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초기 몽골 제국의 정복에 대해서는 ‘초원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많다. 특히 북중국의 쇠퇴에 대한 서술은 더더욱 그렇다. 요수[姚燧]의 《목암집》[牧庵集]에 따르면, “금의 정우 연간(1213년 ~ 1216년)부터 하삭[河朔] 지방은 20년 동안 교전 상태가 지속되었고, 주민 10 중 7은 도망자였다.” (愛宕松南 , 2013: 86에서 재인용) 이런 상은 몽골이 북중국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평원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야율초재 열전에 따르면,
칭기스 칸[太祖]의 치세 중에는 서역 정벌에 몰두해서 중원을 다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한지[漢地]의 관리는 거의 모두 민으로부터 취렴하여 사복을 채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재산은 엄청난 숫자를 헤아렸으나 관에 저장된 것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태종의 측근인 베데이[別迭]가 건의하기를, “한인들은 전혀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므로 차라리 그들을 쫓아내고 그 토지를 목초지로 삼는 것이 타당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야율초재가 말하기를, “폐하는 실로 남하해서 금국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남벌에 필요한 군수를 부족 없이 공급할 수 있는 재원이 필요합니다. 중원의 지세 · 상세를 비롯한 소금 · 술 · 철야 · 산택의 이익을 균등히 정하기만 하면, 연간 은 50만 량, 비단 8만 필, 곡물 40여만 석을 확실하게 징수할 수 있으므로, 부족할 염려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한인에게서 징수해야 하므로 한인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태종은 초재의 말이 더 옳다고 여겨서 그에게 세법의 제정을 명했다.
(〈耶律楚材傳〉, 《元史》. 愛宕松南 , 2013: 76 그리고 이은정, 1990: 98에서 재인용)
실제로 몽골 정복 이후 북중국이 비참한 상황에 처했음은 분명하다. 몽골의 침략에 따른 혼란, 유민의 증가, 인구의 급격한 감소, 전무의 황폐 등 악순환이 반복되며 하북은 크게 쇠퇴했다. 태화[泰和] 7년(1207년)의 통계에서 섬서와 하남을 합쳐 하북 인구가 768만여 호를 헤아렸으나, 고작 26년 뒤인 계사년적에는 하남 이주자를 포함하여도 겨우 180만여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인구의 누락과 행정의 혼란으로 충분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도, 북중국의 인구가 감소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愛宕松南 , 2013: 86)
문제는 북중국의 쇠퇴를 ‘초원의 폭력성’과 묶어서 생각할 때 발생한다. 리처드 폰 글란은 앞서 인용한 야율초재 열전의 계획으로 인해 북중국의 농업 경제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북중국은 극심한 인구 손실의 고통을 겪었으며, 그 결과 금나라의 북중국 인구에 비해 명초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줄었다는 것이다. (von Glahn, 2019: 495)
문명파괴자 몽골?
정말로 야율초재의 가르침을 받기 전까지 몽골인들이 농경지대에 파괴적인 정책만을 취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몽골인들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정주지대를 정복하면 그 기반시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화레즘 원정을 마무리한 직후에 북중국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고, 야율아해[耶律阿海]로 하여금 이를 통치하게 했다. (Biran, 2012: 98-99) 이 시기 칭기스의 초청으로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장춘진인 구처기와 그 일행들 역시 몽골인들이 사마르칸드와 그 인근 농지의 복구를 위해 가깝고 먼 지역의 주민들 다수를 동원한 모습에 감탄한 기록을 남겼다. (Li Chih-Ch’ang, 1931: 92-93)
고고학적 연구도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화레즘 전역에서 몽골이 행한 학살과 문명 파괴에 대한 당대 이슬람 사가들의 서술과는 반대로, 이 시기를 전후한 문화적 단절은 발굴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주화 유물로 추측해볼때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본래부터 불안하던 이 지역의 화폐 경제가 일시적으로 붕괴했으나, 뭉케 카안의 화폐 개혁 단행으로 이는 해결되었다. (Waugh, 2017: 11-16)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앞서 인용한 야율초재의 발언을 단순히 유목 위주의 파괴적 발상을 꺽고 정주적 수취체계를 만들어냈다고 해석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오히려 이는 정주지역의 안정적 지배를 통한 이익을 증명하여 현지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그 수단이 새로운 세법이었던 것이다. 베데이의 건의는 유목 위주의 사고방식으로 기울어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한지 통치의 불철저함에 대한 불만에 기인했었다. 야율초재는 베데이의 방책에는 전적으로 반대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 깔린 한지지배의 정상화 요구는 인정하고 있었다. 즉, 야율초재의 세제개혁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가 아니라, 몽골 지배층의 요구에 협조한 것이었다. (이은정, 1990: 98-99)
북중국에서도 중앙아시아에서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몽골인들은 한인세후들을 활용하여 북중국의 호구를 증가시키고 농지를 개발하였다. 하남성의 기주[淇州]는 세후 주씨[周氏]의 안무를 통해 ‘5년도 되지 않아서 생활 여건이 잘 갖춰진 마을’로 되었고, 산서성의 대동현은 협곡씨[夾谷氏]의 노력에 의해 ‘즐거움이 가득찬 곳’으로 변했다. 1천여 호수에 불과한 하북성의 자주[磁州]도 역시 고씨[高氏]의 선정으로 이웃한 지역에서 옮겨오는 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愛宕松南 , 2013: 86-87)
한인세후를 중심으로 한 전후 재건책이 북중국의 전반적인 하강 추세에 어느 정도 상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정황 증거를 감안하면 몽골 정복 이후로도 북중국은 남송을 정복할 정도의 역량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빌라이는 남송 원정에서 화북 지역의 한인군벌 군단을 주력으로 삼았다. 남송은 장강을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과 호수가 곳곳에 널려 있었고, 공성전이 중심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쿠빌라이는 개봉을 병참기지로 보급망을 조성하고, 한인군단을 주력으로 남송 공격에 나섰고, 보기 좋게 성공했다. (杉山正明, 1999: 244-61)
원말의 혼란과 북중국의 몰락
그럼에도 원말명초 북중국의 비참한 상황은 부정할 수 없다. 북중국의 극심한 인구 손실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금나라가 통치할 당시 북중국의 인구는 4500만 명을 상회했고, 남송의 인구까지 합치면 중국 전체의 인구는 1억 명을 넘겼다. 그런데 1290년 원에서 처음 실시한 인구 조사의 결과는 고작 58,834,711명에 불과했다. 1330년 인구 조사로 조정된 수치 역시 59,746,433명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명초인 1393년의 인구 조사 결과는 60,545,812명이었다. (Rossabi, 2008: 195-96; Brook, 2014: 91-93; von Glahn, 2019: 495)
무엇이 인구를 이렇게 급격히 줄게 했을까? 일차적인 원인은 인구의 누락과 인구조사원의 부정부패가 있을 수 있다. 1290년에 인구 조사를 담당한 관리들은 “황야에 살고 있는 이주자들까지 조사하지 못했다”라고 시인하며, 실제 인구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몽골 영주에게 분봉된 지역의 농노 수도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원대 중국의 인구를 7,000만에서 9,000만 사이로 추정했다. (Brook, 2014: 91-92)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기후변화였다. 1270년 무렵부터 지구는 과거 250여년 간(소온난기 또는 중세 온난기)보다 차가워졌다. 몽원 제국기 기록들을 검토하면, 1316년을 제외하고는 평년보다 따뜻했던 해가 한 해도 없었다. 그런 한편, 이 시기 기후의 또 다른 특징은 건조함이었다. 13세기의 마지막 40년은 계속 건조했다. 14세기 초 날씨는 다시 습해졌지만, 이후로는 극도의 습함과 건조함 사이에서 요동쳤다. 1352년이 되면 다시 가뭄 국면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1374년까지 지속되었다. (Brook, 2014: 112-24; 하름 데 블레이는 이와 같은 기후 변화가 몽골의 확장을 용이하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보았다. de Blij, 2012: 130)
이렇게 가뭄 국면이 이어지자, 홍수도 빈번해졌다. 일상적인 강우라도 긴 가뭄 끝에 내리게 되면 폭우가 올 때처럼 홍수를 일으킬 수 있다. 로버트 하트웰(Robert Hartwell)은 북중국의 인구 감소가 몽골 정복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그 원인이 홍수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12세기부터 황하는 극심한 변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 변동은 항상 홍수를 수반했다. 1166년, 1177년, 1179년, 1180년, 1194년, 1224년에 잇따라 홍수가 발생했다가, 한동안 잠잠해졌다. 그러나 1286년에 홍수는 다시 시작되었고, 1288년, 1290년, 1296년, 1297년 그리고 1298년에 각각 반복되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1296년의 홍수였는데, 양자강 상류에서 시작된 범람은 가을에는 황하로, 그 이듬해에는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301년 이후로는 거의 매년 홍수가 발생했다. 특히 1319년부터 1332년 사이에 발생한 홍수는 더 심각했다. 이는 1346년에야 수그러들었다. (Hartwell, 1967: 151-53; Brook, 2014: 124-25)
이와 같은 기후 변화 외에도 천재지변은 끊이지 않았다. 메뚜기 떼는 대체로 장기화된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릴 때 더욱 들끓었다. 몽 · 원 제국기에는 거의 매년 메뚜기떼가 출몰했다. 1303년 9월 13일에는 분하 유역에서 지진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고평현[高平縣] 가옥 대부분이 무너졌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4일 뒤에는 조성[趙城]에서 더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 여파로 멀리 떨어진 황하 유역의 건물까지 무너졌다.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건물이 무너졌다. 여진이 2년 동안 이어진데다, 가뭄도 닥쳤다. 이와 같은 지진은 몽골인들이 중국에서 쫓겨날때까지 계속되었고, 1338년부터 1352년까지 특히 심각했다. 전염병도 문제였다. 특히 1344년 ~ 1345년, 1356년 ~ 1360년 그리고 1362년까지 세 차례가 심각했다. 날씨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자연재해가 잇따르자 기근도 거의 2년 주기로 반복되었다. (Brook, 2014: 126-43; 14세기 중반 중국의 파국적 인구 감소가 흑사병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Sussman, 2011에 따르면 중국에서 당시 선페스트 전염병이 돌았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몽 · 원 제국의 부실한 행정력이 잇따른 재해의 피해를 더 증폭시켰던 것은 아닐까? 단적으로 강물의 범람은 그해의 강수량 뿐만 아니라 국가가 제방 보수와 준설 작업 등 인프라에 얼마나 투자했는지에도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크지 않아보인다. 우선 하급 행정 구역에 대해서, 몽골인들은 이전 왕조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그보다 위의 지방 행정은 행성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행성 체제는 비록 그 규모가 이전 중국의 단위보다 크고, 몽골의 분봉 체계와 결합된 탓에 비효율적인 면이 있기는 했으나, 하나의 행성이 여러 지역을 조정하는 힘을 가졌던 덕분에 하나의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홍수 등 재해의 처리에서는 더 나았다. 몽 · 원 제국을 계승한 명나라는 지방의 독립적인 세력 성장을 방지하기 위해 행성 체제를 쪼개어 삼사가 다스리는 단위로 만들었지만, 이와 같은 단점을 깨닫고 순무[巡撫]와 총독[總督]을 선임하였다. (Brook, 2014: 87-88)
그러나 몽골 지배층의 노력과 별개로, 자연재해가 잇따르자 백성들은 몽골이 천명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1351년, 황하의 치수공사에 피폐한 민중을 징용하자 무장종교집단 백련교[白蓮敎]가 하남 · 강북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붉은 천을 이마에 둘렀기 때문에 홍건[紅巾]이라 통칭된 여러 반란 집단은 몽원 제국의 진압군에 의해 각개 격파 당했으나, 하남 · 산동 · 화북은 이미 완전히 황폐화된 상태였다. 즉, 전쟁과 기근, 그리고 여기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전염병이 원말 북중국의 인구 감소를 야기한 직접적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杉山正明, 1999: 358; von Glahn, 2019: 506; Brook, 2014: 219-20)
마치며
13세기와 14세기에 북중국이 비참한 상황에 있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를 몽골의 파괴적인 정복과 통치로 인해서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몽골인들 역시 정주지역의 통치에 대해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나름의 방법으로 부흥을 촉진하고자 했다. 몽원 제국기 북중국이 쇠퇴하는 와중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농지와 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이 존재했었다. 다만 하트웰이 지적했듯, 그곳에는 “몽골 군인보다 더 효율적인 학살자들, 즉 기근, 역병 그리고 홍수가 있었다.” (Hartwell, 1967: 152)
참고 문헌
이은정 (1990). “耶律楚材(1190-1244)의 政治的 位相: 蒙古帝國時代 漢地人 官僚의 役割과 限界.” 《서울대 동양사학과논집》 제14집: 82-106.
杉山正明(스기야마 마사아키) (1999).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 · 김장구 · 양영우 옮김. 신서원.
愛宕松南(오타기 마쓰오) (2013). 《중국의 역사: 대원제국》. 윤은숙 · 임대희 옮김. 혜안.
Brook, Timothy (2014). 《하버드 중국사 원 · 명: 곤경에 빠진 제국》. 조영헌 옮김. 너머북스.
von Glahn, Richard (2019).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류형식 옮김. 소와당.
Rossabi, Morris (2008). 《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 강창훈 옮김. 천지인.
Biran, Michal (2012), “Kitan Migrations in Eurasia (10th-14th Centuries),” Journal of Central Eurasian Studies, vol. 3: 85-108.
de Blij, Harm (2012). Why Geography Matters, More Than Ever. Oxford University Press.
Hartwell, Robert (1967). “A cycle of economic change in Imperial China: Coal and Iron in Northeast China, 750-1350.” Journal of th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Vol. 10: 102-59.
Li Chin-ch'ang (1931). The Travels of an Alchemist: The Journey of the Taoist Ch'ang-Ch'un from China to the Hindukush at the Summons of Chingiz Khan. Arthur Waley (tr.). Routledge.
Sussman, George D. (2011). "Was the black death in India and China?"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Vol. 85, No. 3: 319-55.
Waugh, Daniel C. (2017). “The ‘owl of misfortune’ or the ‘phoenix of prosperity’? Re-thinking the impact of the Mongols.” Journal of Eurasian Studies, Volume 8, Issue 1: 10–21.
그림. 조맹부, “서쪽 정원에서의 글짓기 모임[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 북송 영종[英宗]의 부마, 왕선[王詵]이 수도 개봉[開封]에 있던 자기 집 서쪽의 정원[西園]에서 당시의 유명한 문인들을 초청하여 베풀었던 글짓기 모임[雅會]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남송대 이후 많이 다루어진 주제이다. 본문의 그림은 조맹부의 작품이라 일컫어지나 명대 익명의 작가의 모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출처: 위키커먼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의 황제가 된 거란인들 Ⅰ 일투트미쉬 (1) | 2019.08.02 |
---|---|
알리 케말, 보리스 존슨의 터키인 증조부 (0) | 2019.07.25 |
바그다드의 몰락 : 完. 마치며 (0) | 2019.07.23 |
바그다드의 몰락 : Ⅳ. 교역로의 변화 (0) | 2019.07.23 |
바그다드의 몰락 : Ⅲ. 농업의 쇠퇴 (0) | 2019.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