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이후 세속화(서구화)의 일환으로 언어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현대 터키 튀르크어(Türkiye Türkçesi; 이하 터키 튀르크어)와 오스만 튀르크어는 문자부터 문법까지 모든 면이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사실과 다르다. 우선, 오스만어(Osmanlıca)와 오스만 시대의 튀르크어(Osmanlı Türkçesi; 이하 오스만 튀르크어)는 크게 다른 언어였다. 또한 언어개혁이라고 크게 하나로 부를 수 있지만, 실제로 아타튀르크의 개혁에서 언어개혁과 문자개혁은 별개로 이루어졌다.
오스만인들이 오스만어라 부른 언어는 튀르크어, 아랍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혼합이었다. 이 언어는 행정과 문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아마 일반 민중은 관공서에서나 접할 수 있었으나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상황은 그림자극 카라괴즈(Karagöz: 터키의 전통 그림자극이자 그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잘 묘사된다. 《그네(Salıncak)》에서 카라괴즈는 하지바트(Hacivat)를 때린다. 하지바트는 오스만어로 이유를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카라괴즈는 오스만 튀르크어로 답을 하기 때문이다.
Q: “Vurmanızdan aksâ-yi murâd?(나를 때리는 이유가 뭐요?)”
A: “Aksaray’da murtad babandır.(아크사라이에 있는 코트는 당신 아버지의 것이요)”
시인이자 사회학자, 지야 괵알프(Ziya Gökalp; 1876년 ~ 1924년)의 글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괵알프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도, 새로운 터키어는 이스탄불의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 하지만 그 시절 계몽된 이들(aydınlar)이 사용하는 (터키)튀르크어에는 옛 문어의 영향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이를 대부분의 사람들(halk)은 거의 이해를 못했다. 민중들은 이를 이스틸라히(istillâhi) 구어라고들 불렀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관리자 양반이 비서한테 뭔가 말한 모양인데,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어. 이스틸라히로 이야기하고 있더라구.”
이런 면을 알고 나면, 터키 공화국의 언어개혁을 문자개혁과 별개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아타튀르크의 언어개혁(dil devrimi)은 문학과 행정 분야에서 사용되던 오스만어를 오스만 튀르크어(즉, 터키 튀르크어)로 대체하는 것이 목표였다. 문자개혁(harf devrimi)은 문어 생활에서 아랍-페르시아 문자를 라틴 알파벳으로 대체하는 것이 목표였다.
참고문헌
Lewis, Geoffrey (1999). The Turkish Language Reform: A Catastrophic Success. Oxford University Press.
사진: 카이세리 시민들에게 새로운 터키어 표기문자를 소개하는 아타튀르크. 1928년 9월 20일.사진: Atatürk Özel Fotoğraf Gale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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