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침입으로 인해 이슬람 법 체계는 중대한 발전을 경험했다. 이는 일종의 세속법전이라 할 수 있는 카눈나메ḳānūn-nāme의 등장이다. 칭기스 칸의 자삭ǰasaγ(튀르크어로는 야사yāsā. 문자 그대로 ‘법’을 의미)와 그것에 대한 신성시는 왕조의 법이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관념을 이슬람 세계에 확산시켰다. 군주의 독립적인 입법권ʿurf에 기초하여 재정된 성문법 카눈은 대개 샤리아가 다루지 않거나 시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법 조항들을 마련했다.(이은정, 2013: 203) 몽골 제국이 무너진 후 생겨난 많은 튀르크몽골 국가들에서도 자삭에서 영감을 얻은 실정법들이 야삭yasaḳ 또는 카눈ḳānūn이란 이름으로, 또 이를 모은 법전이 야삭나메yasaḳ-nāme 또는 카눈나메란 이름으로 형성되었다.(İnalcık, 1997: 562)
강간과 별도로 성교를 위한 소년, 소아 그리고 여성의 납치를 범죄로 규정한 것 역시 샤리아에 의거한 것이 아닌 카눈에 의거한 것이었다. 둘카드르조Dulqadırlı(아랍어: Dhūl-Qādiriyya)와 오스만조의 카눈나메에서 납치는 범죄로 규정되었다. 둘카드르조의 군주 알라 알다울라ʿAlāʾ al-Dawla(1515년 사망)가 제정한 카눈나메에서 납치혼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는 둘카드르조 영토에서 부족간 약탈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하튼, 둘카드르조에서는 납치자 개인에 대한 벌금 규정(진짜납치혼이냐 가짜납치혼이냐에 따라 20개에서 30개 사이의 금화)이 존재했고, 부족 약탈에 동참한 이들에 대한 처벌 조항도 존재했다. 처벌 사례들로 반추해볼때, 약탈대의 각 구성원들은 각각 8개에서 15개 사이의 금화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했으며, 이와 별개로 약탈 과정에서 부상입은 이들에 대한 보상금 또한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국가의 바예지드 2세Bāyezīd II(재위: 1481년 ~ 1512년)와 셀림 1세Selīm I(재위: 1512년 ~ 1520년)의 카눈나메에서는 소년, 소녀 그리고 여성을 납치한 남성에 거세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규정했다. (Semerdjian,2009; Ergene, 2011)
1850년부터 1858년까지 제정된 근대 오스만 법전에서 납치혼은 범죄로 규정되었다. 1858년법에서 소년 납치에 대해서는 3개월에서 1년 사이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피납치자가 소녀인 경우 처벌은 더 가중되어, 3년에서 15년 사이의 노역형에 처해졌다. 만약 피납치자가 미성년 여성이며, 성적으로 학대받은 경우, 강간범은 극형에 처해졌다. 만약 피납치자가 성년 여성인 경우 3개월에서 3년 사이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만약 여성이 기혼자라면 3년에서 15년 사이의 노역형이 선고되었다. 납치에 가담한 사람의 경우 1개월에서 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Ergene, 2011)
이전에 비해 강력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시대에도 여전히 약탈혼은 빈번했다. 특히 농촌이나 동부의 유목민 거주지대에서 그러했는데, 이는 오스만 국가가 유목민 거주지나 농촌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기 때문이다.(Ergen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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