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민군관계 Ⅱ 골츠와 연합진보회
터키의 민군관계를 역사적으로 개괄하기 위해서는 오스만 시기부터 검토해야 한다. 현대 터키의 정치와 사회에서 군부의 역할은 오스만 제국의 국가/사회 관계 구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사회는 두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지배계층은 ‘군인(askeri)’라 불리었고, 피지배계층은 ‘가축(reaya)’라 불리었다. 즉, 오스만 제국을 통치계층은 군인, 관료, 종교인 등 직업에 관계 없이 군인이라 불리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는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까지 서구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부는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정치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스만 정치 구조의 서구화는 독립 전쟁 이후 공화국의 성립까지 이어졌다. (Kutay, 2016: 7; Hanioğlu, 2011a: 47)
19세기에 군대는 “변혁의 객체이자 주체였다.” 파디샤 마흐무드 2세(재위 1808년 ~ 1839년)는 예니체리 군단을 폭력적으로 해체했다. 그 자리는 ‘유럽식 군대’인 무함마드의 승리하는 군대(Asâkir-i Mansûre-i Muhammediyye)가 채웠다. 군사위원회(Dâr-ı Şûrâ-yı Askeri)가 편성된 이후 “오스만 국가는 마침내 일관된 명령체계를 따르는 단일 군사 조직을 보유하게 되었다.” 1826년의 예니체리 해체는 오스만 개혁의 분기점이었다. 비록 일부는 이를 ‘상서로운 사건’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이 사건은 “1868년부터 1908년까지 유지될 관료독재로 가는 중요한 한 발자국이었다.” (Hanioğlu, 2011b: 177-78)
하미드 정권 아래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비록 아직까지는 민간 부문과 군사 부문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기는 했으나, 육군과 해군의 지휘관들은 내각의 일원이었다. 즉, 군부가 군사 이외의 분야에서도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먼 지방에 파견되는 장군이 행정관과 지휘관을 겸임하는 관행이 만연해졌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하니올루는 군부의 의견이 민간 기구의 의견과 동등하게 받아들여졌다고 적었다. 그러나, 여전히 민간 관료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고는 있었다. (Hanioğlu, 2011b: 180)
오스만 사회에서 군부가 스스로를 투영한 모습은 독일의 군사 이론가이자 ‘터키군의 아버지’ 콜마르 폰 데어 골츠(Colmar von der Goltz)가 촉발한 군사 개혁 이후 크게 변화했다. 폰 데어 골츠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사관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무와 훈육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불어넣고,” “사회에서 군인의 역할을 강화하려 했다.” 《무장한 인민》(Das Volk in Waffen, 1883년)을 통해 골츠는 군인은 우월한 계층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따라 단순히 국가의 종복으로만 남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골츠는 이렇게 적었다. “군주란 모름지기 위대한 군인이어야 한다.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은 언제나 권좌에 오르길 기대받아왔다.” 골츠는 오스만 사회에 자신의 사상이 꼭 드러맞는다고 여겼다. 오스만 사회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지도를 요구하고 있었고, 바로 그 계층이 군인이라는 것이었다. 하니올루는 골츠의 책이 오스만어로 번역된 뒤 사관학교에서 널리 읽혔음을 지적했다. 즉, “오스만 장교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을 무장한 국가로 변화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미드 정권에서 군부의 역할은 단순히 조언에 불과했고, 하미드 정권 아래에서 이를 실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군부는 권력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하니올루는 그런 면에서 터키군은 아타튀르크의 후예라기보다는 골츠와 연합진보회의 후예라고 보았다. (Hanioğlu, 2011a: 34-35; Hanioğlu, 2011b: 181)
군부는 1908년의 혁명을 통해 권력을 손에 쥐었다. 1908년의 청년튀르크(Jön Türk) 혁명은 민군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하니올루에 따르면, 본래 범군사조직이었던 연합진보회(İttihat ve Terakkî Cemiyeti)는 혁명 이후 오스만 군대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다. 본래 연합진보회는 지식인들의 조직이었으나, 1907년 이후 범군사 조직으로 진화했다. 연합진보회는 국가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정치적 목표는 파디샤가 1876년의 오스만 헌정으로 돌아가게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연합진보회의 다수를 이루던 위관급 장교나 영관급 장교는 대부분 서구식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반면 사관학교를 거치지 않았던 장관급 장교들은 오스만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며, 황제를 정치에서 배제하길 주저했다. 따라서 연합진보회는 혁명 이후 장관급 장교를 몰아내면서 차츰 정치 조직으로 변신한다. 연합진보회는 스스로 입헌군주제의 수호자로 행세했다. 그러면서 연합진보회의 지도자들은 오스만 군대 내부에 자신들에게만 충성하는 조직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Hanioğlu, 2011b: 178-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