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틀룩칸국Qutlughkhāniya/Ḳutlugh-Khānids 또는 케르만의 거란 왕국Qarā Khiṭāy of Kerman은 1222년부터 1306년까지 키르만 지역을 통치했고, 그 왕족은 야율 씨의 일원이었다. 쿠틀룩칸국은 호라즘샤 왕국, 몽골 제국의 대칸 나중에는 일칸국의 봉신이었다. 인근의 야즈드 아타베그 왕국이나 파르스의 살구르조, 무자파르조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때로는 칼리프나 인도와도 관계를 맺었다. 쿠틀룩 칸이라는 이름은 이 왕국의 태조, 바라크가 화레즘샤와 압바스 칼리프에게서 각각 쿠틀룩 칸, 쿠틀룩 술탄으로 임명되었던데서 기원했다. (Minorsky, 1986: 553)
역사
쿠틀룩 칸 바라크 하집의 치세
왕국의 태조는 나스르 알둔야 왈딘 아불파와리스 쿠틀룩 술탄 바라크 하집 이븐 쿨두즈Naṣr al-Dunyā wa-l-Dīn Abū l-Fawāris Qutlugh Sulṭān Barāq Ḥājib b. Quldūz로, 카라키타이 왕족이다. 13세기 초, 바라크는 화레즘에 조공을 받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후 바락은 화레즘 샤 무함마드 이븐 테키쉬Muḥammad b. Tekish의 아래에서 일하게 된다. 사신으로 파견된 이후 일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210년 화레즘 샤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카라 키타이 제국에게서 빼앗는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있어 보인다. 여하튼 바라크의 재능에 감명받은 무함마드는 바라크를 하집Ḥājib(시종장)으로 임명했는데, 카라 키타이 제국에서도 이미 이 직책을 수행중이었을 수도 있다. (Biran, 2017)
바라크가 키르만에 정착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가지 기록이 엇갈린다. 일설에 따르면, 바라크는 무함마드의 아들 기야스 알딘 피르샤Ghiyāth al-Dīn Pirshāh의 파당이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뒤 기야스 알딘은 이라크 아잠(지금의 이란 서부)의 통치자로 자립하는데, 이때 바라크를 이스파한과 키르만 지역의 태수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 바라크가 기야스 알딘의 재상과 갈등을 빚은 끝에, 친척인 델리 술탄국의 통치자 일투트미쉬Iltutmish(재위 1211년 ~ 1236년; 무함마드 이븐 테키쉬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정복한 후 키타이 포로들을 맘루크로 각지에 팔아넘겼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이에 대해서는 Biran, 2012: 92-93 참고)에게로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바라크가 키르만 지역을 지나갈때, 키르만의 통치자가 바라크를 공격하였다. 바라크는 그를 물리치고 키르만을 정복한 뒤, 델리로 가는 계획을 버리고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어찌되든, 바라크는 1222년 경에 키르만에 정착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였다.(Biran, 2012: 93) 무함마드 이븐 테키쉬의 후계자 잘랄 알딘 망부르니Jalāl al-Dīn Mangburnī는 바라크의 딸과 결혼하는 대가로 1223/4년에 바라크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쿠틀룩 칸Qutlugh Khān(‘행복한 칸’)으로 임명해주었다 (de Nicola, 2017: 105). 2년 뒤, 잘랄 알딘 망부르니는 키르만을 공격하여 바라크를 몰아내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때 바라크는 압바스 칼리프와 접촉하여, 쿠틀룩 술탄Qutlugh Sulṭān이라는 칭호를 얻어냈다. 1228년에는 잘랄 알딘과 갈등을 빚은 기야스 알딘이 키르만으로 망명하였다. 바라크는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그를 받아들였으나, 결국에는 두 사람을 모두 처형했다. (Biran, 2017)
1232년, 몽골 군대가 시스탄 지역에 진입하자, 바라크는 몽골 궁정에 아들을 파견하며 신종의 뜻을 밝혔다. 우구데이 카안은 바라크의 투항을 받아들이며, 쿠틀룩 칸이라는 칭호를 그 집안에 하사했다. 바라크는 이후 차가타이에게 딸을 시집보내거나, 지방의 무슬림 명사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지위를 탄탄히 다졌다. 1235년 9월 5일, 바라크 하집은 죽음을 맞이했다. (Biran, 2017; de Nicola, 2017: 105)
쿠틉 알딘과 루큰 알딘의 치세
바라크는 동생 하미툰 타얀구 이븐 쿨두즈Khamītūn Tāyangū b. Quldūz(하미트부르Khamītbūr 또는 한티무르Khāntimur, 타니쿠Tānīkū라고도 하는데, 1210년에 화레즘에 포로가 된 카라 키타이의 지휘관과 동일인으로 보인다)의 아들, 쿠틉 알딘 아불 파스 무함마드Ḳuṭb al-Dīn Abū l-Fatḥ Muḥammad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Minorsky, : 553) 그러나 1년 뒤, 우구데이 카안이 키르만의 통치자로 바라크와 우카 하툰Ukā-Khātūn의 아들 루큰 알딘 무바라크Rukn al-Dīn Mubārak를 후계자로 지명했기에, 쿠틉 알딘은 가족들과 함께 우구데이의 궁정을 향해 떠나야만 했다. (Quade-Reutter, 2015)
루큰 알딘 무바라크의 키르만 통치는 원활하지 못했다. 그는 16년 동안 통치했지만 페르시아 신민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그 결과 1252년, 루큰 알딘 무바라크는 다시 사촌인 쿠틉 알딘 무함마드로 대체되었다. 당시 쿠틉 알딘은 마흐무드 얄라바치Maḥmūd Yalawač의 아래에서 관료로 일하고 있었다. 뭉케 카안은 쿠틉 알딘에게 키르만을 맡기며, 루큰 알딘에게는 사형을 선고한다는 내용의 야를릭을 작성했다. 루큰 알딘의 죄목은 칼리프와의 내통이었다. 쿠틉 알딘은 이후 발루치인들의 반란과 잘랄 알딘 망부르니의 반란을 혹독하게 진압했다. 1257년 9월, 약 5년 동안의 재위 끝에 쿠틉 알딘은 죽음을 맞이한다. (Minorsky, 1986: 553)
테르켄 하툰의 치세: 키르만 카라키타이 왕국의 황금 시대
쿠틉 알딘이 죽은 뒤, 키르만의 명사들과 몽골인들은 쿠틉 알딘의 아내, 이스마트 알둔야 왈딘 쿠틀룩 테르켄 하툰ʿIṣmat al-Dunyā wa-l-Dīn Qutlugh Terken Khātun을 거란 왕국의 통치자로 선출했다. 테르켄은 1208년에서 1213년 사이의 기간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어떤 사료에서는 타르칸 하툰이 어린 시절 노예가 되어, 이스파한의 늙은 상인에게 팔려갔다고 전한다. 이 상인은 테르켄을 딸과 같이 키우며 고등교육을 받을수 있게 했다. 또 다른 기록은 타르칸 하툰이 기야스 알딘 피르샤의 첩이었다고 전한다. 기야스 알딘은 그녀를 바라크 하집에게 주었고, 바라크가 죽은 뒤에는 조카이자 후계자인 쿠틉 알딘 무함마드의 아내가 되었다. (Quade-Reutter, 2015)
그러나 모든 기록이 동의하는 바는, 타르칸이 통치에 수완을 보였다는 것이다. 쿠틉 알딘이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내는 동안, 타르칸은 지혜, 양식으로 공정한 판단을 내렸고, 트란스옥시아나의 귀족들은 쿠틉 알딘에게 질투를 보냈다. (Quade-Reutter, 2015) 또, 쿠틉 알딘이 키르만으로 돌아온 뒤에 5년 동안의 통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타르칸의 공이 컸다고 평가받는다. (Minorsky, 1986: 553)
테르켄은 즉위 직후 국정을 장악하는 한편, 각지의 명사들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며 즉위를 인정받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훌레구는 타르칸 하툰의 맏딸인 비비 테르켄Bibi Terken의 남편 아두드 알딘ʿAḍud al-Dīn이 군사 분야를 담당하고, 타르칸 하툰은 내정만을 전담하게끔 조처했다. 이와 같은 권력의 이원화는 키르만의 혼란을 야기했다. 결국 타르칸은 훌레구의 오르두에 직접 출두, 훌레구와의 담판을 통해 키르만 왕국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냈다. (Quade-Reutter, 2015; de Nicola, 2017: 105-06)
이를 통해 테르켄 하툰은 이란의 일칸과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쿠틉 알딘이 이미 약조한, 아르군 아카의 딸 베키 하툰Beki Khātun과 의붓 아들 히자즈 술탄Ḥijjāj Sulṭān을 결혼시켰다. 베키 하툰은 1264년 키르만으로 왔다. 몇 년 뒤, 테르켄은 딸 파드샤 하툰Pād[i]shāh Khātun을 일칸, 아바카과 결혼시켰다. 이후로도 테르켄은 히자즈 술탄이 이끄는 군대를 아바카의 차가타이 울루스 원정에 참전시키는 등(1271년 ~ 1272년), 일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de Nicola, 2017: 106)
그러나, 히자즈의 성공은 동시에 테르켄 하툰에게 위협으로 작용했다. 이제 청년이 된 히자즈는 군사적 성공에 도취되어 테르켄의 지위에 도전하여 왕위를 얻어내고자 했다. 어느 연회에서 히자즈는 아래와 같은 시를 암송하며 야심을 드러냈다.
پیرند چرخ و اختر و بخت تونوجوان
ان به که پیر نوبت خود با جوان دهد
Pir-and čarḵ o aḵtar o baḵt-e to now-javān
Ān beh ke pir nawbat-e ḵod bā javān dahad
젊음은 그대의 운명이자 별이었는데 늙음만이 남았구나
늙은이는 젊은이에게 길을 비켜라
이 같은 모욕에 테르켄은 격분했으나, 대처는 신중했다. 그녀는 우선 사위인 일칸의 오르두로 향했다 (1277년 7월). 약 1년 동안 테르켄은 딸을 통해 사위에게 자신의 권력을 돌려줄 것을 청원했다. 결국 아바카는 그녀를 케르만의 통치자로 임명한다는 야를릭을 발행했다. 그럼에도 히자즈 술탄과 테르켄 사이의 경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1280년, 히자즈 술탄이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델리로 망명하게 되며 끝이 났다. 히자즈 술탄은 10년 뒤 델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Quade-Reutter, 2015; de Nicola, 2017: 107)
테르켄 하툰은 다시 케르만 카라키타이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으나, 이번에는 전처럼 오랫동안 권좌를 지키지 못했다. 1280년 9월 19일, 또 다른 의붓아들 아불무자파르 잘랄 알딘 소유르가트므쉬Abuʾl-Muẓaffar Jalāl al-Dīn Soyurghatmïsh가 일칸의 궁정에서 케르만으로 돌아왔다. 그해 10월 19일 금요일, 소유르가트므쉬가 관직에 임명되면서 테르켄의 이름과 함께 후트바에서 울려퍼졌다. 테르켄 하툰은 즉시 딸, 파드샤 하툰에게 편지를 보내, 소유르가트미쉬의 지위를 박탈하고, 국정에 관여할 수 없게끔 하는 야를릭을 발행해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1282년, 아바카가 죽고 아흐마드 테구데르가 즉위했기 때문이다. 테구데르의 어머니 쿠투이 하툰Qūtūī Khātūn은 테르켄을 좋게 보지 않았고, 그 영향을 받은 테구데르는 케르만이 소유르가트므쉬의 통치임을 확인했다. 테르켄은 포기하지 않고 일칸의 궁정으로 향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1283년 여름, 타브리즈에서 테르켄은 죽음을 맞이했고, 타브리즈에 그대로 머물고 있던 그녀의 딸, 파드샤 하툰이 그 유해를 케르만으로 옮긴 뒤 카라 키타이 왕가의 무덤, 쿠바 사브즈Qobba Sabz에 매장했다. (Quade-Reutter, 2015)
테르켄 하툰의 왕성한 권력욕과 별개로, 그녀의 통치는 모든 역사가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판단은 공정했고, 신민의 어려움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1263년과 1264년에 기근이 발생하자, 테르켄은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큰 호평을 받았다. 1274과 1275년에, 왕령khāṣṣa의 수석 행정관 자히르 알물크 샤라프 알딘 하산Ẓahir al-Mulk Sharaf al-Din Ḥasan이 세율을 올리는 등 정책으로 정권의 인기가 떨어질때도 그녀의 명망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네쿠다르의 침공으로 일칸국 전체의 물가가 폭등했을때, 케르만 지역은 다른 지역들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군사력 부분에서도, 1276년 3월에는 사비로 군대를 편성해 국경 수비대를 조직하거나, 1279년에는 각지에 성채를 세우는 등,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테르켄 하툰은 건축 프로젝트에도 열심이었다. 마드라사, 병원, 모스크를 포함한 5개의 거대 개발 프로젝트가 그녀의 후원으로 형성된 아크프를 통해 이루어졌다. 카나트의 개축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테르켄 하툰의 긴 치세(카라 키타이 왕국의 군주 중 가장 길었다)는 명백하게 카라 키타이 왕국의 전성기였다. (Quade-Reutter, 2015)
파드샤 하툰과 소유르가트므쉬의 치세
아바카의 죽음 이후 일칸국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소유르가트므쉬는 이를 이용해 테르켄 하툰을 몰아내고 케르만의 쿠틀룩 칸이 되었으나, 그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1284년, 새로이 일칸에 즉위한 아르군은 아흐마드 테구데르를 지지한 죄를 묻기 위해 궁정으로 소유르가트므쉬를 소환했다. 아르군의 궁정에 도착한 소유르가트므쉬의 앞에는 테르켄의 두 딸, 파드샤 하툰과 비비 테르켄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비 테르켄은 아들 누스라트 알딘 율뤽샤Nuṣrat al-Dīn Yülük-Shāh와 함께 소유르가트므쉬에 대한 악담을 일칸에게 쏟아냈다. 이에 아르군은 소유르가트므쉬와 파드샤 하툰이 함께 케르만을 통치하게끔 했다. (de Nicola, 2017: 108)
파드샤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소유르가트므쉬는 부카 칭상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그녀는 동생 비비 테르켄을 충동해 부카 칭상을 비난하게끔 했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부카 칭상은 그녀를 게이하투와 결혼시키게끔 아르군에게 조언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286년, 케이하투가 룸(소아시아)의 태수로 임명되었을때는, 그곳에 함께 가게되어 일칸국의 궁정에서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소유르가트므쉬는 훌레구의 손녀, 쿠르두진Kürdüjin과 결혼하여 지위를 공고히했다. 아르군은 이전의 결정을 번복하여 소유르가트므쉬에게 케르만의 단독 통치권을 주었다. (Quade-Reutter, 2016; de Nicola, 2017: 108)
1291년, 아르군이 죽고 게이하투가 일칸으로 즉위하자, 상황이 또 한번 반전되었다. 1292년, 파드샤는 마침내 소아시아에서 돌아왔다. 그녀의 남편, 게이하투는 파드샤에게 케르만을 주었다. 그해 10월, 마침내 권좌에 복귀한 파드샤는 소유르가트므쉬를 감금했다. 쿠르두진이 그를 구해내 게이하투의 궁정으로 데려갔으나, 게이하투는 다시 케르만으로 돌려보냈고, 파드샤는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다. 바이두가 소유르가트므쉬의 딸, 샤알람Shāh-ʿālam과 결혼하기를 원하여 잠시 남매는 화해했으나, 일시적이었다. 1294년 8월 21일, 파드샤는 결국 소유르가트므쉬를 교살형에 처했다. (Quade-Reutter, 2016)
마침내 사프와트 알둔야 왈딘 파드샤 하툰Ṣafwat al-Dunyā wa-l-Dīn Pādshāh Khātun은 어머니 테르켄과 마찬가지로 케르만의 단독 군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 게이하투는 야즈드와 샤반카라도 파드샤에게 주었다. 파드샤는 호르무즈까지 세력을 넓혔다. 내정에서도 그녀는 테르켄을 생각나게 만드는 수완가였다고 전해진다. 문학적 소양도 풍부했는지, 랄라 하툰Lāla Khātun이나 하산샤Ḥasanshāh 등의 필명으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파드샤는 스스로를 후다이반디 알람khudāvand-i ʿālam(세계의 주인)이라 지칭했을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Quade-Reutter, 2016)
그러나, 파드샤는 테르켄과 마찬가지로 일칸국의 정치적 혼란에 따라 실각했다. 바이두가 반란을 일으켜 게이하투를 죽였다 (1295년 3월 21일). 파드샤는 가잔 칸의 오르두로 피난가지 않고 케르만에 남았으나, 그녀의 지지자는 모두 사라졌다. 몽골 군이 도시를 함락했고, 바이두의 장모, 쿠르두진이 그 다음날 의기양양하게 케르만으로 입성했다. 1295년 6월과 7월 사이의 어느날, 파드샤는 쿠쉬케 자르에서 교살형에 처해졌다. 바이두의 명령이었으나, 쿠르두진과 샤알람이 뒤에 있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그녀의 뒤를 이은 무자파르 알딘 무함마드 샤가 그 유해를 수습하여, 코바 사브즈에 매장했다. (Quade-Reutter, 2016)
멸망
쿠르두진 하툰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테르켄이나 파드샤와 달리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이는 가잔이 바이두를 빠르게 몰아내고 일칸으로 즉위한 탓이었다. 일칸 가잔은 케르만 키타이 왕국의 여왕 전통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1296년, 그는 망명가서 죽은 히자즈의 아들, 아불하리스 무자파르 알딘 무함마드 샤 술탄 이븐 히자즈 술탄Abu ’l-Ḥārith Muẓaffar al-Dīn Muḥammad Shāh Sulṭān b. Ḥijjāj Sulṭān을 케르만 왕국의 군주로 세웠다. (de Nicola, 2017: 110) 그러나 무함마드 샤의 동생이 재상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파르스와 이라크에서 파견된 군대가 18개월 간 케르만을 포위한 끝에, 무함마드 샤는 도시의 항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반란군 지도자를 처형했다. 무함마드 샤의 새로운 재상은 공포정치를 펼쳤고, 무함마드 샤는 알코올 중독으로 도피했다. 1303년과 1304년 사이의 어느날, 무함마드 샤는 알코올 과용으로 죽었다. (Minorsky, 1986: 554)
울제이투 역시 가잔과 똑같은 정책을 선택하여, 소유르가트므쉬의 아들, 쿠틉 알딘 샤 자한 이븐 소유르가트므쉬Ḳuṭb al-Dīn Shāh Jahān b. Soyurghatmïsh에게 케르만 왕국을 맡겼다. 그러나 샤 자한은 너무 잔인하여 악평을 들은데다, 울제이투에게 정기적으로 보내야 할 연공도 지불하지 않았다. 울제이투는 2년 반만에 샤 자한을 폐위하고, 나시르 알딘 무함마드 이븐 부르한을 태수로 임명하여, 카라 키타이 왕국을 합병해버렸다. 샤 자한은 시라즈로 은퇴하여, 소유르가트므쉬의 아내 쿠르두진에게 몸을 의탁했다. 샤 자한의 딸 쿠틀룩 칸Qutlugh Khān은 1328년과 1329년 사이에 무자파르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무바리즈 알딘 무함마드와 결혼했는데, 무바리즈 알딘은 후일 이 결혼을 이용해 케르만을 점령했다. (Minorsky, 1986: 554)
제도와 풍습
중앙유라시아 카라 키타이 만의 유산은 케르만 왕국에 거의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케르만을 정복한 바라크의 군대 대부분은 튀르크인이었다. 나중의 파드샤 하툰 역시 자신을 튀르크인이라고 여겼다 (아마 키타이계 튀르크인. 그러나, 이 표현에서 ‘튀르크’에 너무 방점을 찍지 않기를 바란다. 몽골 제국기 이후 중앙유라시아 튀르크어 화자 유목민들이 가졌던 튀르크 정체성은 몽골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 참고). 그런 한편, 페르시아의 영향도 짙게 받았다. 후르로위Khusrawī와 같은 페르시아의 왕권 사상이 그 역사에서 나타나고, 페르시아어도 널리 사용되었다. 파드샤 하툰의 시 역시 페르시아어로 쓰여졌다. (Biran, 2012: 94)
그러나, 카라 키타이의 유산이 전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테르켄 하툰과 파드샤 하툰의 예와 같이 왕실 여성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이 좋은 예이다. 두 사람은 단순한 섭정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로써 집권했다. 이와 같은 거란의 풍습은 요대 승천태후承天太后의 예와 정확히 일치한다. 소작蕭綽은 요 남편 경종을 13년 동안 보좌하였고,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황태후의 신분으로 27년 동안 수렴첨정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군주로써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앞서 적은 테르켄 하툰과 마찬가지로, 승천태후는 아들인 성종이 장성한 이후에도 정권을 돌려주지 않고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박지훈, 2017) 이러한 거란의 중앙유라시아적 풍습은 케르만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당시 이란과 인도에서 군림한 여성 군주들은 모두 거란에 근본을 두었다. 일칸국 아래에서 파르스의 여왕으로 군림한 아비쉬 하툰Ābish Khātun(재위 1263년 ~ 1284년)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키타이인이었다. 델리의 술타나 라디야 알둔야 왈딘 빈트 일투트미쉬Raḍiyyat al-Dunyā wa ’l-Dīn bt. Iltutmush(통칭 라디야 빈트 일투트미쉬Raḍiyya bt. Iltutmush)는 키타이인의 딸이자 그 자신도 키타이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다. (Biran, 2012: 95)
뿐만 아니라, 테르켄 하툰의 궁정에는 중앙유라시아의 궁정과 마찬가지로, 무당Kāhina이 상주하며, 그녀의 운세를 점쳤다. 테르켄 하툰이 바라크 하집과 그의 아들 쿠틉 알딘과 결혼한 형사취수제도 거란의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파드샤 하툰은 심지어 이교도, 아바카와 그의 아들 게이하투와 각각 결혼했다. (Biran, 2012: 94-95)
고려와의 비교
일칸국과 케르만 카라 키타이 왕국의 관계는 대원 울루스와 고려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몽골인들은 지방의 군주와 황금씨족 공주를 결혼시킴으로써, 속신을 매우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었다. 명백히, 이 정책은 몽골 여성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일에 개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de Nicola, 2017: 108-09) 사실 이러한 통혼 관계는 황금씨족의 혼례상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몽골 황실의 통혼에서 가장 우선적인 고려 대상은 혈통적 · 문화적 동질성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카안과 훌레구, 양쪽 모두 일대의 파격을 통해 권좌에 오른 만큼 관례를 깨고서라도 이와 같은 통혼을 할 이유가 있었다. (윤은숙, 2012: 146-48)
고려와 몽원제국 사이의 통혼은 몽골제국의 질서 안에서 고려국왕이 점하던 지위와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고려왕은 이를 통해 독자적인 국가의 군주인 동시에, 황실의 일원으로 제국 질서의 핵심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1278년 원을 방문한 충렬왕의 입조외교나 1280년 단행된 2차 일본정벌 직전 충렬왕이 대원제국 정부에 개진한 건의 등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은 충렬왕의 부마지위가 기여한 바가 크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이를 통해 실질적 이익도 얻어냈다. 징발과 공물 요구는 줄어들고 회사와 하사물의 규모나 빈도는 증가했다. 또한 몽골 카안이라는 후원자와 정치적 동반관계를 굳건히 하여 왕권을 공고히하고 안정적인 지배를 달성할 수 있었다.(윤은숙, 2012: 145-52; 이개석, 2013: 203-20)
케르만의 거란 왕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각 군주들은 훌레구 가문과의 통혼을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테르켄 하툰은 히자즈 술탄을 통해 일칸국의 정책에 개입했고, 나중에는 파드샤 하툰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파드샤 하툰은 고려왕이 심(양)왕으로 자신의 영지를 넓힌 것과 같이, 케르만 지방을 넘어로 세력을 확대했다.
참고문헌
박지훈 (2017), “요대 承天 蕭太后의 섭정.” 《역사문화연구》 제64집: 113-44.
이개석 (2013). 《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윤은숙 (2012). “여ㆍ몽 관계의 성격과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 중국 학계의 '책봉과 조공' 관계 연구의 한계와 문제점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제35권. 동북아역사재단: 119-62.
Biran, Michal (2012), “Kitan Migrations in Eurasia (10th-14th Centuries),” Journal of Central Eurasian Studies, vol. 3: 85-108.
Biran, Michal (2017), “Barāq Ḥājib,” Encyclopaedia of Islam, THREE. Brill.
Minorsky, V. (1986), “Ḳutlug̲h̲-K̲h̲ānids.” Encyclopaedia of Islam, 2nd ed., vol. 05. Brill: 55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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