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레인, “거란: 몽골제국의 초석” (한글 자막)
중앙아시아의 교류와 분쟁: 고대에서 현대까지 (계명대학교 실크로드·중앙아시아 국제 컨퍼런스)
조지 레인, “거란: 몽골제국의 초석”
“거란은 11세기와 12세기에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을 떨친 튀르크·몽골계 집단으로, 전성기에는 북중국 대부분과 북방과 서방의 방대한 초원 지대를 지배했습니다. 이들은 이웃한 중국인들의 영향으로 차츰 유목습성을 버리고 정주생활에 적응해 갔습니다. 12세기 초 여진의 발흥과 이에 따른 거란의 몰락과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거란을 새로 출연할 칭기스조 제국(Chinggisid Empire)에서 동화와 통합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할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유목습성과 정주식 행정에 익숙했던 거란은 공성전과 최신 군사 기술에 대한 실용적 지식도 갖추고 있었기에 칭기스 칸은 북중국의 여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거란을 곧장 받아들여 군대와 행정 분야에 배치했습니다. 나중에 칭기스조 군대가 이슬람 세계로 서진하여 무슬림 투르키스탄의 일부가 된 또다른 거란[일명 카라키타이]을 마주했을때, 이들은 칭기스조가 손에 넣은 지역과 도시를 통제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직접 수행하며 다시 한번 칭기스 칸의 군대와 빠르게 확장하는 행정기구에 가치를 매기기 힘든 문화와 상업, 군사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거란은 칭기스조 제국의 다종족, 다문화 속으로 녹아져갔고, 키르만의 도시국가를 다스릴 왕조 거란 쿠틀루그칸조가 몰락하고 중세 이란의 일칸국에 합병되면서 역사상에서는 소멸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의 흔적은 동방과 서방, 중앙아시아에서 이들이 동화되고, 또 동화시킨 많은 종족들의 가슴과 상상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인상깊게 들은 부분들
“보통 칭기시드와 관련된 오해는 이들이 문명사회와 거리가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진보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가진 정주세계 규범과 동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몽골군이 농경사회를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무력과 야만성으로 승리를 얻었다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실 칭기스 칸의 승리는 영리한 외교술과 전략, 상호이익 동맹 덕분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이 중국을 주목했을 때 요나라에서 적극적인 동맹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마침내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고 여진의 지배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요나라 거란족은 지식과 기술을 동맹 투르크·몽골족에게 전수했고, 포위전과 농경 및 도시 공동체 행정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거란족은 칭기시드 군과 초기 관료제에서 큰 벼슬을 얻었습니다.”(14:29~15:39)
→ “바그다드의 몰락”이나 “몽원 제국과 북중국의 몰락”을 적는데 영향을 준 시각이다. 조지 레인 교수의 문제작 Early Mongol Rule in Thirteenth-Century Iran: A Persian Renaissance (Routledge, 2003)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고 있었는데, 이제는 때가 온 것 같다....
“칭시스 칸은 꿈을 가진 자로 1206년 유라시아 대초원을 투르크·몽골 부족을 통합한 후 대초원지대를 떠나 농경사회로 들어갑니다. 그는 정복을 위해 적응하고, 굶주린 동족뿐 아니라 세계 제패 조력자들을 품고 포상해야 했습니다. 칭기시드라는 말이 ‘몽골족’보다 우선해야 하는 이유는 몽골족이 칭기스칸 혁명 추종자 대열에서 소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은 민족이지만 훗날 세계에서 문화와 정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칭기시드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15:56~16:58)
→ 조지 레인 교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 세계제국』(신서원, 1999), 42쪽, 371 ~ 73쪽의 설명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라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ghol Ulus), 즉 ‘대몽골국’이라 지어졌다. 이 새로운 국가에 참가한 모든 구성원들은 출신·언어·용모에 상관없이 모두 ‘몽골’로 취급되었다. 이 때 ‘몽골’이라는 것은 아직 ‘민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아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민족집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대몽골국은 다종족이 혼합된 혼성집단이며, 몇 개의 일족 울루스를 내포하고 있는 다중구조의 연합체로 출발한 것이었다.”
“대원 울루스의 몽골 가운데 중국을 잃고 북쪽 고원으로 돌아간 것은 전체의 절반정도였다. 그것도 그들은 여러가지의 면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순수한 몽골인만이 아니라 원래는 서북 유라시아 출신의 킵착·아스·캉글리 등의 여러 부족 군단도 ‘몽골’로서 북상했다. (중략) ‘오로스’라 불리는 루시로부터의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러시아인이다. 또, 꽤 많은 한족이 북쪽으로 동행했던 점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관료나 궁정사용인으로서 자진해서 대원 울루스의 정부·궁정과 동행한 것이다.
물론, 이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북쪽으로 옮기고 나서 서로서로 섞였다. 그래서 대원 울루스 시대에도 고원에는 여전히 변함없는 전통의 몽골천호군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혈통의 구분’을 강조하는 것은 원래 터무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북쪽에 있던 몽골들을 주축으로 대원 울루스정권과 함께 북행한 각종의 사람들이 섞여, 새로운 ‘몽골’로 탄생해 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몽골시대 ‘장성(長城)’은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에 재건된 작은 규모의 ‘대원 울루스’의 공세에 겁먹은 명왕조는 15세기, 고원과 중화 사이에 억지로 터무니없이 장대하고 견고한 인공 경계선을 쌓아 방벽으로 삼았다. (중략) 이 결과 고원은 문자 그대로 몽골고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이후, 작은 규모로 정리된 ‘대원 울루스’ 사람들은 ‘민족’으로서의 몽골이 되는 기회를 얻었다. ‘민족’을 초월한 그 무엇이 있었던 몽골은 이 때부터 ‘민족’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폴 라츠네프스키, 『칭기스칸』, 김호동 옮김, 지식산업사, 1992, p. 246-48, n. 235에 소개된 이 일화도 이런 스기야마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 “거란의 수령이던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죽었을때 그의 미망인(후처[後妻])이 칭기스 칸을 찾아가 칭기스칸을 시위(侍衛)해오던 전처(前妻) 소생의 설도(薛闍)로 하여금 아버지의 자리를 잇게 하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대신 시위의 일을 맡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칭기스 칸은 “설도는 이미 몽골인이 되었다. 그는 짐을 따라 서역에 원정하였다”라고 하면서 후처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직책을 잇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