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골든, 『중앙아시아사: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2021. 『중앙아시아사: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이주엽 옮김. 책과함께. 371쪽. 18,000원.
Golden, Peter B. 2016. Central Aia in Worl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xii+180 Pages. £79 (Hardback) / £18.49 (Paperback)
중앙아시아 연구 분야에서 가장 존경하는 학자 두 분이 각각 책을 적고 한국어로 옮긴 책이다. 당연히 곧장 사서 읽고 정리글을 남길 작정이었는데, 막상 실천에 옮기는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책 자체에 적어야 할 내용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자인 피터 골든 교수님에 대한 소개글은 “한국어판 서문” 8쪽부터 9쪽까지와 “옮긴이의 글” 339쪽부터 341쪽까지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책의 의의와 본문 요약은 각각 “옮긴이의 글” 335쪽부터 337쪽까지, 337쪽부터 339쪽까지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옮긴이 소개는 “한국어판 서문” 9쪽에 짧지만 묵직하게, 필요한 모든 내용이 다 담겨있다. 이에 기반해서 쓰여진 출판사 제공 책소개만 읽어도 내가 해야할 이야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거의 끝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정리글은 파편적 정보를 위주로 적어보기로 했다. 저자이신 피터 골든 교수님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겠다. 피터 골든이란 사람은 어떤 학자일까? 해외의 학자들은, 마치 한국 사람들이 김호동 교수님을 ‘호동칸’이라 부르듯, 피터 골든 교수님을 ‘내륙아시아 연구의 카간’(Khagan of Inner Asian Studies) 또는 ‘유라시아 지향 연구의 카간’(Qagan of Eurasian-Oriental Studies)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마 현존하는 그 어느 학자보다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텐데, 피터 골든의 주요 논저 몇가지만 뽑아보아도 이런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피터 골든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소개되었듯,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의 세계적 대가들만이 필진으로 참여한 『케임브리지 내륙아시아사: 칭기스조 시대』[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의 공동편집자를 맡은 점만 보아도 그렇다. 여기서 피터 골든은 다른 공동편집자들과 함께 쓴 “서문”(Introduction) 외에 1장 “1200년경 내륙아시아”(Inner Asia c. 1200)와 6장 “이주와 종족”(Migrations, ethnogenesis)의 서술도 담당했다. 아마 이 책에서 그가 다룬 범위는, 자료건 지리건 간에, 책에 기여한 다른 어떤 학자보다 넓었을 것이다. 피터 골든의 이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저작으로는 『튀르크 민족사 개론: 중세부터 초기 근대까지 유라시아와 중동의 민족과 국가형성』[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Turkic Peoples: Ethnogenesis and State-Formation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urasia and the Middle East (O. Harrassowitz, 1992)]이 있다. 여기서 골든 교수는 시베리아의 사하나 투바, 야쿠트부터 발칸 반도의 튀르크계 민족들까지 온갖 종류의 집단을 다 다루었는데,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학문적 수준이 부족해 보이는 서술이 없다. (여담이지만 골든 교수님은 academia에 책의 pdf를 제공하며 전면개정판을 준비중이라 적어놓으셨는데, 정말 나온다면 한국에 어떤 방식으로든 소개할 기회를 찾아볼 작정이다)
‘카간’이라는 평가가 아쉽지 않은 골든 교수의 또다른 면모는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뒤에도 끝없이 새로운 연구를 확인하고 자신의 학설을 최신화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은 『중앙아시아사』의 각주와 참고문헌에서 확인이 가능한데, 골든 교수는 2009년까지의 학계의 연구동향을 최대한 반영하고 있다. 앞 문단에서 언급한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시각과 함께 이런 점이 가장 잘 보이는 본문의 부분은 흉노와 훈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본문 73쪽부터 75쪽까지와 313쪽의 각주 23에 해당하는데, 2021년 시점에서도 몇가지 논저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내용의 면에서 학계의 경향을 여전히 정확하게 반영한 서술이다. 또한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라고 적은 자신감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골든 교수는 “기원이 불분명한 흉노”라고 적었다(본문 61쪽). 흉노(정확히는 그 핵심집단)의 기원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설명은 이들이 튀르크어계를 사용한 집단이었다는 것이고, 최근에는 동부 이란어 집단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제기되었으며, 예니세이어족과의 연관성도 지적되지만, 내가 보기에 어느쪽도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 적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골든 교수의 서술은 (모든 문제에서 이지선다의 답을 원하는 호사가 기준에서는 힘이 빠질 수 있지만) 짧지만 학술적으로 가장 엄밀한 답이라 생각한다.
그런 덕분에 책을 읽으며 새로이 알게 되거나 정리하게 된 부분이 많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포스트 몽골 시대 트란스옥시아나 사회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은 투르크화나 페르시아화 중 한 가지 면모에만 주목하지만 골든 교수는 본문 232쪽에서 투르크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공생 관계(Turko-Persian symbiosis)를 정확히 지적했다. 23쪽의 알타이어족 논쟁에 대한 골든 교수의 정리도 어느 한쪽에만 지나치게 천착하지 않은 균형감 있는 서술이라 본다. 탈라스 전투 훨씬 이전인 3세기 초부터 중국의 종이는 수출되었으며 이슬람 발흥 이전 신장과 소그디아에 제지술이 퍼져있었으리라는 서술(130쪽)과 불교 교육 기관을 모델로 한 이슬람 교육 기관 마드라사가 처음 세워진 것이 사만조 시대였다는 서술(147쪽)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소련 시대 중앙아시아의 민족 정체성 형성에 대한 서술(288~90쪽, 294~95쪽)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번역으로 넘어가자. 이주엽 선생님에 대해서는, 골든 교수의 호평이 물론 최고겠지만, 나도 2권의 저서를 읽고 정리한 글을 통해 몇 차례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때도 이주엽 선생님이 포스트 몽골 시대 중앙아시아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최고 반열에 드는 학자라 생각했지만, 이번 번역을 읽으면서 그런 전문성의 범위가 포스트 몽골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다루는 범위가 넓은 책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누가 봐도 만족스럽게 해내셨다. 책에 대한 애정도 느껴졌다. 영어책을 한국어로 옮기면 분량이 1.5배 정도가 되는게 보통인데 이 책은 거의 2배가 되었다. 이는 옮긴이인 이주엽 선생님이 몇가지 추가 설명을 덧붙이고 원서에는 없는 도판을 더한 덕분이다. 또 개개 장 내에서 단락 구분이 없는 원서와 달리 한국어판에서는 소제목과 단락 구분이 더해진 점도 쪽수 증가에 기여했을 것이다. 찾아보기도 원서보다 훨씬 꼼꼼해졌다. 나는 원래 소제목을 추가하는 등 변경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주엽 선생님처럼 저자와 의견교환을 통해 결정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국어판을 영어판의 ‘완전판’이라 표현해도 될까? 난 그러고 싶다.
지금까지 한국에 다양한 중앙유라시아/중앙아시아사 개설서가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 내가 항상 추천하던 것은 고마츠 히사오(小松久男) 편, 이평래 옮김, 『중앙유라시아의 역사』(소나무, 2005)와 마노 에이지(間野英二)·호리카와 토오루(堀川徹)편, 현승수 옮김,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책과함께, 2009)였다. 앞의 책은 광의의 중앙아시아를, 뒤의 책은 협의의 중앙아시아를 알기에 좋았다. 이제는 여기에 골든 교수님의 『중앙아시아사』가 더해져야 할 것 같다. 특히 포지션이 겹치는 『중앙유라시아의 역사』에 비해 분량도 적고 영어를 비롯한 서구권 연구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분량이 많아 세세한 부분도 꼼꼼히 살필 수 있고, 일본의 연구 경향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된다) 어쨋든 오래 두고 몇번이고 찾아볼 수 있는 책을 책장에 한권 더 더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
* 옮긴이이신 이주엽 선생님께서 직접 책을 선물해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1월 26일 수령하여 29일까지 일독했다. 2월 21일 기록했다.
이주엽, Qazaqlïq, or Ambitious Brigandage, and the Formation of the Qazaqs
이주엽, 《몽골제국의 후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