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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터키의 민군관계 Ⅴ 권위주의 헌법의 그늘

by hanyl 2020. 4. 11.

그림 5 케난 에브렌 장군

1980년 9월 12일, 터키공화국 역사상 두 번째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또다시 의정이 중단되었다.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참모총장을 비롯한 5인의 군인으로 구성된 국가안보회의(Millî Güvenlik Konseyi, MGK)가 다수당제에 의한 양원제 입법부를 가진 민주공화국을 일시에 장악했다. 이들은 근 10년 동안 심해져가는 정치적 폭력, 경제의 후퇴, 폭력적 노동쟁의, 무능한 연립내각 등으로 인해 혼란하고 피폐해진 국가를 구하고 민주정치의 기초를 재확립하겠다고 선언하며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을 해산시켰다. 대학 역시 엄격하게 통제하여, 많은 교수들이 해직당했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테러단체가 소탕당했다. 그리하여 케난 에브렌 사령관을 필두로 한 고위급 장성들로 구성된 국가안보회의가 잠정해산된 의회의 입법 기능을 접수하였다. (서재만, 2006: 145; Davidson, 1998: 220-21)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군부 엘리트는 터키의 모든 영역에서 급격한 변화를 야기했다. 데미렐이 추진하던 경제 정책만이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을 뿐이었다. 1982년 11월 국민투표에서 90%의 지지로 제정된 헌법은 대통령제는 아니었지만 1961년 헌법보다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 같은 날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에브렌 장군이 70년대 일관되게 표출된 행정부의 무기력과 국가의 혼란에 강력한 통치권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회 소집권, 법률공포권, 법률안 재심 청구권,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부의권, 위헌적 요소를 가진 법령, 행정명령, 국회 내규 등의 폐기를 위한 헌법재판소 제소권, 재총선 요구권, 수상 임면권, 각료임면권, 각료회의 주재권, 외교관의 파견과 외교사절 접수권, 국제조약 비준과 공포권, 국군통수권, 군 동원권, 총사령관 임명권, 국가안보회의 소집과 주재권, 계엄선포권, 행정명령 발동권, 법령 서명권, 특별사면권, 국가감시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의 임명, 국가감사위원회의 감사 지시, 고등교육위원회(Yükseköğretim Kurulu, YÖK) 임명권, 대학 총장 임명권 등 행정, 사법, 입법 전 분야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입법부 우위 성향은 많이 퇴색되었다. 몇몇 학자는 9월 12일 군부 정권이 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를 주변부로 밀어냈다고 규정했다. 군부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킨다는 미명 아래에 사회에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국가 통제주의를 강요하려 했다. (서재만, 2006: 145-46; Kutay, 2016: 20; Burak, 2011: 151-52)

1983년에 이루어진 총선에는 3개의 정당만이 참가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군부의 뜻과는 달리 이 선거의 승자는 모국당(Anavatan Partisi, ANAP)의 당수, 투르구트 외잘(Turgut Özal)이었다. 모국당은 유권자 45%의 지지를 받아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어진 1987년의 총선에서도 모국당은 36%의 지지를 받아 의회 의석의 65%를 차지하였고, (1986년의 국민투표를 통해 정치 복귀를 허락받은) 데미렐이 이끄는 정도당(Doğru Yol Partisi, DYP)은 19.5%의 지지율로 국회의석 13%를 차지했다. 이스메트 이뇌뉘의 아들 에르달 이뇌뉘(Erdal İnönü)가 이끄는 좌익계 사회민주당(Sosyal Demokrasi Partisi, SODEP)은 25%의 지지로 국회의석 13%를 차지하였다. (Davidson, 1998: 221-22)

외잘 정권(외잘은 89년까지는 총리로 재직했고, 93년까지는 대통령으로 재직했다)은 과거 20년간 이어진 수입대체 정책에서 벗어나 수출주도 성장 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사실, 정책 전환은 1980년, 쉴레이만 데미렐이 처음 제시한 것이었고, 외잘은 이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같은 정책의 목표는 단기적으로는 국제수지 균형을 확보하고 인플레이션율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시장 중심 경제 체제와 수출 지향 경제 체제의 건설이었다. 비록 경제 정책과 구조의 문제로 인플레는 여전히 극심했지만, 1987년까지 5년 동안 평균 경제 성장률은 5 ~ 6% 수준에 이르는 등 터키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Davidson, 1998: 223-24; Pamuk, 2008: 286-89)

이 같은 성과에 용기를 얻은 외잘은 1982년 헌법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91년, 터키군의 참모총장 추천을 거부하고 네지프 토룸타이(Necip Torumtay)를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외잘의 강력한 지위는 걸프 위기에서 드러났다. 이 시기에 외잘은 거의 전적으로 군부에게서 독립된 정책을 수행했다. 외잘 정권을 거치며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외잘은 정당 사이의 경쟁보다는 ‘효율적인 거버넌스(effective governance)’를 강조하는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갔다. 외잘이 보기에 우익이라 해서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군부와의 연합할 수는 없었다. 이념은 다르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같다는 점에서 좌익이 군부보다 나아보였다. 모국당의 뒤를 이은 정도당과 사회민주인민당(Sosyaldemokrat Halk Partisi, SHP: 에르달 이뇌뉘의 사회민주당이 이름만 바꾼 것) 연정은 민군관계에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Burak, 2011: 152; Cizre, 2008: 317;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토룸타이는 걸프 전쟁기에 외잘의 정책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Kutay, 2016: 19-20)

그러나 1995년의 총선에서 복지당(Refah Partisi, RP)이 승리를 거두며 민군 동맹 정권은 끝이 났다. 1990년대 중반의 두 가지 요인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첫번째는 외잘의 정권 덕에 이루어진 정치적 이슬람의 성장이었다. 외잘 대통령의 경제 자유화 정책의 여파로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과 정치적 부패 및 경제적 무능력에 진절머리가 난 서민들의 지지 덕에 이슬람주의자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두번째 요인은 쿠르드 분리주의 운동의 성장이었다. 외잘은 쿠르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대했었다. 경제 성장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된 일과 맞물려, 중도우익 정당을 지지하던 전통적인 유권자는 갈라졌다. 총선에서 승리한 복지당은 정도당과 연합으로 정권[일명 복지길 연정(Refahyol)]을 창출했다. (이은정, 2016: 231-32; 김대성, 2008: 4-5; Kutay, 2016: 20; Burak, 2011: 152)

정도당의 승리에 몇몇 좌익, 리버럴, 그리고 이슬람주의자를 제외한 사회 각계 각층에서 반발이 일었다. 이들은 복지당이 민주주의와 세속주의에 가장 우선하리라 믿지 않았다. 이에 호응한 군부는 국가안정보장회의를 소집해 1997년, ‘2월 28일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군부는 이슬람으로의 ‘반동(irtica)’에 반대한다며, 정치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공공 영역에서 이슬람적 요소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다. 이 경고가 복지당을 겨냥한 것임을 안 네즈메틴 에르바칸(Necmettin Erbakan) 총리는 6월 18일 사임했다. 헌법재판소는 복지당의 정강과 활동이 헌법의 세속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검찰의 기소를 받아들여 1998년 1월 16일에 복지당을 위헌정당으로 판결했다. 당수인 에르바칸을 비롯한 핵심 정치인들의 활동은 금지되었고, 복지당은 해산되었다. 군부 엘리트는 다시 한번 국가의 조타수를 잡는 것 같았다. (김대성, 2008: 5-6; Kutay, 2016: 20; Burak, 2011: 152-54)

그러나 군부의 영향력은 이제 예전같지 않았다. 정도당의 탄수 칠레르(Tansu Çiller) 당시 외무장관 겸 부총리는 군부가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입장에서, ‘인민의 의지’에 따라 군부에 맞서겠다며 입장을 180도 바꾸었다. 어느 시점에선가 관료계 내에는 칠레르에게 충성하는 문민 파당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제 문민관료들은 군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Cizre, 2008: 310-13)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이슬람 사이의 관계가 변한 것이었다. 이전에 터키 공화국과 이슬람은 타협, 협상, 화해가 가능했다. 제말 카라카쉬(Cemal Karakaş)에 따르면, 케말주의자들은 ‘반동적인’ 이슬람 대신에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이슬람을 양성함으로써 공화주의와 터키 민족주의에 조응하는 국가 종교, ‘케말주의 이슬람(Kemalist Islam)’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러한 혁신을 ‘이슬람 종교개혁(Islamic Reformation)’이라고 명명하며, 국가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모든 종교 관련 문제를 감독하는 독특한 국가기구(Diyanet)를 창설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즉, 아타튀르크의 근대국가 수립은 ‘터키적인 정체성’을 근간으로 국가 주도의 종교적 단일성(즉, 수니 이슬람)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케말주의 터키가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나, 사실상 수니 이슬람을 국가 종교의 지위로 격상시킴으로써 종교적 중립이라는 의무를 방기하는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Karakaş, 2007: 8-12)

그러나 2.28 선언 이후 터키의 세속주의 엘리트는 이슬람과 제로섬 게임에 빠져들었다. 현상 유지(status quo)는 바라기 힘든 사치가 되었다. 이제 아래로부터 꾸준히 성장해 온 이슬람주의자들은 세속주의를 지향하던 터키 기득권층에 심각하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 사회학자 무자히트 빌리지(Mucahit Bilici)가 친이슬람 언론매체 《신새벽(Yeni Şafak)》에 기고한 글에서 펼친 주장은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터키의 전쟁은 발칸 출신과 아나돌루 출신 사이의 싸움이다. 문화적으로 두 개의 사회의 전쟁인 것이다. 그 하나는 종족적으로 튀르크가 아니나 튀르크성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종족적으로 튀르크이나, 앞의 이들이 주장하는 튀르크성을 강요받는 이들이다. 서쪽에서 온 이들은 세속주의적인 이주민(göçmen)이다. 아나돌루인들은 종교적인 토착민이다…. 한쪽에서는 ‘세속적인 공화국’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쪽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한쪽은 서구화란 미명 아래 식민주의를 내면화하고 권위주의로 다수를 억압한다. 다른 한쪽은 제3세계 국가의 ‘자유와 독립성’에 대해 투쟁한다. 한쪽은 인민없는 공화국을,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 공화국을 원한다….(Türkiye’deki mücadele Balkanlar ile Anadolu arasındaki mücadeledir. Kültürel olarak tanımlanmış iki sınıf koalisyonunun mücadelesidir. Bir tarafta etnik olarak Türk olmadıkları halde Türklüğü benimseyip genelleştirenler, diğer tarafta etnik olarak Türk oldukları halde üzerlerine özel tanımlanmış bir Türklük empoze edilenler var. Bir tarafta Batılılar, sözümona laikler ve göçmenler var, diğer tarafta Anadolulular, dindarlar ve yerliler var…. Bir tarafta “laik cumhuriyet” söylemi, diğer tarafta ise “gerçek demokrasi” isteği var. Bir tarafta Batılılaşma adı altında sömürgeleşmeyi içsellestirmiş ve bunu çoğunluğa otoriterlik ile benimsetmeye çalışanlar, diğer tarafta Ücüncü Dünya ülkelerinin bir zamanlar verdiği türden “özgürlük ve bağımsızlık” mücadelesi verenler var….)” 이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서구화되고 세련된 도시민인 ‘하얀 튀르크인(Beyaz Türkler)’과 아나돌루 출신의 촌스러운 무리로 표상되던 ‘검은 튀르크인(Zenci Türkler)’을 구분하던 담론을 전도시켰다. 오히려 세속화된 도시 출신의 기득권층을 ‘이방인’으로 표현했다. 무스타파 케말 역시 발칸 출신임을 감안하면 이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이은정, 2016: 2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