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군 사령관 제말 귀르셀(Cemal Gürsel)은 소수의 장교들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0년 5월 27일 새벽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멘데레스 등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장악하였다. 이후 귀르셀과 40세 이하인 37명의 장교들은 국가단합위원회(Millî Birlik Komitesi)를 구성해 권력을 장악했다. 1961년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38%나 나온데 놀란 이들은 멘데레스와 2명의 각료를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Robinson, 1998: 199-202)
그러나 폭력적인 쿠데타 과정과 별개로, 새로 도입된 1961년 헌법은 제1공화국 헌법보다 더 자유주의적이었다. 쿠데타 발생 직후 이스탄불대학교 출신 법률가들이 주가 된 위원회가 신헌법 초안을 발표했다. 국민의회는 1961년 1월부터 5월까지 이를 수정했다. 7월 9일에 헌법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졌다. 제1공화국기에서 일당독재와 권력남용이 의회민주주의가 실패한 원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헌법을 채택하여 개인의 기본권리와 자유를 국가보다 우위에 두었다. 이를 통해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여 권력독점으로 나아가는 파행적 정국운영이 억제되었다. 둘째, 터키 대국민의회의 지위는 주권행사의 권한을 가진 헌법기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즉, 이제 입법부와 행정부는 헌법적 기관으로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 셋째, 하나의 당이 압도적 다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원제가 도입되었다. (서재만, 2006: 142-43; Robinson, 1998: 201-02; Kutay, 2016: 10)
문제가 된 부분은 국가안정보장회의(Milli Güvenlik Kurulu, MGK: 민군이 정기적으로 안보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의 설립이었다. 국가안정보장회의를 통해 군부는 터키 정치에 개입할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국가안정보장회의로 인해 정치인들은 안보와 연관된 문제에서 군부의 시각에 따라야 했다. 그런데 안보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 국내와 국외의 문제를 가리지 않고 군부가 개입할 여지가 너무 많았다. “장군들은 새로운 헌법을 통해 문민정부의 권한을 침해하고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Harris, 2011: 205) 2000년대 이전까지 국가안정보장회의에서는 퇴역장군들이 대통령보다 우선한다는 관례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했다 (Kutay, 2016: 10; Karaosmanoğlu, 2012: 149). 일부 학자들은 이로 인해 케말주의 원칙에 털끝 하나만 손대도 군부가 개입하려 들었다며, 국가안정보장회의 때문에 군부의 정치 개입을 금지한 아타튀르크의 유산이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Hanioğlu, 2011a: 45-47; Hale, 2011: 199-200).
1960년대만 해도 데이비드 러너(David Lerner)나 리처드 로빈슨(Richard D. Robinson) 같은 학자들은 1960년 군부 쿠데타를 찬양했다. 그들은 이로 인해서 터키의 근대화와 개화 프로젝트가 보호받았다고 믿었다. (Hale, 2011: 199) 이제 이같은 시각은 소수에 불과하다. 1960년 이후에도 탈라트 아이데미르(Talat Aydemir)와 페트히 귀르잔(Fethi Gürcan)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시도가 존재했던 것과 같이, 군부는 터키 사회를 안정화시키는데 실패했다. 1962년과 1963년에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두 사람은 1964년에 처형당했다. 1400명의 간부후보생이 1963년의 쿠데타 시도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고 사관학교에서 쫓겨났다. (Kutay, 2016: 10)
제2공화국이 채택한 자유주의 헌법은 기대와 달리 좌익세력에 문호를 개방하여 좌우익 세력의 투쟁을 야기했다. 때로는 유혈충돌도 있었다. 특히 1965년 이스메트 이뇌뉘가 총리직을 사임한 뒤에 유혈사태는 더욱 심화되었다.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은 살육을 일삼았다. 당시 총리 쉴레이만 데미렐(Süleyman Demirel)은 여기에 개입하지 못했다. 아드난 멘데레스가 학생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던 것이 1960년 쿠데타의 한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인해 경제 후퇴와 사회적 불안은 심화되었다. (서재만, 2006: 143-44; Harris, 2011: 205-06)
이에 1971년 3월 12일, 터키 참모총장 멤두흐 타으마츠(Memduh Tağmaç) 육군대장을 필두로 한 군부는 정치개입을 선언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이유 외에도 1960년 후반부터 1970년 초반까지 도안 아브즈올루(Doğan Avcıoğlu)의 주장이 좌익 학생과 초급장교를 휩쓸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도안 아브즈올루는 바트당(Baʿth Party)을 모델로 하여 군부가 케말주의 원칙에 입각한 사회적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민족민주혁명(Millî Demokratik Devrim)이라 불리었는데, 차츰 하급장교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고급장교들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Kutay, 2016: 10; Harris, 2011: 206)
데미렐 내각은 군부에 의해 퇴진당했고, 정의당은 해산당했다. 군부는 수천 명을 재판에 회부하는 한편, 정당을 초월한 내각을 ‘임명’했다. 구성면에서 이 정부는 테크노크라트 내각이라 부를 수 있다. 테크노크타트들은 토지개혁, 농업재산의 과세, 외국자본의 철저한 감독, 정부 주도의 개발과 사회정의 구현을 목표로 집권했다. 그러나 정의당과 달리 의회는 해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회는 테크토크라트 행정부를 신임하지 않았다. 주요 정당들은 힘을 합하여 군부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자를 반대하는 놀라운 수준의 화합을 보여주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내각은 3차례나 해산했다. 이 시기에 군부는 터키 공화국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다. 대신 정부에 폭력 사태가 도를 넘은 몇몇 지역에 계엄령을 선언하라는 식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Davidson, 1998: 218-19; Harris, 2011: 206)
이와 같은 헌정질서 중단의 위기 속에서 1961년 헌법은 대대적으로 개정되었다. 기본권 제한 규정의 신설, 구금기간의 연장, 공무원의 노조 가입 금지, 법률 수준의 효력을 수반한 행정부의 행정명령 발동권 승인, 터키 방송사(TRT)의 자율권 제한, 대학의 자율권 폐지, 국가보안법정 설립 등이 그 주요한 내용이었다. 내각은 1961년 헌법에 명시된 자유를 다소 빼앗겨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또한 터키대국민의회도 크게 변화했다. 터키 대국민의회의 임기는 5년으로 늘어났고, 하원 의석은 550석으로 확대되었다. 1973년 3월 5일에 제정된 법령 제584호 터키대국민의회 원내규칙은 1961년 10월 25일에 공포된 원내규칙을 대신하여 9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원내규칙은 이후 수차례 개정되었으나 1980년 쿠데타로 인한 1982년 헌법 제정 이후로도 큰 틀에서는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서재만, 2006: 144-45)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좌우익의 분쟁은 1970년대 내내 더 극심해졌다. 그 와중인 1970년대 초 네즈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은 정치적 이슬람 성향을 띈 국민구제당(Millî Selâmet Partisi)을 설립했다. 현 집권당 정의개발당(AKP)는 국민구제당에서 시작되었다. 국민구제당은 캐스팅보트로 쉴레이만 데미렐 행정부에 여당으로 참여했으나, 연정은 실패했다. 사회는 이념적으로 너무 분열되었다. 의회는 102번이나 투표를 했음에도 대통령을 뽑지 못했을 정도였다. 폭력은 여전히 만연했다. 정치적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국가와 사회는 실질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군부의 개입으로 풀려난 4,000명의 기결수는 거리에서 폭동과 테러를 조장했다. 1980년의 폭동으로 3,500명이나 사망했을 정도였다. (Davidson, 1998: 219; Kutay, 2016: 11)
경제 상황도 심각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터키 정부는 국내 시장을 보호하고 수입대체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1960년의 쿠데타 직후 설립된 국가계획기구(Devlet Planlama Teşkilatı, DPT) 이를 주도했다. 국가계획기구는 민간부문의 투자 계획까지 일일히 허가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떨쳤다. 정부의 투자촉진 정책으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그 대가로 경제적 불안도 가중되었다. 공공부채는 급증했고, 국영기업체의 손실로 인한 무역수지 적자도 여전했다. 재정적자에 정부는 통화팽창으로 대응했고, 고율의 인플레가 뒤따랐다. 1974년 제1차 오일쇼크가 터키 경제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1979년, 인플레이션율은 70%를 넘었고, 80년에는 100%를 상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위, 파업, 공장폐쇄가 잇따르며 터키의 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Davidson, 1998: 219-20; Pamuk, 2008: 28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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