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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71

로마 관념의 확산 초기 로마 제국은 진정으로 다족류적(multiethinic, 多族類的)이었다. 그러나 212년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 이후, 제국의 모든 자유민은 로마 시민이 되었고, 로마시와 이탈리아는 권력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상실했으며, 심지어 로마시라는 관념마저 지방으로 옮겨졌다. 후기 고대(late antiquity)의 클리셰를 인용하자면, 도시(urbs)는 세계(orbs)가 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신이 세운 도시에 이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많은 지방 도시들이 신로마(New Rome)이라고 불리었고, 그 주변의 세계는 로마인의 땅(Romanía)이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방 인구들은 로마의 규범적인 질서를 받아들이며 스스로 로마인을 칭하기 시작했.. 2023. 2. 19.
『비잔티움의 역사』 그리스어 표기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선생의 『비잔티움의 역사』 번역을 준비하면서 한 모험(?) 가운데 하나는 현대 그리스어를 기준으로 한 그리스어 표기였다. (한국어판) 「일러두기」에 밝혔듯,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로마-비잔티움 제국의 고유명사는 이라클리오스 1세의 재위(610-41년)을 기준으로 그 전은 라틴어로, 그 이후는 그리스어를 기준으로 표기되었다. 이 점은 종래 나온 비잔티움 관련 서적들과 같지만, 『비잔티움의 역사』는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어를 고대 그리스어가 아닌 현대 그리스어의 발음에 따라 표기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리스어의 한국어/한글 표기는 의 그리스어 외래어-한글 변환 프로그램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예를 들어, ‘Ἰωάννης’는 에서 ‘이오아니스’이지만, 『비잔티움의 .. 2022. 11. 20.
‘비잔티움’의 의미 변화: 동로마에서 그리스 제국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부르는 방식”에서도 적었지만, ‘비잔티움/비잔틴 (이하 ‘비잔티움’으로 통일)’이라는 표현은 16세기 히에로니무스 볼프(Hieronymus Wolf, 1516-80년)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오늘날 사람들이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비잔티움 제국’으로 부르지도 않았고, ‘비잔티움인’을 자칭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현대 역사학적 용어인 ‘비잔티움’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기본적인 맥락에는 동의하되,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역사에 대한 시각은 점차 달라지고 있는 듯 하다. 먼저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동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명사로 사용되어 온 역사는 히에로니무스 볼프보다 훨씬 오래되.. 2022. 10. 25.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Ⅳ. 맺음말 이상 본문을 통해 포메스티예의 등장과 확립에 있어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가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스크바국가는 확장하는 과정에서 증대된 군사적 요구에 맞설 수 있는 군사 계급을 조직해야 했다.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군주들은 봉직에 따라 토지를 보유한다는 몽골제국의 이크타에 주목했다. 포메스티예를 수여받은 하위귀족층에서 상당한 비율이 몽골계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반 4세 재위 이전까지 모스크바국가에는 포메스티예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조직이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1550년대 다방면에서 개혁을 추진하던 이반 4세가 포메스티예체제의 확립에 있어서 주목한 것은 오스만국가의 티마르체제였다. 이반 4세는 오스만국가의 티마르 분배와 통제 방식을 참고하여 포메스티예를 체계.. 2022. 9. 22.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Ⅲ. 포메스티예의 확산과 정착 베르나츠키와 오스트로우스키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은 몽골제국기 이크타-소유르갈(soyūrġāl)에는 포메스티예체제에서 보이는 엄격한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포메스티예를 받은 봉직자는 국가가 소집하는 때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하고 해당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 포메스티예는 회수될 수 있었다. 또한 포메스티예는 원칙적으로 상속되지 않았고, 봉직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봉직을 수행하는 경우 아버지의 포메스티예 전체가 아니라 신참에게 할당되도록 규정된 만큼의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²⁵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이자 구체적인 봉직의 대가로 지급되는 생계수단인 포메스티예의 모습은 오스만제국의 티마르와 유사하다. 티마르는 특정.. 2022. 9. 20.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와 오스만국가의 영향 Ⅱ. 포메스티예의 등장 13세기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는 14세기와 15세기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증대된 군사적 요구에 직면한 모스크바 벨리키 크냐지는 군사 계급을 조직해야만 했다. 더욱이 몽골 등 외부로부터 유입된 많은 전사들을 부역하기 위한 군역지도 필요했다. 이것이 봉사에 대한 대가로 하사되는 조건부 토지, 포메스티예였다.¹⁰ 앞서 언급하였듯, 루시세계에 포메스티예 이전에 세습봉토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0세기 중엽에 하자르 제국이 몰락한 이후 루시 세계에서는 자기 방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부유한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고, 최초에는 노예 인력이 이 집단의 중추가 되었다. 유목민의 약탈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이들 상인에게 더욱.. 2022. 9. 18.
모스크바국가 포메스티예체제 성립에 미친 몽골제국과 오스만국가의 영향 Ⅰ. 머리말 모스크바국가가 대두하면서 루시세계에는 새로운 토지소유권의 형태, 포메스티예(Pomestʹe: 봉직영지)가 등장했다. 분령시기 루시세계에 일반적인 토지 보유의 형태는 보트치나(Votchna: 세습영지)였는데, 이것은 사거나 팔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였다. 그런데 이반 3세와 그 이후 벨리키 크냐지(Velikiĭ kniazʹ)들 사이에서는 보트치나와 달리 봉직자에게 기한을 정하고 통상적으로 직무의 조건이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존 시에만 보유하게 했던 포메스티예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특히 이반 4세는 1556년 포괄적인 조직이나 기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포메스티예 보유자의 봉직을 위한 일반적인 규정을 마련했다. 포메스티예체제의 핵심은 이반 3세와 그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봉직자들에게.. 2022. 9. 15.
발해의 이름은 단나라[dan gur, 丹國]? 926년 정월 거란(契丹)은 20여년에 걸친 각축전 끝에 발해(渤海)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거란군은 거침없이 진군하여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척은(惕隱) 야율안단(耶律安端; 952년 사망)이 이끄는 선봉 기병은 발해의 노상(老相)이 통솔한 3만 원군을 물리치고 수도 홀한성에 도달했다. 이에 대인선(大諲譔)을 비롯한 발해 통치 집단은 투지를 상실하고, 거란군이 성을 포위한지 4일째 되던 날 항복을 결정했다. 이로써 발해 국가는 14대 229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야율아보기는 “그 국명을 동단(東丹)이라 하고 그 [홀한]성을 천복(天福)이라 명명하여 야율배(耶律倍)를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는 (改其國曰東丹, 名其城曰天福, 以倍為人皇王主之)” 조치를 단행한다.(脫脫 .. 2022. 7. 21.
칸국, 울루스 체제, 그리고 ‘몽골 연방’ 기존 몽골 제국사 연구는 몽골 제국의 통합 기제보다는 네 개의 칸국(한국)으로의 분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대세였다. 몽골 제국의 통합과 분열을 바라보는 연구자들은 칭기스 칸의 분봉을 지역적인 분할의 전조로 파악했다. 즉 분봉에서 나타나는 몽골 지배층의 제국에 대한 인식이 곧 분열의 씨앗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용규 2009: 102-103 특히 n. 34; 이용규 2010: 73) 예컨데 피터 잭슨(Peter Jackson) 교수의 논문「울루스에서 칸국으로: 몽골 국가들의 발생, 1220년경-1290년경」(“From Ulus to Khanate: The Making of the Mongol States, c. 1220–c. 1290,” 1998)가 있다. 그는 몽골 제국이 통합적인 구도에서 어떻게 지역 .. 2021.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