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는 바그다드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칼리파 제국의 핵심이었다. 압바스 국가(즉, 고대 후기부터 중세까지 아랍 제국)의 힘은 사와드 지대가 제공한 막대한 부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와드 즉, 흑토黑土 지대는 바그다드 남쪽에서 바다까지 뻗은 광활한 경작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과 그 지류들, 그리고 운하에 의해 물을 공급받았다. 바로 이 경작지에서 수확되던 농산물에서 부가 창출되었고, 풍족한 생산량은 세심한 농경과 온화한 기후에 의지한 바였다. 이 같은 번영의 핵심에는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정교한 수로시설은 지속적인 관리가 반드시 뒤따라야했다. 운하 내부에 토사가 너무 많이 쌓일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운하를 만들어야 했다. 수로 인근 저수지의 물이 증발되도록 내버려둔다면, 토지 염화를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개간은 상시적이고 정교한 노동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서는 조직화와 안정이 필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통치자들은 이를 위해 신민들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 애를 썼다. 정치적 불안정성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만약 정부가 혼란에 빠지거나, 지주가 영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면 쇠락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Kennedy, 2016: 18-19)
압바스조 붕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시작된다. 사와드Sawad 지역에서 토지의 침식과 염화로 인해 생산성이 급감했다. 사산조 시기 절정에 달했던 이라크 지역의 농업세는 아랍 정복 이후 감소하기 시작했다. 우마이야조 시기는 농업세 수익은 안정된 수준을 유지했다. 압바스 혁명 이후 첫 반세기 동안 농업세 수익은 서서히 감소했다. (Campopiano, 2012: 5-10; Waines, 1977) 이는 압바스 제국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팁 알바그다디는 이렇게 묘사했다. “건물과 주민들은 하룬 알라시드의 시대에 가장 많았다…. 그리고는 반란들이 일어나고, 주민들에게 쉴 새 없이 재난이 닥쳤고, 번영하던 상태가 매우 심하게 황폐화되었다. 우리 시대 이전과 우리보다 앞선 세기에 바그다드가 겪은 혼란과 쇠락 때문에 이제는 모든 수도들의 정반대이며 사람이 사는 모든 땅들과 반대의 상태가 되어버렸다.”(Wiet, 1971: 118-19) 더 심각한 문제는 농업 생산력의 감퇴가 사와드 너머로 확대되기 시작한 점이다. 마셜 호지슨이 건조 지대Arid Zone이라 명명한 지역 전체가, 이 시대 들어 더 건조해졌다. (Streusand, 2011: 17-19)
사와드 지역에서 시작된 농업의 쇠퇴는 중동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뒤바꿨다. 이집트를 제외하면, 중앙 정부가 농업세를 직접 거두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재정상의 분권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정치적 분권화도 곧 따라왔다. 재정적 분권화는 곧 군인의 봉급, 특히 장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대신 토지 세입을 거둘 권리를 주는 제도의 도입이었다. 이러한 형태는 정부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아야 했으나, 실질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이크타iqta라 불리는, 서양의 봉건제와 겉으로는 비슷한 이 제도는, 이러한 소유가 일시적이고 회수 가능하며,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었으나, 곧 이러한 특성은 유명무실 해졌다. 토지의 세금 수취권을 봉급 대신 군인에게 지불한 것은, 토지와 군대, 양자 모두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정부의 약화는 지방 방위도 어렵게 만들었다. (Streusand, 2011: 17-19)
중앙과 변방의 연계가 느슨해지자 제국은 곧 무너지기 시작했다. 868년과 883년에는 이라크 저지대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923년 바스라가 시아파 반란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930년에는 메카가 공격당해 카바의 ‘검은 돌’이 약탈당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920년부터 960년 사이에 들이닥친, 이례적으로 혹독한 겨울로 인한 식량 부족 사태는 이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이로 인해 부와이흐 왕조가 칼리프 국가의 핵심 영토인 이란과 이라크에서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칼리프는 명목상의 우두머리로 남겨졌다. 이집트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하여, 아예 압바스 칼리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파티마조 칼리프 체제가 들어섰다. 969년의 나일강 유역은 기록적인 흉년을 경험했고, 이를 계기로 이집트 전역에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Frankopan, 2017: 214-16; Chaudhuri, 2002: 180)
11세기가 되면 중동의 건조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농업을 쇠퇴시킨 반면 유목을 촉진시키고 보편화시켰다. 점점 더 많은 땅이 목초지로 변해갔다. 목초지의 확대는 중앙아시아 유목민 집단이 동부 이슬람 세계의 권좌를 차지하게 했다. (Streusand, 2011: 17-19) 셀주크조는 이 흐름을 탄 최초의 튀르크계 왕조이다. 11세기 초에 이 투르크만 집단의 지도자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인지 얼마 안된 상황이었는데, 이란에서 시작해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마지막으로 시리아를 정복했다. 그들은 약 2세기 전 압바시야 국가의 혼란기 이후 전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지위인 술탄으로 책봉되었다. (Durand-Guedy, 2013: 325) 셀주크 제국 이후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등 동부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투르크-몽골 국가의 정치, 군사적 기반은 후라산, 아제르바이잔에 유목하는 부족집단이었다. (Amitai, 2011)
셀주크 제국을 비롯한 중앙유라시아 출신의 유목민 군주들은 이전의 압바시야 군주나 움마이야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농경지의 보수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미 봉건제가 도입되어 국가의 통제력이 약했던 데다가 그 중심지 마저 멀었기에 덧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11세기 말에서 12세기에 걸친 끝 없는 재난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란 동부의 유목민 군주들의 원조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러한 물자 부족 때문에 항상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화폐의 평가절하가 발생했다. 부의 감소와 착취적인 세금징수 체제라는 악조건이 겹쳐, 남아있는 소수 주민들의 생활 환경은 더욱 더 악화되었다. (Abu-Lughod, 2006: 220-21 그리고 225)
표1: 7~10세기 이라크 지역 농업세 수익의 정부 파악량. Campopiano, 2012: 37
표2: 8~10세기 아랍 제국의 세수 변화. Waines, 1977: 286-87
표3: 8~10세기 곡물 가격 변화. Campopiano, 2012: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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