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무라드 2세의 군사교리 개혁

by hanyl 2019. 5. 5.

무라드 2세의 업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르나 전투 등의 승리를 통해 위기를 넘긴 것, 앙카라 전투 이후 오스만 국가의 확장 정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한 것, 메헴메드 2세를 후계자로 둔 것 등. 그러나 나는 그보다 재위 만년에 보여준 군사교리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 사이의 기간에 무라드는 향후 오스만 제국의 고전기를 지탱할 중요한 개혁을 실시했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군대는 전형적인 튀르크·몽골식 군대였다. 당시 오스만이 동원할 수 있는 총 군대는 약 64,000명이었다. 약 30,000명이 시파히 지방군이었고, 카프쿨루 상비군이 약 10,000명, 아잡 등 징집병이 약 24,000명이었다. 즉, 기병대의 비율이 높고, 지방군과 징집병이 많기 때문에 동원하는데도 오래 걸렸으며, 전쟁에 나설 수 있는 계절이 한정되어 있었다.(Jefferson, 2012: 181-99)

후냐디는 오스만 군대가 가진 전략·전술 상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헝가리 군대는 1441년과 1442년에 오스만의 트란실바니아 공세를 격파했고, 1443년에는 다뉴브 이남으로 공세를 취했다. 1444년, 카라만 공국이 동쪽에서 오스만 세력을 공격하자, 무라드는 에디르네에서 후냐디와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은 세르비아 왕실을 다시 세워주었고, 헝가리는 그 대가로 다뉴브 이남으로 진군하지 않았다. 무라드는 카라만과도 비슷한 협정을 맺어, 영토를 일부 할양하고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 해에 재개된 십자군에서, 바르나 전투는 후냐디가 오스만 군대의 전술상 약점을 정확히 찔렀던 경우이다. 헝가리·폴란드·왈라키아를 주력으로 한 연합군은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에서 무라드 2세가 직접 이끄는 오스만 군대와 격돌했다. 오스만 군대는 공세를 펼쳤으나 바겐부르크의 벽을 뚫지 못했다. 오스만 군대의 양익을 담당한 경기병은 바겐부르크에 틀어박힌 기독교 군대에 패주했다. 전장에 남겨진 오스만 중군은 궤멸당할 것처럼 보였다. 만약 브와디스와프 3세가 돌격의 와중에 예니체리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Uyar and Erickson, 2009: 29; Jefferson, 2012: 460-81)

도판 1: 후스파의 바겐부르크

그러나 후냐디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파커Geoffrey Parker의 표현을 빌자면, 오스만인들은 “서구의 기술을 놀라우리만치 빠르고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더 대단한 동원력을 이용해 서구를 제쳐버렸다.” (Parker, 1996: 126) 고작 4년 뒤에 일어난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바르나 십자군과 똑같은 전술을 펼폈다. 해자를 파고 바겐부르크 뒤에 틀어박혔다. 첫째날과 둘째날에는 양군 모두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둘째 날에 후냐디는 오스만의 좌익에 공세를 집중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셋째 날이었다. 오스만 양익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날의 피해로 인해 전열을 고치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유인책이었다고도 하나, 어느쪽도 분명하지 않다. 어쨋든, 후냐디는 즉각 반응했다. 돌출된 중군에 집중 공격을 가했으나, 오스만의 바겐부르크는 단단했다. 그 순간, 퇴각했던 오스만 양익의 기병대가 돌아왔다. 왈라키아 군대는 즉시 오스만 군에 항복했고, 후냐디의 군대는 참패했다. (Uyar and Erickson, 2009: 29-30)

요컨데, 무라드는 바르나 전투에서 바겐부르크wagenburg의 유용성을 확인하고 곧장 오스만 군대에 적용하여 4년 뒤에는 똑같은 전술로 반격했다. 오스만인들은 이를 타부르 전술Tabur jangi(현대 터키어: Tabur cengi; 헝가리어 Tabor → Tabor)이라 불렀다. 이 전술은 17세기까지 오스만 군사교리의 핵심이었고, 찰드란 전투와 모하치 전투 등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크게 공헌했다. 뿐만 아니라 사파비 제국이나 무굴 제국에서도 오스만 장교를 통해 이 전술을 도입하였고, 각각 잠 전투와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Streusand, 2011: 87-88)

도판2: 케레스테스 전투를 묘사한 세밀화. 타부르 전술이 마지막으로 효과적으로 활용된 전투였다.

참고문헌

  • Jefferson, John (2012). The holy wars of King Wladislas and Sultan Murad: the Ottoman-Christian conflict from 1438-1444. Brill.
  • Parker, Geoffrey (1996). The military revolution: Military innovation and the rise of the West, 1500-18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 Uyar, Mesut and Edward J. Erickson (2009). A Military History of the Ottomans: From Osman to Atatürk. ABC-CLIO.
  • Streusand, Douglas E. (2011). Islamic Gunpowder Empires: Ottomans, Safavids, and Mughals. Westview Press.

도판 출처

도판1: 후스파의 바겐부르크

도판2: 케레스테스 전투를 묘사한 세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