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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터키의 민군관계 Ⅲ 케말주의 공화국

by hanyl 2020. 1. 22.

제1공화국 시기에 군부의 역할은 여러모로 ‘후견인’이라 할만했다. 즉, 군부는 터키 공화국의 세속화와 근대화 개혁을 ‘후견’한 것이다. 이 시기 군부의 정치 개입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민군관계는 1950년대 이후 더 복잡해졌다. 터키가 차츰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하며 다당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헤일(William M. Hale)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터키 정치에서 군부의 역할을 3시기로 나누어 조망했다. 첫번째 시기인 1923년부터 1926년까지(즉, 아타튀르크 시대), 아타튀르크는 가능한 한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군 장교들은 이 시기 철저히 아타튀르크의 개인적인 권력을 위해 일했다. 그 다음 시기는 1926년부터 1950년까지(즉, 케말주의 공화국 시대)로, 군부는 터키 공화국의 국가건설 프로젝트 과정에서 새로운 터키 공화국 정권과 그 이데올로기에 충성을 바쳤다. 민주당의 승리로 시작된 다당제 시기는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이어졌다. (Hale, 2011)

그림 3 이스메트 이뇌뉘, 페브지 차크마크 그리고 아타튀르크 (1936년 10월 29일)

아타튀르크 생전에 터키 공화국은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대신 아타튀르크는 군부가 공화국의 개혁에 후견인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했다. 1923년 이후 의회에는 단 2 사람의 지휘관만이 남아 있었다. 이스메트 이뇌뉘(İsmet İnönü)는 총리였고, 페브지 차크마크(Fevzi Çakmak)는 원수였다. 페브지 차크마크는 총참모장직을 1921년부터 1944년까지 수행했다. 헤일은 페브지 차크마크의 존재 덕분에 아타튀르크는 군부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카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 자페르 타이야르 에일메즈(Cafer Tayyar Eğilmez), 레페트 벨레(Refet Bele) 등 군인은 아타튀르크의 반대자에 가까웠다. (Hale, 2011: 192-95)

케말주의 공화국 시기에도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막는 기제는 여전했다. 여전히 군부는 의회 정치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923년 12월에 제정된 법안 385번은 “이후의 선거에서 군인은 선거 이전에 퇴역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1924년에 제정된 헌법에서 23조로 재확인되었다. 40조에서는 터키 대국민회의(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며, 공화국 대통령의 통제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총참모장은 이제 내각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 자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방부장관의 차지가 되었다. (Hale, 2011: 194-95) 1930년에는 군형법이 제정되었다. 148조는 군인이 “정치적 주제로 사람들과 토의하거나, 정당에 입당하거나, 정치 시위, 모임, 선거에 참가하거나, 이들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 선언을 작성하거나, 이와 관련되어 연설하는 경우 최대 5년 징역에 처한다(Siyasi maksatla toplananlar, siyasi fırkalara girenler, siyasi nümayiş ve içtimalara ve intihabata iştirak edenler veya her ne suretle olursa olsun bu maksalarla şifahi telkinatta bulunanlar ve siyasi makale yazanlar ve bu yolda nutuk söyleyenler beş seneye kadar hapsolunur)”고 정했다. (Askeri Ceza Kanunu, No. 1632; Hale, 2011: 195)

그러나 불안한 여지도 있었다. 1935년에 통과된 국군법의 35조는 “군대의 의무는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튀르크 민족의 고향과 터키 공화국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이다(Silahlı Kuvvetlerin vazifesi; Türk yurdunu ve Anayasa ile tayin edilmiş olan Türkiye Cumhuriyetini kollamak ve korumaktır).” (Türk Silahlı Kuvvetleri İç Hizmet Kanunu, No. 211)고 정했다. 이는 1961년에 제정된 국군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쿠데타나 정치에 개입한 군인들이 경전처럼 받드는 구절이 될터였다. 케말주의에 따라 세속주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식이었다. 다만 케말주의 공화국 시기까지는 군형법의 148조가 강력히 적용되었기에 튀어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Hale, 2011: 195-96)

어쨋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까지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세된 상태였다. 대신 군대는 근대화 개혁을 수행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사관학교는 사회적 유동성의 장이었다. 사관학교 졸업생들은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았고, 졸업 이후로도 평생직장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터키 시민들에게 있어서도 군복무는 상당히 중요했다. 1935년 터키를 여행한 한 독일인은 막 전역한 청년과 대화한 뒤에 이렇게 적었다. “그에게 총을 어떻게 다루는지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이 젊은이는 총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는 젊은이에게 훈육을 통해 청결 관념, 시간 감각, 땅을 경작하는 방법, 읽고 쓰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청년은 고작 7개월 복무했지만, 군대에서 배운 바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Hale, 2011: 195)

다당제 시기에 접어들며 군대의 정치적 성향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1946년에 창당되었는데, 청년 장교들은 아타튀르크가 만든 공화인민당을 저버리고 민주당을 선택했다. 1960년 쿠데타의 주역은 그보다는 나이가 많았던 중간 계급의 장교들이었다. 헤일에 따르면, 군대가 항상 공화인민당을 지지했다는 것은 오해였다. 당시 “공화인민당 + 군대 = 권력(CHP + ordu = iktidar)”이라는 공식이 유행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군대의 일부는 일당정권 시대가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민주당이 탄생하며 그 욕구를 채워준 것이다. (Hale, 2011: 197)

표 1 1920년~1970년 밀 가격

그러나 몇가지 이유로 군대 내부에서 불만을 품은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이유는 군대의 근대화와 직업군화였다. 1923년부터 1945년까지 터키군은 전문기관으로 보기 어려웠다. 나토(NATO) 가입 이후에야 터키군의 근대화와 직업군화가 시작되었다. 1948년에 시작된 마샬 플랜을 통해 미국 정부는 근대적인 군용 장비나 전문가를 터키에 파견하여 터키군의 근대화를 진행했다. 청년 장교들은 새로운 기술적 혁신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보수적인 윗세대가 개혁을 가로막는다고 여겼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었다. 1950년대 내내 군인의 월급은 형편없었던데다가 극심한 인플레로 더더욱 큰 고통을 받았다. 민주당은 경제적으로 농업 발전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농산물 수요가 폭증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끝나면서 수요가 급감했고, 경제호황도 끝이 났다. 물가가 폭등하고 환율 위기, 소비재 부족 사태가 야기되어 민주당 정권은 정치,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는 당시 총리 아드난 멘데레스(Adnan Menderes)가 터키군에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점, 그리고 민주당 정권이 케말주의 세속화 원칙을 침해한다는 군부의 인식과 함께 섞이며 폭발했다. 당시 군부는 민주당이 선거를 폐지하고 일당독재 정권을 세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혼란에 멘데레스 총리는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개입주의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점차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차츰 커졌다. 결국 1960년 한국의 4.19 혁명 등 외신을 접한 터키 대학생들은 폭발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이 혼란을 틈타 군부도 쿠데타를 일으키며 민주당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고, 터키의 첫 번째 민주화 실험도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서재만, 2006: 141-42; Davison, 1998: 199; Kutay, 2016: 9; Pamuk, 2008: 28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