)에게 단성설 단죄를 위한 세계공의회 개최를 알리는 칙령(Sacra)을 보냈다 (제6차 세계 공의회 혹은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대해서는, 스타타코풀로스 2022: 137-38 참고). 그런데 콘스탄디노스 4세는 도누스에게 공의회에 참석시킬 인원을 미리 준비할 것을 요구하면서, 칙령에 “그대의 가장 신성한 교회로부터, 만약 그대의 지복(至福)이 원한다면, 12 대주교와 주교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세 사람 혹은 그대의 지복(至福)이 원하는 만큼의 수를 보내도 좋겠는데, 비잔티온(Byzantiōn)의 수도원들에서는 각 수도원 당 수도사 4명을 보내기로 했다”(강조는 필자)라고 적었다. 이 칙령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남은 사본들을 비교해보았을때 후대의 가필이나 수정이 가해지지 않았음은 확실해보인다. 파나요티스 테오도로풀로스(Panagiotis Theodoropoulos) 선생은 당대의 상황으로 볼때, 콘스탄디노스 4세의 ‘비잔티온’을 ‘동로마’로 새길 수 있다고 보았다. (Theodoropoulos 2021: 26-39)
시대를 좀 더 뒤로 돌려서 보면, 오스만조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활동한 그리스인, 라오니코스 할코콘딜리스(Laonikos Chalkokondylēs)가 (동)로마 황제를 ‘비잔티온의 왕(Basileis Byzantion)’으로, 그 신민을 ‘비잔티온인(Byzantioi)’으로 부른 예가 있다. 그러나 칼델리스 선생은 할코콘딜리스의 ‘비잔티움’이 가진 맥락은 앞서 살펴본 사례들과 다르다고 보았다. 할코콘딜리스는 아테네 태생으로, 미스트라에서 플라톤을 열렬히 추종한 철학자 예미스토스 플리톤(Gemistos Plēthōn)의 제자가 되었다. 플리톤은 ‘최후의 헬라스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전기 그리스에 집착했고(플리톤에 대해서는 스타타코풀로스 2022: 314, 320-21 참고), 이 성향은 할코콘딜리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할코콘딜리스는 저서 ⟪역사(Istoriai)⟫의 서문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의 주민들이 과거 수천년 동안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부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나라는 “그리스 왕국(Ellēniōn Basileias)”, 그 주민은 “그리스인(Ellēnas)”으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Chalkokondyles 2014: 6-11). 즉, ‘비잔티움인’이 ‘로마인’이 아니라는 오랜 부인의 역사는 히에로니무스 볼프보다 이미 100년 가량 앞서서, ‘비잔티움인’ 자신들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독일 제국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이 용례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1481년 페라라의 코스탄조(Costanzo da Ferrara, 1450-1524년)는 오스만조의 메흐메드 2세를 위해 만든 메달리온에서 메흐메드를 “비잔티움의 황제(Byzantii imperatoris)”라고 불렀다. 히에로니무스 볼프의 ‘비잔티움’ 명칭 사용은 이런 맥락에서 봐야한다. (Kaldellis 2021: 351-54)
그러나 로마와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는 ‘비잔티움’이 대중적으로 퍼져나간 것은 그보다 훨씬 후대인 그리스 독립 전쟁(1821-32년)이었다. 서구의 친그리스주의자들(philhellenes)은 고대(antiquity)이래 ‘그리스’라는 개념이 수 천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리스인의 제국’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관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현대 그리스 민족주의 역사학의 아버지들은 친그리스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크림 전쟁(1853-56년)이 되자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제국’인 ‘비잔티움’이라는 개념은 완연히 자리잡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정교회 제국을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스인들 또한 차르가 터키의 멍에에서 더 많은 그리스인들을 해방시키고 그리스에 더 넓은 영토를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었다. ‘원대한 이상(Megali Idea, 메갈리 이데아)’의 시작이다. 그리스는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편에 섰고, 일부 그리스인들은 러시아군에 의용병으로 합류했으며, 또 다른 그리스인들은 이피로스와 테살리, 마케도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실패했다). 칼델리스 선생이 보기에, ‘그리스인의 제국’이 서구권에서 “정치적 독소(politically toxic)”가 된 시점은 바로 이 때였다. 그리스 민족주의 역사학자 스피리돈 잠펠리오스(Spyridōn Zampelios), 콘스탄디노스 파파리고풀로스(Kōnstantinos Paparrēgopoulos)가 ‘중세 그리스 제국’을 그리스 역사의 한 단계로 만드는 연속된 그리스 내러티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만들어 진 ‘그리스인의 제국’이 곧 ‘비잔티움’이라는 관념은 이후 서구권으로 다시 돌아가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Kaldellis 2021: 357-66)
이야기가 길었다. 내 나름의 결론은 이렇다. 현대 역사학에서 사용되는 ‘비잔티움’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의 기원은 분명 중세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과 분리해서 보려는 시각에 의미적으로는 그 기원이 닿아있다. 그러나 7세기, 어쩌면 10세기까지 비잔티움 제국(로마인의 제국) 내부에는 수도 새로운 로마 = 콘스탄티노폴리스 = 비잔티온을 동로마 전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던 예가 존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적는 것이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라오니코스 할코콘딜리스가 ‘비잔티움’을 ‘로마’와 분리해 사용하면서 ‘로마다움’을 박탈당한 ‘비잔티움’ 관념이 생겨났고, 19세기 그리스 독립 전쟁과 크림 전쟁을 거치며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선생은 ⟪비잔티움의 역사⟫ 한국어판 서문에서 책을 통해 “비잔티움사 연구가 정적이고 완성된 경전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논쟁이 그치지 않는, 역동적인 변화의 장”이었음을 밝히고 싶었다고 적었다. 책을 번역하면서 그런 좋은 예를 들자면 뭐가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다음에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부터 그렇다고 말하면 되겠다 싶다. 이 글에서 참고한 자료들은 대부분 스타타코풀로스 선생의 원서 The Short History of Byzantine Empire가 나온 2014년 이후에 발표되었는데, 그 동안 이렇게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지 않았는가.
참고문헌
Chalkokondyles, Laonikos. 2014. The histories. Anthony Kaldellis, trans. Cambridge, Mass. &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2022. ⟪비잔티움의 역사⟫. 최하늘 옮김. 서울: 도서출판 더숲. (참고한 책은 출판 전에 수정 중인 초고로, 본문에 기재된 쪽수나 본문에 삽입된 책의 내용은 실제 출판본과 상이할 수 있음)
Blockley, R.C. 1981-83. The Fragmentary Classicising Historians of the Later Roman Empire: Eunapius, Olympiodorus, Priscus and Malchus, 2 vols. Liverpool: Francis Cairns.
Kaldellis, Anthony. 2021. “From “Empire of the Greeks” to “Byzantium”: The Politics of a Modern Paradigm Shift” in Nathanael Aschenbrenner and Jake Ransohoff, eds., The Invention of Byzantium in Early Modern Europe.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Research Library and Collection.
Theodoropoulos, Panagiotis. 2021. “Did the Byzantines call themselves Byzantines? Elements of Eastern Roman identity in the imperial discourse of the seventh century”, Byzantine and Modern Greek Studies, 45.1: 25–41.
사진. 페라라의 코스탄조, ⟨술탄 메흐메드 2세 메달(Medal: Sultan Mehmed II)⟩: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6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