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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과 오스만국가의 영향4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Ⅳ. 맺음말 이상 본문을 통해 포메스티예의 등장과 확립에 있어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가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스크바국가는 확장하는 과정에서 증대된 군사적 요구에 맞설 수 있는 군사 계급을 조직해야 했다.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군주들은 봉직에 따라 토지를 보유한다는 몽골제국의 이크타에 주목했다. 포메스티예를 수여받은 하위귀족층에서 상당한 비율이 몽골계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반 4세 재위 이전까지 모스크바국가에는 포메스티예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조직이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1550년대 다방면에서 개혁을 추진하던 이반 4세가 포메스티예체제의 확립에 있어서 주목한 것은 오스만국가의 티마르체제였다. 이반 4세는 오스만국가의 티마르 분배와 통제 방식을 참고하여 포메스티예를 체계.. 2022. 9. 22.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Ⅲ. 포메스티예의 확산과 정착 베르나츠키와 오스트로우스키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은 몽골제국기 이크타-소유르갈(soyūrġāl)에는 포메스티예체제에서 보이는 엄격한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포메스티예를 받은 봉직자는 국가가 소집하는 때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하고 해당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 포메스티예는 회수될 수 있었다. 또한 포메스티예는 원칙적으로 상속되지 않았고, 봉직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봉직을 수행하는 경우 아버지의 포메스티예 전체가 아니라 신참에게 할당되도록 규정된 만큼의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²⁵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이자 구체적인 봉직의 대가로 지급되는 생계수단인 포메스티예의 모습은 오스만제국의 티마르와 유사하다. 티마르는 특정.. 2022. 9. 20.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Ⅱ. 포메스티예의 등장 13세기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는 14세기와 15세기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증대된 군사적 요구에 직면한 모스크바 벨리키 크냐지는 군사 계급을 조직해야만 했다. 더욱이 몽골 등 외부로부터 유입된 많은 전사들을 부역하기 위한 군역지도 필요했다. 이것이 봉사에 대한 대가로 하사되는 조건부 토지, 포메스티예였다.¹⁰ 앞서 언급하였듯, 루시세계에 포메스티예 이전에 세습봉토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0세기 중엽에 하자르 제국이 몰락한 이후 루시 세계에서는 자기 방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부유한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고, 최초에는 노예 인력이 이 집단의 중추가 되었다. 유목민의 약탈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이들 상인에게 더욱.. 2022. 9. 18.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과 오스만국가의 영향 Ⅰ. 머리말 모스크바국가가 대두하면서 루시세계에는 새로운 토지소유권의 형태, 포메스티예(Pomestʹe: 봉직영지)가 등장했다. 분령시기 루시세계에 일반적인 토지 보유의 형태는 보트치나(Votchna: 세습영지)였는데, 이것은 사거나 팔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였다. 그런데 이반 3세와 그 이후 벨리키 크냐지(Velikiĭ kniazʹ)들 사이에서는 보트치나와 달리 봉직자에게 기한을 정하고 통상적으로 직무의 조건이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존 시에만 보유하게 했던 포메스티예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특히 이반 4세는 1556년 포괄적인 조직이나 기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포메스티예 보유자의 봉직을 위한 일반적인 규정을 마련했다. 포메스티예체제의 핵심은 이반 3세와 그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봉직자들에게.. 2022.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