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민군관계 Ⅵ 에르도안주의와 군부 계도의 끝
복지당 해산 명령이 내려지기 직전, 복지당을 구성하던 정치인들 다수는 1997년 12월 17일 미덕당(Fazilet Partisi)을 창당했다. 미덕당에는 모국당의 일부 국회 의원이 가세하여 총 의석수는 146석이 되었다. 사실상 미덕당은 복지당의 이름만이 바꾸어 만든 정당이었고 그 구성원과 정치노선은 대동소이했다. 복지당은 본래 민족적 가치론자(Milli Görüçü)를 자처하며 보수민족집단을 이루었다. 이들은 당수 에르바칸을 ‘호자(Hoca)’라 부를 만큼 이슬람 전통을 강조했다. (김대성, 2008: 6-7)
그러나 미덕당 창당을 전후로 미덕당 내부에서는 당내 소장파를 중심으로 에르바칸 일파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소장파는 에르바칸이 표방하는 보수성향의 민족적 가치론자의 노선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들 소장파는 신보수민족집단을 자처하며, 종교적 성향이 강한 민족적 가치론자 노선으로는 장기적 활로를 찾는데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1999년 4월 18일 총선에서 미덕당은 제3당으로 밀려났다. 미덕당 내부 갈등은 2000년 5월 14일의 전당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비록 에르바칸이 지지하는 후보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신보수민족집단이 낸 후보 압둘라흐 귈(Abdullah Gül)이 기대 이상으로 많은 표를 얻었던 것이다. 경선 결과에 만족한 신보수민족집단은 새로운 정당을 결성할 준비에 착수했다. 헌법재판소가 2001년 6월 22일, 미덕당의 정치 노선이 세속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해산판결을 내리자, 미덕당 내 소장파는 보수민족집단과 결별하고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김대성, 2008: 6-8)
이때 신보수민족집단을 이끈 이가 바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이었다. 그가 창당한 정의발전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 AKP)은 2001년 8월 14일, 51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한 발기인 총회를 통해 창립되었다. 당 대표를 맡은 에르도안은 ‘보수민족집단의 옷’을 벗었으며 ‘종교주의, 인종주의 및 지역주의’를 배격한다고 선언하며 보수민족집단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선명한 종교적 노선을 중시했던 복지당이나 미덕당과 달리 정의발전당의 ‘보수민주주의(Muhafazakar Demokrasi)’ 노선을 채택해 민주적 정치 절차를 비롯한 현대의 가치와 이슬람 전통의 조화를 꾀했다. 당규에 따르면 정의개발당은 터키의 헌법과 정당법의 범위 내에서 활동하고, 민주적 정치 절차를 비롯한 현대의 정치적 가치와 이슬람 전통의 조화에 바탕한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또한 실용주의를 통해 국민의 복지 수준 향상을 도모하고 이슬람 전통의 유지와 서구적 가치의 실용적 적용 및 조화를 추구한다. 보수민족집단은 행복당(Saadet Partisi)를 2001년 7월 20일 창당했다. (김대성, 2008: 8-9 정의발전당의 규정, 정책, 노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9-15 참고)
정의개발당은 2002년 총선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계획’ 공약으로 중도 보수정당의 입지를 굳혔다. 터키 의회의 3분의 2(550석 중 360석)이 정의개발당의 손에 들어갔고, 이는 2007년 총선까지 이어졌다. 당시 터키 국민들은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에르도안은 이러한 심리를 잘 포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에르도안은 기존의 다양한 기득권 세력과 군부의 지속적인 견제 및 정치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정책과 법 개정 그리고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EU에 가입하고자 국제 기준에 맞는 민주주의 개혁을 꾸준히 이끌며 대외적으로는 전향적 국제관계를 맺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2011년까지만 해도 에르도안 정권은 이슬람 세계 민주주의 모델의 모범으로 찬양받았다. (이은정, 2016: 234-35; 김종일, 2012: 14; Akyol, 2016)
1989년, 외잘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격한 자본자유화 조치를 시행하여 외국자본의 유입을 완전허용한 결과 터키의 경제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당시 터키의 거시경제 안정성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또한 정부의 단기 외채조달 비중이 급증하였고, 이는 국내 이자율 상승과 단기 자본이동의 확대로 이어졌다. 상업은행이 정부채권 구입을 확대하는 바람에 대·내외의 과도한 채무발행이 발생했고, 터키 경제는 환율위험과 이자율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부문에 규제를 취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터키 경제는 외부의 충격과 자본 유출에 극도로 취약한 상태가 되었고, 1990년대는 터키 경제 최악의 암흑기였다. 1999년은 그 정점으로, 터키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장태석, 2015: 109-10; Pamuk, 2008: 289)
이 위기는 2001년 터키 정부가 케말 데르비쉬(Kemal Derviş)를 초청해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데르비쉬는 투자 활성화정책과 재정 및 금융 건전화 정책으로 경제 안정화를 도모하였다. 또한 변동환율제 채용을 통해 공공부문의 부채를 장기적으로 민간부문으로 이전하는데 성공했다. 중앙은행의 독립권을 강화하고 민간은행이나 공기업에 정치권이 개입하지 못하게끔 하는 등 제도 개혁도 함께 실시했다. 2001년 실질 GDP는 9.5% 하락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5년 동안 35% 이상 상승했다. 2005년에는 마침내 연간 인플레이션율도 8% 이하로 내려갔다. 이는 1960년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02년에 집권한 에르도안도 데르비쉬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장태석, 2015: 109; Pamuk, 2008: 290-91)
덕분에 에르도안 정권의 첫번째 10년 동안 경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터키의 기적(Türk mucizesi, Turkey’s Economic Miracle)’이라 불릴 정도였다. 해당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6%에 가까웠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도 금리 하락을 통해 환율을 잘 조정하여 실업률은 평균 8%, 인플레이션은 평균 4% 아래로 유지했다. 나중에 드러났듯, 터키 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세계적인 양적완화정책으로 인한 외채의 유입이었다. 표 3⒝에서 나타나듯, 사실 터키 경제의 규모는 세계에 대비해 그리 확대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2007년부터 성장은 차츰 둔화되었고, 2012년부터 2015년 사이의 성장률은 평균 3%대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어쨋든 외형상으로 터키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인상이 대내외적으로 퍼졌고, 2013년에 IMF 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하는데 성공하여 더 강화되었다. 이는 에르도안 정권이 유지되는 힘이었다. (장태석, 2015: 110; Subaşat, 2014; The Economist, 2016: 4; Karakaya, 2016)
한편, 에르도안은 민주화 개혁을 수행했다. 2003년 7월에 입안된 민주화 조치는 2003년 8월 7일부터 발효되었다. 이는 과거 터키의 민군관계를 감안하면 기대 이상으로 급진적이었다. 민군관계는 터키의 EU 가입 시도 덕분에 국제 문제로 떠올랐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EU 가입을 위한 코펜하겐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의회는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하여 군대가 정치 문제에서 가졌던 특권을 제약했다. 일련의 개혁으로 군대의 자원과 소비에 대한 의회와 회계감사원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국가안정보장회의에 민관 인사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사무국도 민관으로 이관되었으며, 국가안정보장회의의 권력도 감소했다. 국가보안법정(Devlet Güvenlik Mahkemesi, DGM)은 폐지되었다. 평화기에도 민간인을 재판하려던 군사법원의 관할권 확장 시도는 좌절되었고, 군인사의 재판도 민간법원으로 이관되었다. 더 나아가, 터키 고등교육협의회와 터키 라디오·TV 최고위원회(Radyo ve Televizyon Üst Kurulu, RTÜK)에 있던 군인들도 물러났다. EU의 주요 기관들은 터키가 (완전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코펜하겐 기준에 만족시키고 있다며 가입 협상의 시작을 허락했다. 이 덕분에 에르도안은 터키 사회의 ‘비군사화’라는 목표를 대외적으로 표명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 (Çalışkan, 2017: 8-10; Karaosmanoğlu, 2012: 149; Cizre, 2008: 321-23)
경제와 정치 양쪽에서 에르도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4년에 터키를 방문한 당시 EU 집행위원장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은 급진적인 개혁을 실천한데 감탄하고, 실제로 개혁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에 군부 역시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터키 제1군 사령관이었던 후르시트 톨론(Hurşit Tolon)은 일간지 《라디칼(Radikal)》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혹자는 군부가 키프로스 관련 협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군부가 터키의 EU 가입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도 퍼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입니다(Elbette bir anlaşma zemini bulunacak. Ama ‘askerler istemiyor’ diye bir yalan atılıyor ortaya. Bu düpedüz bir yalan…. Asker AB’yi istemiyor söylemi. Böyle bir söylem külliyen yalandır).” 참모총장 힐미 외즈쾨크(Hilmi Özkök)는 그리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EU 가입을 지지한다며 묘한 말을 남겼다. “70%가 넘는 국민이 EU 가입을 원한다. 누군들 이런 다수 의견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외즈쾨크는 EU 가입을 위해서라면 군부도 입장을 굽힐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 터키군은 EU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Halkın yüzde 70’i AB üyeliğini destekliyor. Kimse bu çoğunluğa karşı çıkamaz…. Biz Avrupa değerlerine uyma riskini almaya ve uzlaşmalara hazırız).” 요컨데 터키 내외부의 변화로 인해 에르도안 집권 직후 터키군에게 남겨진 정치적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아타튀르크의 꿈 가운데 하나가 “터키를 [서구] 문명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아니었는가. (Cizre, 2008: 324-25)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에르도안은 정계 진출 초기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노골적이면서도 과감하게 ‘새로운 터키’(Yeni Türkiye)로 가는 길을 닦기 시작했다. 아타튀르크를 숭배하는 케말주의가 에르도안을 숭배하는 에르도안주의(Erdoganism)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에르도안은 다른 포퓰리스트 권위주의 독재자이다. 에르도안과 그 추종자들은 투표를 통해 법, 관례, 국제적 기준 또는 보편적 가치 등 모든 제약을 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같은 논리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에르도안은 터키 공화국 그 자체이다. 에르도안이 개인적으로 친이슬람 보수성향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에르도안의 전부는 아니다. 2012년 이후 페툴라 귈렌과 그의 운동을 적극 탄압한 것에서 이는 확인된다. 오히려 푸틴과 마찬가지로 에르도안은 이슬람의 상징을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 결과 터키는 자유로운 선거가 존재하지만 리버럴한 가치와 제도는 쇠퇴하는, 자유롭지 않은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했다. 에르도안이 약속한 ‘새로운 터키’는 그가 약속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Akyol, 2016; 귈렌과 에르도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종일, 2017: 162-63 참고)
2016년 7월 15일에 발생한 터키 군부의 쿠데타 시도는 에르도안의 친이슬람 보수주의 성향에 대한 군부, 사법, 교육 엘리트가 주축인 민족주의·세속주의 성향 세력의 반감이 극단적인 분출이었다. 그러나 4차례의 성공한 쿠데타와는 달리 발생 6시간 만에 실패로 막이 내렸다. 그날 22시, 두 대의 F-16 전투기가 아큰즈 공군기지에서 이륙해서 앙카라로 날아갔다. 그때 30명의 군인이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대교를 봉쇄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참모총장 훌루시 아카르(Hulusi Akar)를 비롯한 장성들을 남치하고 요충지로 분대를 보냈다. 그때 의회, 특수전사령부, 터키 국가정보부, 대통령궁는 폭격당하고 있었다. 24시가 되자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터키국영방송 사무실로 들이닥쳐 쿠데타를 선언하며 통금령을 내렸다. 당시 마르마리스에서 휴가 중이었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00시 28분 CNN 터키와 페이스타임을 통해 인터뷰를 가지며, 지지자들에게 군정이 실시한 통금령을 거부하고 거리를 가득채워달라고 호소했다. 그 직후 에르도안은 인근의 달라만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했고, 03시 20분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쿠데타군은 에르도안이 머무르던 호텔을 습격했으나, 에르도안은 떠난 이후였다. 09시, 충성파 군인들은 쿠데타 진압은 거의 완료되었다. 약 1,400명의 군인이 경찰에 구금되었다. 납치당한 장성들도 풀려났다. 터키 정부가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자는 249명이었고, 2,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Taş, 2018: 4-5)
쿠데타는 이전과 달리 6시간만에 실패했을까? 우선 쿠데타 계획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었고, 진행 과정에서 실수도 잦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은 정의발전당 지도부를 생포하지도 못했고, SNS 접속을 봉쇄하는데도 실패했다. 에르도안은 이를 이용해 지지자들을 거리로 불러내어 쿠데타에 저항하게끔 했다. SNS를 통해 지지자를 결집시킨 것은 에르도안 혼자만이 아니었다. 에르도안의 전임자 압둘라 귈도 페이스타임을 이용해 CNN 터키에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전임 총리 아흐트 다부트올루는 휴대전화를 통해 알자지라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쿠데타의 실패를 예견했다. 가레스 젠킨스(Gareth H. Jenkins)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쿠데타는 잘 계획되었다. 단지 그 교본이 1970년대에 멈춰있었을 뿐이다.” 20세기의 쿠데타가 21세기의 기술과 민중에 의해 패배한 순간이었다. (Toksabay, 2016)
정의개발당이 2007년의 총선 이래 계속해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듯, 터키 시민들은 군부의 계도보다는 에르도안의 포퓰리즘 권위주의 독재가 민주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단순히 정의개발당 지지자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2010년의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대표적인 예이다. 공화인민당과 민족주의행동당(Milliyetçi Hareket Partisi, MHP)은 반대운동을 선택했다. 쿠르드계 정치 단체들은 새 헌법 초안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고 권위주의적 측면이 강하다고 선거를 보이콧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리버럴이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국민투표 직전에 이를 지지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즉, “충분하지는 않지만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2010년의 국민투표는 58%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국민투표 9개월 뒤의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50%의 표를 얻으면서 군부 개입 이후 최대 득표율을 갱신했다. 이제 모두가 군부의 계도가 끝이났음을 깨달았다. 에르게네콘(Ergenekon) 사건이나 슬레지해머(Sledgehammer) 작전에 대한 에르도안의 무리한 조처를 터키 시민들이 ‘감내’한 것은 이를 재확인해주었을 뿐이다. 2016년 7월 15일에도 터키인들에게 쿠데타는 과거의 일이었고, 그렇게 남아있어야 했다. (김종일, 2017: 151; Çalışkan, 2017: 10)
상황이 이러니, 징집당하여 쿠데타에 동참‘당한’ 병사들의 상황도 쿠데타 주동자들에게 하등 나을 것이 없었다. 에르도안 등의 인터뷰가 송출된 직후 1명의 장교가 이끄는 부대가 헬리콥터를 통해 CNN 터키 방송국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CNN 터키의 앵커 네브신 멩귀(Nevşin Mengü)는 당시를 “그 젊은 병사들의 눈에서 공포 밖에 읽을 수 없었어요. 헌신이나 투지를 찾을 수 없었죠…. 그들은 우리에게 방송 송출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린 그럴 수 없다고 답했어요. 그들은 어쩔줄 몰라하며 우릴 스튜디오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러는 내내 방송은 계속 송출되고 있었어요. 우리가 다시 올때까지요.”라고 회고했다. (Toksabay, 2016)
또다른 쿠데타 실패 사유는 직업군인들의 경제인화였다. 터키 사회의 시장경제화가 진행되며 장교들마저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통합되었다. 1960년대에 설립된 터키 군인공제회(Ordu Yardımlaşma Kurumu, OYAK: 터키 법에 따른 비공개 법인으로, 회원에게 추가적인 퇴직금을 제공한다)는 터키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가운데 하나이다. 군인공제회는 건설부터 기술까지 전 산업에 투자하는 등, 총 60여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는 터키군 산하 법인이다. 2010년 기준으로 군인공제회는 코츠(Koç) 그룹과 사반즈(Sabancı) 그룹 다음으로 큰 법인이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군대가 보유한 기업체 가운데 이보다 큰 집단은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퇴역 장군들은 군인공제회 외의 여러 기업에 이사로 입사하여 군부와 시장의 연결은 더욱 공고해졌다. 2008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이사회가 존재하는 118개의 기업에는 한 명 이상의 퇴역 장교가 있다. 이처럼 경제계와 군인의 관계가 밀접해지자, 이제 대부분 군인이 군부 쿠데타가 세계적으로 용납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도 전혀 이익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터키군의 ‘서구화’가 진행됨에 따라 군인들에게도 문민 통제의 원칙이 뿌리 깊게 박히고 있었다. (Çalışkan, 2017: 6-7; Meyersson, 2016의 추산에 따르면, 군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향후 10년 간 연간 성장률은 1 ~ 1.3% 가량 하락하는 경향이있다)
에르도안은 715 쿠데타를 이용해 권위주의 통치를 한 층 더 강화했다. 터키의 케말주의자들은 세브르 조약 이후 터키인들은 독립전쟁에 참가한 사심 없는 영웅과 참가하지 않은 반역자로 나누었다. 정의개발당 또한 마찬가지다. 케말주의 터키에서 음모론은 낮선 것이 아니었다. 정의개발당 정권은 이것을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케말주의자들이 터키 독립전쟁기에 볼셰비키나 연합진보회 등의 역할을 깍아내리고 케말을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개발당은 에르도안 지지자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정의개발당은 715 쿠데타에 대한 조사나 토의를 막고, 자신들이 만든 내러티브만을 강요하고 있다. 내러티브는 한번 내재화되면 그 뒤에는 사실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진다. 에르도안에게 있어서 쿠데타의 주동자가 누구든, 귈렌과 미국이 그 배후에 있건 말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7.15 쿠데타의 실패는 에르도안의 ‘새로운 터키’를 위한 건국신화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Taş,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