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인도양과 유럽 사이 교역은 압바시야 국가와 당 제국의 번영과 부에 기반하고 있었다. 양 제국은 모두 외국산 사치재에 대한 어마어마한 수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인도양을 통한 교역로의 동쪽 끝은 중국의 광저우였고, 서쪽 끝은 바그다드의 항구도시인 바스라였다. (Pearson, 2011: 322)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무슬림들은 인도양의 상업을 지배하며 해양교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들은 특히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에서 홍해와 페르시아 만을 이용하여 교역했다. 8세기에 이미 아랍과 페르시아인 무슬림들은 중국의 광저우廣州(영어식으로는 Canton)에 거주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했으며, 758년에는 잠시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지배하기까지 했었다. (Morgan and Reid, 2011: 8-11)
유럽과 극동을 잇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북방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콘스탄티누폴리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육상 노선이었다. 중앙 노선은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이어져, 그곳에서 여러 갈래의 육로와 해로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바닷길로, 페르시아 만을 통해 인도양과 이어졌다. 마지막 노선은 남방 노성으로, 이집트와 홍해를 통해 인도양으로 이어졌다. (Abu-Lughod, 2006: 163-77)
특히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만들어냈던 것은 이라크와 이집트 문명의 대 통합이었다. 제국의 중심이 이라크와 아랍 반도에 머무르는 한, 중앙 노선과 남방 노선은 동등하게 기능했다. 이슬람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페르시아 만과 홍해는 경쟁하는 노선이 아니라 같은 바다의 두 팔이 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프 국가의 수도가 다마스쿠스로, 압바시야 칼리프 국가의 수도가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이러한 이동은 교역로에 중력과 같이 작용하여, 홍해가 보조적인 지류로 격하되고 페르시아 만의 교역로가 주류가 되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의 선원들이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에 이르는 동방과의 원거리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Abu-Lughod, 2006: 227-228, 241)
페르시아 만의 전략적 위치는 장기적으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지리적 여건이었다. 페르시아 만은 인도 아대륙을 중동 심장부와 여러 좋은 육로들(유프라테스 강의 연장선을 따라 알레포까지 가서 해안에 위치한 안티오크로 가거나, 비교적 좁은 사막 지역을 거쳐 다마스쿠스와 그 너머의 지중해로 가거나)을 통해서 지중해로 항해 가능한 항로였다. (Abu-Lughod, 2006: 238-40) 중국과 유럽을 잇는 다른 길들은 이에 비해 지리적 입지가 부족했다. 홍해를 통과해서 인도로 가는 길은 페르시아 만에서 나가는 길보다 훨씬 더 항해하기 어려웠다. (Abu-Lughod, 2006: 274) 유럽과 극동 사이의 세 노선 가운데 페르시아 만을 통과하는 신드바드의 “중앙 노선”은 가장 쉽고 비용도 가장 적게 드는 길이었다. 레반트와 바그다드를 통과하는 이 중앙 노선이 제 기능을 했을 때에는 다른 모든 대안들보다 우선시되었다. (Abu-Lughod, 2006: 213)
그러나, 8세기부터 10세기의 기간을 거치며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 카이로 사이의 삼각지대의 정치적 통합이 무너지자, 통합된 교역로도 나누어 지며 바그다드의 상업적 중요성이 급감했다. (Morgan and Reid, 2011: 13-16) 우선 이란이 메소포타미아를 압도하자, 본래 바스라를 통해 바그다드와 안디오히아를 통해 지중해로 유통되던 인도산 물품들이 이란으로 향해갔다. 이 교역로의 서쪽 기점이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동쪽으로 움직인 일은 이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압바스조의 전성기 시절에는 바스라에 있었던 교역중심지는, 시라프Sīrāf, 줄파르Julfar를 거쳐 호르무즈Hormuz로 변화했다. 이는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온 인도산 상품의 상당 부분이 바그다드가 아닌 타브리즈로 운송되어 북쪽의 아르메니아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Pearson, 2011: 322)
이와 같은 흐름은 13세기 말 동방의 상품들을 유럽에 판매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의 근거지 십자군 국가가 마지막으로 멸망하자 더 가속화되었다. 콘스탄디누폴리에서 육상으로 가는 노선이나 해로로 이집트에 가서 그 후 홍해를 지나 수로로 이동하는 남방 노선이 더 중요해졌다. (Abu-Lughod, 2006: 224-26) 메르브, 라이, 바그다드를 번영하게 했던 육로는 해운으로 대체되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10세기 말 이후 상선들은 밤낮으로 드나들며 이집트의 항구와 콘스탄디누폴리를 오갔다. (Frankopan, 2017: 217)
지도1: 737년의 유라시아 교역망. Abu-Lughod, 2006: 164
지도2: 1212년의 유라시아 교역망. Abu-Lughod, 2006: 165
지도3: 1478년의 유라시아 교역망. Abu-Lughod, 2006: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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