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년, 칭기스 칸의 손자 훌레구는 대칸 뭉케에게서 서아시아 정벌을 명받아 몽골고원을 떠났다. 그의 군대는 1257년 몽골 제국의 이란 통치 중심지인 하마단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바그다드의 압바스조에 서신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 이에 칼리프 알무타심은 압바시야 국가가 심판의 날까지 영원할 것이며, 만약 몽골군이 이를 공격한다면 동과 서의 무슬림 전체가 들고 일어서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훌레구는 후라산으로 퇴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조롱했다.
이에 훌레구는 공격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좌익은 루리스탄을 경유해 후지스탄을 공략하게끔하고, 우익은 이르빌을 거쳐 아제르바이잔을 공략하게끔 명령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중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직접 나아갔다. 또한 이미 소아시아 방면에 파견된 군대에게 명하여 서쪽에서 바그다드로 들이칠 것을 명령했다. 훌레구의 진군 소식을 들은 칼리프 정권은 혼란에 빠졌다. 재상 이븐 알알카미는 몽골의 우세를 직시하고 훌레구에 항복하자고 주장했으나, 반대파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1258년 1월 훌레구는 바그다드에 공격을 감행했고, 2월에는 결국 이를 함락시켰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훌레구는 칼리프와 압바스조 구성원 대부분을 처형했고,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약탈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학문과 문학, 예술의 세계적 중심지였던 바그다드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훌레구 그 자신도 후일 프랑스와의 교섭에서 20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죽음을 면치 못했고, 귀중한 장서와 문화 시설물들이 불에 탔다. (더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Faruque, 1988; 김능우, 2008 참조)
그러나 참상에 대한 기록이 얼마나 신뢰 가능한 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바그다드에서는 몽골에 의해 정복된 그 해에 정복자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했다. (Waugh, 2017: 16) 마르코 폴로 역시 바그다드의 함락에서 불과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그다드를 크고 번영하는 도시로 묘사했다. (Abu-Lughod, 2006: 423) 이후의 남겨진 기록을 감안하여도, 바그다드는 몽골 치하에서 번영했다. 문화와 학술 분야에서 확인되는 바 역시 훌레구 울루스 치하 바그다드의 번영을 확인해주고 있다. (Biran, 2016: 5-6)
미할 비란은 바그다드 함락의 목격자들이 남긴 기록을 검토하여 실제 몽골군의 학살과 파괴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놓았다. 그에 따르면 파괴의 총량은 종래의 상보다 훨씬 덜 한 것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몸값을 지불하거나, 그 재능을 인정받아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라 몽골 치하 바그다드는 빠르게 복구되고 번영을 되찾았다. 이러한 점은 몽골인 정복자들의 이슬람 개종과 함께 학살의 기억을 정당화하고, 학살의 기억을 오히려 잊혀지게끔 하였다. 학살과 파괴를 이슬람 세계의 몰락과 연관 지어 설명한 것은, 훌레구 울루스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각은 19세기 민족주의의 광풍과 함께 대중화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일반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Biran, 2018)
그림: “훌레구와 그의 군대.” 사이프 알바히디 작, 1430년대, 헤라트.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Département des Manuscrits. Division orientale. Supplément persan 1113, fol.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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