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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19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Ⅲ. 포메스티예의 확산과 정착 베르나츠키와 오스트로우스키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은 몽골제국기 이크타-소유르갈(soyūrġāl)에는 포메스티예체제에서 보이는 엄격한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포메스티예를 받은 봉직자는 국가가 소집하는 때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하고 해당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 포메스티예는 회수될 수 있었다. 또한 포메스티예는 원칙적으로 상속되지 않았고, 봉직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봉직을 수행하는 경우 아버지의 포메스티예 전체가 아니라 신참에게 할당되도록 규정된 만큼의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²⁵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이자 구체적인 봉직의 대가로 지급되는 생계수단인 포메스티예의 모습은 오스만제국의 티마르와 유사하다. 티마르는 특정.. 2022. 9. 20.
차르 권력의 기원, 포메스티예 베르나드스키는 모스크바 차르 권력의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로 군사 봉토 체제를 들었다. 이 군사적 봉토의 이름은 바로 포메스티예(Поместье, Pomest’e; ‘뽀메스찌예’라고도 표기됨)였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 봉직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토지를 뜻한다. 이를 받은 봉직자, 즉 포메시키(Помещики, Pomeshchiki)는 그 대가로 국가의 소집에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을 한 후에 전투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토지 150 데샤티나(미터법 이전의 러시아 면적 단위로, 1 데샤티나는 10,925㎡에 해당했다. 즉, 150 데샤티나는 대략 1,635,000㎡) 당 병사 1명과 장비를 갖추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을 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불복종한다면 포메스티예.. 2019. 12. 20.
오스만, 그는 어디에서 왔나 오스만 제국사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콜린 임버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스만 가문의 근원에 대한 그 어떤 이론도,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가지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tale) 대부분은 창작일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초창기 오스만사가 블랙홀임을 인정하는 것 뿐이다. 이 구멍을 막기 위한 모든 시도는 단지 우화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일 뿐이다.”(Imber, 1993: 75) 오스만 가문의 시조로 알려진 오스만 1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그’의 시대에 존재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발행인 오스만 이븐 에르토그룰’(ʿOthmān b. Erto.. 2019. 8. 16.
버나드 루이스, 《오스만제국 근대사》 버나드 루이스 (1994).《오스만제국 근대사》. 김대성 옮김. 펴내기. 360쪽. Lewis, Bernard (1961). The emergence of modern Turkey. Oxford University Press. 568 pages. 내용에 대해 적기에 앞서, 이 책은 버나드 루이스의 1961년작 저서, The emergence of modern Turkey의 완역본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겠다. 역자 후기에 설명된대로, 본래 이 책은 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1부는 The Stages of Emergence라는 제목으로, 오스만 제국 후기부터 아타튀르크 사후의 터키공화국까지를 다룬 연대기적 서술이다. 2부는 Aspects of Change라는 제목으로, 집단과 국가의 관계, 행정, 종교,.. 2019. 8. 3.
알리 케말, 보리스 존슨의 터키인 증조부 최근 보리스 존슨이 새로이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이는 터키에서도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는데, 터키계 혈통 때문이다. 존슨 총리의 증조부는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내무장관을 지낸 알리 케말이다. 알리 케말은 언론인으로 경력을 시작해 입각하여 위태로운 조국의 조타수로 나선 그의 경력이 보리스 존슨과 겹치기 때문인지 보리스 존슨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경력을 겹쳐보는 것 같다. 어쨋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알리 케말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알리 케말(ʿAlī Kemāl, 현대 터키어로는 Ali Kemal; 1867년 ~ 1922년)은 오스만 제국의 언론인, 작가 그리고 정치인이다. 알리 케말의 아버지, 하지 아흐메드 에펜디(Ḥājjī Aḥmed Efendi)는 아나톨리아 중부의 .. 2019. 7. 25.
오스만어, 오스만 튀르크어 그리고 터키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이후 세속화(서구화)의 일환으로 언어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현대 터키 튀르크어(Türkiye Türkçesi; 이하 터키 튀르크어)와 오스만 튀르크어는 문자부터 문법까지 모든 면이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사실과 다르다. 우선, 오스만어(Osmanlıca)와 오스만 시대의 튀르크어(Osmanlı Türkçesi; 이하 오스만 튀르크어)는 크게 다른 언어였다. 또한 언어개혁이라고 크게 하나로 부를 수 있지만, 실제로 아타튀르크의 개혁에서 언어개혁과 문자개혁은 별개로 이루어졌다. 오스만인들이 오스만어라 부른 언어는 튀르크어, 아랍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혼합이었다. 이 언어는 행정과 문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아마 일반 민중은 관공서에서나 접할 수 있었으나 거의 이.. 2019. 6. 25.
오스만 제국의 즉위 의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군주의 권력은 단순히 그들이 지휘하는 군대와 관료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권력은 왕조와 그 신민들, 그리고 기타 유력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중앙과 지방 모두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협상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군주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신민들에게 일상적으로 상기시키려고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오스만 파디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군주들은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통성 확보의 도구를 사용했다. 왕조의 생애 주기의 각 단계를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선을 그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다. 이 글에서는 왕조의 생애 주기를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행사들 가운데 그 군주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법한 .. 2019. 6. 16.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 관련 연구들 Fodor, Pál (2015). “Byzantine Legacies in Ottoman Identity.” in Barbara Kellner-Heinkele and Simone-Christiane Raschmann (eds.). Opuscula György Hazai Dicata: Beiträge zum Deutsch-Ungarischen Workshop aus Anlass des 80. Geburtstages von György Hazai. Klaus Schwarz Verlag: 93-108.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에 대한 연구사와 현재의 중론에 대해 정리한 에세이다. 연구사적 부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에 대한 연구가 역사가 깊으며, 최근에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였다. 현재 .. 2019. 5. 12.
무라드 2세의 군사교리 개혁 무라드 2세의 업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르나 전투 등의 승리를 통해 위기를 넘긴 것, 앙카라 전투 이후 오스만 국가의 확장 정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한 것, 메헴메드 2세를 후계자로 둔 것 등. 그러나 나는 그보다 재위 만년에 보여준 군사교리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 사이의 기간에 무라드는 향후 오스만 제국의 고전기를 지탱할 중요한 개혁을 실시했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군대는 전형적인 튀르크·몽골식 군대였다. 당시 오스만이 동원할 수 있는 총 군대는 약 64,000명이었다. 약 30,000명이 시파히 지방군이었고, 카프쿨루 상비군이 약 10,000명, 아잡 등 징집병이 약 24,000명이었다. 즉, 기병대의 비율.. 2019.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