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소련 연구팀이 구리 아미르(Gūr-i Amīr) 발굴에 나섰다. 이들의 목표는 간단했다. 테뮈르조의 무덤을 열어서 테뮈르의 유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구리 아미르를 파헤치려 했을때 한 노인이 왕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실제로 관뚜껑에는 “누구든지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에게 닥칠 것이다”라는 저주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소련 연구팀은 관에 새겨진 경고를 신경쓸 계제가 아니었다. 스탈린이 테뮈르의 유해를 확인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골을 꺼낸 바로 다음날인 6월 22일 새벽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깜짝 놀란 스탈린은 테뮈르의 유해을 다시 봉인하라고 명령했고, 1942년 테뮈르는 다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이 ‘티무르의 저주’ 이야기는 아마 테뮈르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일화일 것이다. 호사가의 한 사람으로서는 안타깝게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아니지만 말이다. 우선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발굴단의 일원이자 테뮈르의 유골 복구를 직접 실시한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게라시모프(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Гера́симов, Mikhail Mikhaylovich Gerasimov)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941년 6월 16일부터 24일까지 구리 아미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심지어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인 6월 15일부터 끝난 다음 날인 25일까지 발굴 경과는 타슈켄트의 일간지 『동방의 진실』(Правда Востока, Pravda Vostoka)을 통해 매일 공개되었다. 유해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시점도 맞지 않다. 발굴이 끝난 뒤에 유해와 유물은 타슈켄트로 옮겨져 모든 사무작업이 완료되는 1943년 10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테뮈르조 군주들의 유해는 다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Gerasimov, 1971: 131; Shaw, 2011: 54-55)
테뮈르의 관에 새겨져 있었다는 문장도 실제와 전혀 다르다. 실제 테뮈르의 관에 적힌 비문들은 테뮈르의 가계에 대한 나열과 칭기스 가문 및 바룰라스[Barulās ← BRLAS, 일반적으로는 바를라스(Barlās)로 전사되나, 바룰라스로 적는 경우도 있고, 몽골어형도 바룰라스(Barulas)이기에 이 형태를 택했다] 가문의 관계, 알란고아 전설, 알라를 찬양하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 가운데 테뮈르와 관련된 부분을 옮기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위대한 통치자이자 고귀한 카안과 신앙의 보호자인 아미르 테뮈르 퀴래갠(kürägän: 부마) 이븐 타라가이(Ṭaraghāy) 이븐 부르쿨(Būrkūl) 이븐 엘램기르(Elämgir) 이븐 아미르 에칠(Echil) 이븐 아미르 카라차르 노얀(Qarachar Noyan) 이븐 아미르 수구차찬(Sughuchāchān) 이븐 아미르 에르댐치(Erdämchi) 바를라스 이븐 카출라이(Qachulay) 이븐 아미르 투미나이(Tuminay)의 무덤이다. 칭기스 칸 이븐 이수게이 바하두르(Yesügei Bahādur) 이븐 아미르 바르탄(Bartan) 이븐 아미르 바이순구르(Bāysunghur) 이븐 아미르 카이두(Qaydu) 이븐 아미르 투미나이 이븐 아미르 부카(Buqa) 이븐 아미르 보단차르(Bodanchar). 이 진실로 고귀한 분[보단차르]의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어머니는 알란 코아(Alan Qoa)이다. 이분의 성품은 공정하고 순수했으며, 동정으로 남으셨다. 신성한 빛이 문 위로 비춰와 그를 품게 되었다. 빛은 마치 사람처럼 나타났더라[『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파하드 국왕 꾸란 출판청, 1996), 19장 17절]. 빛이 말하길 나는 신도들의 지휘관(Amīr al-Muʾminīn)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ʿAlī b. Abī Ṭālib)의 아들이라.” (Semenov, 1960: 143-49; Gerasimov, 1971: 131-32)
요컨데, ‘티무르의 저주’에서 주요한 내용이 되는 비문의 내용과 유해 발굴 시기, 양쪽 모두가 실제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 중앙아시아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찰스 쇼(Charles Shaw)에 따르면, 문헌상 ‘저주’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90년 잡지 『동방의 별』(Звезда Востока, Zvezda Vostoka: 타슈켄트에서 발행되던 잡지)라고 한다. 쇼는 테뮈르의 유해와 안식처에 마법적인 힘이 있다는 믿음이 소비에트 공식 역사 해석에 대한 대안을 제공했다고 보았다. 즉, 지방에는 숨겨진 힘이 있고 러시아의 불의도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2004년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르 페티소프(Александр Фетисов, Aleksandr Fetisov) 감독이 제작하고 채널 러시아(Россия, Rossiya)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티무르의 저주”(Проклятие Тимурлана, Proklyatiye Tamerlana)를 통해 유명해지고, 재생산되었다. (Shaw, 2011: 55, 63 n. 36)
참고문헌
Gerasimov, Mikhail M. 1971. The Face Finder. Alan Houghton Brodrick, Trans. Hutchinson & Co.
Shaw, Charles. 2011. “The Gur-i Amir Mausoleum and the Soviet Politics of Preservation.” Future Anterior: Journal of Historic Preservation, History, Theory, and Criticism, Vol. 8, No. 1: 42-63.
Semenov, A.A. 1960. “Gûr-i Emir Türbesinde Timur’un ve Ahfadının Mezar Kitabeleri.” Abdülkadir İnan, Trans. TTK Belleten, Vol. 24, No. 93: 139-69.
사진.사진. 테뮈르의 유해를 발견한 발굴단. 위키피디아에는 날짜가 1941년 6월 21일이라 적혀있었으나, 신뢰할만한 출처를 찾지 못했다. 출처: 위키커먼스의 “1941-Tim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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