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울루스2 몽원 제국과 북중국의 몰락 들어가며 초기 몽골 제국의 정복에 대해서는 ‘초원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많다. 특히 북중국의 쇠퇴에 대한 서술은 더더욱 그렇다. 요수[姚燧]의 《목암집》[牧庵集]에 따르면, “금의 정우 연간(1213년 ~ 1216년)부터 하삭[河朔] 지방은 20년 동안 교전 상태가 지속되었고, 주민 10 중 7은 도망자였다.” (愛宕松南 , 2013: 86에서 재인용) 이런 상은 몽골이 북중국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평원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야율초재 열전에 따르면, 칭기스 칸[太祖]의 치세 중에는 서역 정벌에 몰두해서 중원을 다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한지[漢地]의 관리는 거의 모두 민으로부터 취렴하여 사복을 채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재산은 엄청난 숫자를 .. 2019. 7. 24. 칭기스조 제자 울루스 부족 구성 몽골 제국이 이전의 유목 제국들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동화력이라 생각한다. 탕구트(서하), 키타이(거란), 알란, 킵차크 등 본래 몽골과 구분되던 다양한 기원을 지녔던 종족들은, 몽골 제국 이후 칭기스조의 지배를 받는 부족들로 변화했다. 《원사元史》에 소개된 칭기스 칸의 발언에도 이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난다. 거란의 수령이던 야율류가(耶律留哥)가 죽었을때 그의 미망인(후처[後妻])이 칭기스 칸을 찾아가 칭기스칸을 시위(侍衛)해오던 전처(前妻) 소생의 설도(薛闍)로 하여금 아버지의 자리를 잇게 하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대신 시위의 일을 맡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칭기스 칸은 “설도는 이미 몽골인이 되었다. 그는 짐을 따라 서역에 원정하였다”라고 하면서 후처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직책.. 2019. 5. 24.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