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jnendaele, Jeroen WP (2018). “‘Dagli altari alla polvere.’ Alaric, Constantine III, and the downfall of Stilicho.” Journal of Ancient History 6.2: 260-277.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방기한 결과 알프스 이북을 상실했고, 이것이 스틸리코의 죽음을 야기했다는 종래의 설에 반박하는 논문이다.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콘스탄티누스 3세의 위협은 과장되었다.
- 스틸리코는 일리리쿰 동부를 합병할 생각이 없었다.
- 스틸리코는 이미 콘스탄티누스를 격파할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 이 시기 알라리크의 역할을 잘못 이해되고 있다.
1.
반역향 브리튼
브리튼 섬은 4세기 들어 서로마 궁정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콘스탄스 1세가 343년 초에 브리튼 섬을 방문한 이래, 그 어떤 황제도 발을 딛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즉, 브리튼의 지역 엘리트 층은 4세기 후반 들어 제국의 수혜를 입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브리튼 섬에 주둔한 로마 군대는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고, 당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은 브리튼 섬을 ‘반역향Britannia fertilis provincia tyrannorum’이라고 까지 일컫었다.
그러나 브리튼 섬의 군세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3세는 407년 봄에 영국 해협을 건넜으나, 알란, 반달, 수에비 군세를 격파하지 못하여 협상에 임했다. 또한 스틸리코의 부관인 사루스의 군대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만약 이때 알레만니와 프랑크 동맹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콘스탄티누스는 파멸했을 것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이베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테오도시우스 가문에 의해 패배했다.
2.
라다가이수스 전쟁 이후의 스틸리코 군대
반면 라다가이수스 전쟁의 승리로 스틸리코의 인적 자원은 콘스탄티누스의 것보다 우월했다. 라다가이수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당시 스틸리코의 군대는 30 누메리numeri였는데, 이는 대략 10,000명에서 15,000명 사이의 군세로 추측된다. 라다가이수스를 격파한 후 스틸리코는 라다가이수스의 정예 12,000명을 흡수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408년 당시 스틸리코의 군세는 25,000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3.
알라리크와 일리리쿰
스틸리코가 라다가이수스 전쟁 이후 일리리쿰을 차지하려 했다는 서술은 잘못으로 보인다. 우선 일리리쿰 자체가 고트 전쟁과 이후의 내전, 알라리크의 정착 등으로 황폐화되어 세금이나 인적 자원을 뽑아내기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술한 바와 같이 라다가이수스 전쟁 이후 그의 군세를 흡수한 스틸리코는, 당장 인적자원이 급하지도 않았다.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의 궁정 사이의 관계 역시 이 시기 나쁘지 않았던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 대신 스틸리코는 일리리쿰 동부에 있던 알라리크의 고트 집단을 불러와 콘스탄티누스 3세에 대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라리크의 군대는 에모나Emona(지금의 류블랴나)에서 라벤나의 스틸리코에 전갈을 보내 군자금을 요청했다. 당시 서방 제국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에 스틸리코는 원로원에 이를 위한 표결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알라리크를 믿지 못했으나, 스틸리코는 표결을 강행했다.
4.
스틸리코의 반격 계획
스틸리코의 계획은 알라리크와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군세를 이용해 콘스탄티누스를 우선 공격하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라이티아를 거쳐 갈리아로 진입해 콘스탄티누스를 공격하려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공격할때, 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를 공격할 때 이와 같은 전략은 큰 성과를 거둔 바가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군세는 이베리아에서 콘스탄티누스 군대를 격파하고 추격하는 와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스틸리코는 제국군으로 일격을 날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스틸리코가 이 틈을 이용해 동방 제국에 개입하려 했다는 조시무스의 기록은 믿기 힘들다. 당시 서방 제국은 이미 그 영토의 절반 가량을 콘스탄티누스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또한 이탈리아 역시 라다가이수스의 침공을 기억하고 있었음으로, 알라리크를 내버려두고 동방으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5.
반 스틸리코 파당의 움직임
스틸리코의 몰락을 계획한 이는 올림피우스였을 것이다. 올림피우스는 스틸리코가 4개 군단(5,000명)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터무니없는 중상이었으나 먹혀들었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3세에 대한 원정을 위해 티키눔Ticinum(지금의 파비아)에 도착했을때, 올림피우스가 주도한 반 스틸리코 파는 거기에 모인 관료와 장군들을 쓸어버렸다.
당시 스틸리코는 티키눔에 있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때 볼로냐에 있던 스틸리코는 거기서 이민족 수령들을 소환했다. 사루스를 비롯한 이민족 수령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 그들은 스틸리코의 훈 근위대를 공격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스틸리코는 각 도시에 파발을 보내 이민족 군대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그 자신은 라벤나로 향했으나, 체포되고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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