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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알리 케말, 보리스 존슨의 터키인 증조부

by hanyl 2019. 7. 25.

최근 보리스 존슨이 새로이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이는 터키에서도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는데, 터키계 혈통 때문이다. 존슨 총리의 증조부는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내무장관을 지낸 알리 케말이다. 알리 케말은 언론인으로 경력을 시작해 입각하여 위태로운 조국의 조타수로 나선 그의 경력이 보리스 존슨과 겹치기 때문인지 보리스 존슨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경력을 겹쳐보는 것 같다. 어쨋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알리 케말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그림1. 중년의 알리 케말

알리 케말(ʿAlī Kemāl, 현대 터키어로는 Ali Kemal; 1867년 ~ 1922년)은 오스만 제국의 언론인, 작가 그리고 정치인이다.

알리 케말의 아버지, 하지 아흐메드 에펜디(Ḥājjī Aḥmed Efendi)는 아나톨리아 중부의 찬크르[Çankırı: 금발이 특히 많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출신으로, 젊은 시절 오스만 제국의 수도 쿠스탄티니야[Ḳusṭanṭīniyya 또는 쿤스탄티니야(Ḳunsṭanṭīniyya):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아랍어식 표기로, 지금의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 당대의 공문서에서 이렇게 불렸다)로 이주하여 왁스 제조업자로 취업하였고, 길드의 장까지 올랐다. 알리 케말은 1867년에 쿠스탄티니야의 쉴레이마니예(Süleymāniye) 구에서 하지 아흐메드 에펜디와 체르케스계였던 그의 둘째 아내 사이에서 알리 리다[ʿAlī Riḍā, 현대 터키어로는 알리 르자(Ali Rızâ)]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하지 아프메드는 성실하고 신실한 인물로 명성이 높았고, 그런 만큼 알리 리다의 가정환경 역시 보수적인 무슬림 가정이었을 것이다. (Uzun, 1989; İz, 1997: 871)

알리 리다는 쉴레이마니예 구의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뒤, 캅탄파샤 중등학교(Kaptanpasha Mekteb-i Rüshdiyye, 현대 터키어로는 Kaptanpaşa Rüşdiyesi)에 입학했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진행된 오스만-러시아 전쟁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알리 리다는 그 이듬해에 귈하네 군사고등학교(Gülkhāne Rüshdiyye-i ʿAskeriyyesi, 현대 터키어로는 Gülhane Askerî Rüşdiyesi)로 적을 옮겼으나, 1881년에 불량한 행실이란 사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알리 리다는 쉴레이마니예 자미에서 수학하다가, 1882년에 이웃으로 알고 지내던 정부관리, 아흐메드 이제트 베이(Ahmed ʿIzzet Bey)의 추천과 어머니의 강요에 따라 정치과학학교(Mekteb-i Mülkiye)에 입학한다. (Uzun, 1989)

정치과학학교에서 알리 리다는 아흐메드 미드하트 에펜디(Aḥmed Midḥat Efendi)와 무알림 나지(Muʿallim Nājī, 현대 터키어로는 Muallim Nâci)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더 중요한 변화는, 미잔지 메흐메드 무라드(Mīzānji Meḥmed Murād)의 아래에서 수학한 일이다. 미잔지 메흐메드 무라드는 하미드 시대에 가장 유명한 이상주의자로, 나중에는 청년튀르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알리 리다 역시 미잔지 무라드의 수업을 가장 즐겼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 시기 알리 리다는 학생잡지인 《귈셴》(Gülshen, 현대 터키어로는 Gülşen)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사용한 필명이 바로 알리 케말이었다. 하지만 차츰 이 필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기 시작했다. (İz, 1997: 871)

군사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알리 케말은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1886년에 유럽으로 향했고, 파리와 제네바에서 1년여 가량을 보냈다. 아버지인 하지 아흐메드가 1888년에 죽자, 알리 케말은 유럽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당시 만나던 러시아 출신의 여자, 로젠쉴드(Rozenshild)와도 헤어졌다고 한다. Uzun, 1989] 수도로 돌아와 학업을 마무리했다. 유럽의 대학에서 배운대로 그는 학생단체를 구성하여 회합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스만 당국은 이를 의심스럽게 여겼고, 결국 모임을 습격하여 알리 케말을 포함한 5명의 학생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서 몇달을 보낸 알리 케말은 알레포 주지사의 아래로 보내져 지방의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실상은 유배로, 알리 케말은 여기서 5년을 보냈다. (İz, 1997: 871-72)

1894년, 알리 케말은 파리로 탈출했다. 이 시기 그는 이스탄불의 일간지 《이크담》(Iqdām, 현대 터키어로는 İkdam)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시기 쿠스탄티니야에서는 정치범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글도 출판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알리 케말이 썼다고 알려진 글이 정말 그의 저작인지는 불분명하다. 여하튼 ‘이크담의 파리 특파원’ 또는 ‘파리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실린 이 기고문들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한편 알리 케말은 유럽에서 정기적으로 청년 튀르크들과 만남을 가졌지만, 그들의 일원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알리 케말이 청년 튀르크들의 사상 대부분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 케말은 압둘 하미드 2세[ʿAbd al-Ḥamīd II, 현대 터키어로는 압뒬하미드 2세(Abdülhamid II)]과 비슷한 입장을 보였고,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며 그의 기고문이라 알려진 글에서 보인 입장과 반대되게도, 이 시기 파디샤에게 여러번 편지를 보내 조언가이자 첩자로 받아들여달라 청원했다. (İz, 1997: 872)

그 결과인지, 1897년, 압뒬하미드 2세는 비뤼셀 사절단의 제2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이 알리 케말이 미잔지 메흐메드 무라드를 배신한데 대한 보상이라고도 전해진다. 대사, 무니르 파샤(Munīr Pasha)는 알리 케말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 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리 케말은 직함을 사용하는 것은 허가받았고, 임금도 몇 년 동안 지급받았다. 여하간 이런 사정으로 알리 케말은 브뤼셀로는 가지 않고 파리에서 만난 아흐마드 잘랄 알딘 파샤(Jalāl al-Dīn Aḥmad Pasha)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옮겨갔다. 그는 카이로에서 이집트의 공주, 아흐마드 잘랄 알딘 파샤의 수양딸과 마흐무드 무흐타르 파샤(Maḥmūd Mukhtār Pasha)의 아내의 대리인으로 그 영지를 대신 관리했다 (1900년). 여기서 그는 이집트의 청년튀르크 인사들과 협력하여 신문, 《튀르크》(Türk. 그 이름과 달리 오스만주의적 색채를 띄었다)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1903년부터 1907년까지 발간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얼마간의 재산을 형성했으나, 그 이듬해에 주가폭락으로 파산했다. (Uzun, 1989; İz, 1997: 872)

카이로의 생활에 무료함을 느낀 알리 케말은 1908년, 다시 파리로 향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직후 압뒬하미드의 부름으로 다시 쿠스탄티니야로 향했다. 압뒬하미드는 마케도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청년 튀르크 일파가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첩보를 들은 상태였다. 알리 케말이 수도로 돌아온지 며칠뒤인 1908년 7월 23일, 연합진보회(İttiḥād ve Teraqqī Jemʿiyyeti)는 반란을 일으켰다. 압뒬 하미드는 권력을 잃었으나, 알리 케말의 귀환과 조언에 감사를 표하며 큰 상금을 내려주었다. (İz, 1997: 872)

그림2. 1908년 8월 17일자 《이크담》 1면

이 반란의 결과로 권좌에 오른 아흐메드 제브데트(Aḥmad Jevdet, 현대 터키어로는 Aḥmed Cevdet)는 알리 케말을 《이크담》의 논설위원으로 초대했다. 알리 케말은 반란의 1주일 뒤인 1908년 7월 30일에 발표한 논설, “과거에서 미래로”(Māḍīden Ālīye)를 시작으로, 20년 간의 부재를 앙갚음이라도 하듯 홍수와 같이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그는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언론인이 되었다. 한편, 그는 모교인 정치과학학교에서 정치사 강의를, 다르 알퓌눈[Dār al-Fünūn, 현대 터키어로는 다륄퓌눈(Darülfünun). 지금의 이스탄불대학교]에서 오스만사 강의를 시작했다. (Uzun, 1989; İz, 1997: 872)

알리 케말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려하던 연합진보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매일같이 연합진보회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알리 케말은 1909년 4월의 선거에서 오스만 자유당(ʿOthmānlï Aḥrār Fïrḳasï) 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연합진보회쪽의 후보에 패배했다. 이에 좌절하지 않은 알리 케말은 논설을 통한 공세를 한층 강화했다. 연합진보회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합진보회는 기간지를 통해 반박 논설을 발표하거나, 압둘 하미드와의 관계를 공개하는 등 반격을 가했다. 최후의 일격은 그해 4월 13일에 군인들의 봉기였다. 청년튀르크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살로니카를 떠나 수도로 진군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알리 케말은 영국인 친구의 집에 숨었다가 유럽으로 도망쳤다. 알리 케말은 파리에서 알리 페티 오캬르(ʿAlī Fetḥī Okyar)나 메흐메드 자비드 베그(Meḥmed Jāvīd Beğ, 현대 터키어로는 Meḥmed Cāvīd Bey) 등 연합진보회 지도자들에게 용서를 간청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알리 케말은 연합진보회를 공격하는 글을 셰리프 파샤(Sherīf Pasha)가 이끄는 해외의 반연합진보회 기관, 《메쉬루티예트》(Meshrūṭiyyet)에 기고하기 시작하고, 1911년 11월에는 자유연합회(Ḥürriyet ve Iʾtilāf Fïrḳasï)에 가입했다. (İz, 1997: 872)

1912년 7월에 연합진보회 정권이 붕괴하자, 알리 케말은 수도로 돌아와 《이크담》에서 논설위원직을 다시 맡았다. 그러나, 1913년 1월 23일, 연합진보회가 폭력적인 쿠데타로 재집권하자, 알리 케말은 체포당했다. 제말 베그[Jemāl Beğ. 나중에 연합진보회 삼두정의 한 축을 맡으며 쿠스탄티니야의 군정태수 제말 파샤(Jemāl Pasha, 현대 터키어로는 Cemāl Paşa)]는 감옥에 갖힌 알리 케말을 찾아가 오스만 제국을 떠나겠다면 풀어주겠다고 구슬렸다. 그리하여 알리 케말은 빈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알리 케말은 1913년 5월에 쿠스탄티니야로 돌아왔다. 그해 6월 11일, 대재상 마흐무드 셰브케트 파샤(Maḥmūd Shevket Pasha)가 암살당하자, 연합진보회는 이를 구실로 모든 반대파를 깡그리 숙청했다. 알리 케말은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제말 파샤에게 다짐한 덕분에 안전할 수 있었다. 제말 파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간지 《페얌》(Peyām)을 발간할 수 있게끔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생활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너졌다. (Lewis, 1994: 259; İz, 1997: 872)

대전기 알리 케말은 공적인 삶을 떠나 뷔윅아다에 머물렀다. 그는 고전 문학이나 역사와 관련된 문서나 책을 수집했다. 연합진보회가 무드로스 협정으로 끝장나자, 일간지 《사바흐》(Ṣabāḥ)의 편집장 미흐란 에펜디(Mihran Efendi)는 알리 케말을 논설위원으로 초청했고, 알리 케말은 기꺼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 연합진보회의 삼두, 엔베르(Enver), 탈랴트(Ṭalʿat) 그리고 제말은 독일의 함선을 타고 흑해를 건너 피신했다. 알리 케말은 즉시 연합진보회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개시했는데, 특히 아르메니아 학살이 단골 소재였다. (Lewis,1994: 276; İz, 1997: 872-73; Mango, 2012: 332)

60척의 연합군 함대가 1918년 11월 13일에 쿠스탄티니야에 상륙했다. 12월 8일 연합군 군정이 쿠스탄티니야에서 시작되었다. 제국의 아랍 지역은 이미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였다. 프랑스 군은 시리아로부터 킬리키아와 아다나 지역으로 진군했다. 영국 군은 아나톨리아 철도 전체와 다르다넬레스 해협, 삼순, 아인탑 등 요충지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군은 안탈리야에 상륙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새로운 황제, 메흐메드 6세 바히드 알딘(Meḥmed VI Vaḥīd al-Din)은 1919년 3월 4일에 매부, 다마드 페리드 파샤(Dāmād Ferīd Pasha)를 대재상으로 임명했다. 알리 케말은 다마드 페리드 파샤의 내각에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새 황제와 대재상은 영국의 정책을 철저히 수용했다. 더 나아가, 연합국의 신뢰를 얻기 위해 연합진보회의 잔여 세력을 압박하고 회유했다. 3월 8일, 오스만 정부는 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9일에는 연합진보회의 옛 지도부 인사들을 체포했다. 4월 10일에는 첫 공판이 열렸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학살에 연류된 총독들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많은 오스만인들이 분노했고, 특히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항의가 일어났다. (Lewis, 1994: 276-79; İz, 1997: 873; Mango, 2012: 194)

더 큰 반발은 그리스의 이즈미르 점령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해 5월 6일, 파리 회의에서 연합국 수장들은 그리스의 이즈미르 점령을 승인했다. 14일에 연합국 함대가 이즈미르 항을 점령했고, 15일에 그리스 군대가 연합군 함대의 보호를 받으며 이즈미르에 상륙했다. 오스만인 대부분의 분노가 폭발했다. 오스만 정부는 15일 아침에야 연합국측으로 부터 그 사실을 통보받고, 당황하기만 했다. 대재상은 프랑스어로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19일에야 정신을 차린 다마드 페리드 파샤는 개각을 단행했다. 알리 케말은 2차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즉, 무드로스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인정하며 오스만 제국으로 진군한 외국군에 저항을 그만두고 무조건적으로 연합군의 온정어린 평화조약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Mango, 2012: 202-05)

나중에 아타튀르크라 불리게 될 장군, 무스타파 케말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그리스의 이즈미르 점령 다음날인 5월 16일, 무스타파 케말은 마지막으로 황제를 예방한 뒤 삼순으로 향했다. 이스탄불을 떠난 지 3일 뒤인 19일, 무스타파 케말 일행이 삼순에 닻을 내렸다. 1918년 12월에 트라키아와 이즈미르 등에서 시작된 오스만인들의 저항이 아나톨리아 곳곳으로 퍼져나가던 시점이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삼순에 도착한 즉시 가면을 벗어던지고 에르주룸에서 제15군단을 지휘하며 오스만 정부에 반기를 든 카짐 카라베키르 장군에 합류했다. (Mango, 2012: 206-12)

무스타파 케말의 활동에 대한 오스만 정부의 대응은 일관되지 못했다. 황제를 비롯한 황가는 부정적이었지만, 대부분의 각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알리 케말은 여기서 황제를 택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활동에 대해서 연합진보회의 망령이라고 비난하며, 민족주의자들의 전보는 다루지 말라는 지시를 전보국에 내렸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간 알리 케말을 지지해왔던 대중은 완전히 그를 저버렸고, 그의 운명도 여기서 결정났다. 국방부 장관 셰브케트 투르구트와 이 문제로 다툼을 벌인 알리 케말은 6월 26일에 내각에서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Lewis, 1994: 288-93; İz, 1997: 873; Mango, 2012: 208, 212-17, 332)

다시 야인으로 돌아온 알리 케말은 《페얌》에서 아나톨리아의 저항군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알리 케말은 연합군이 1920년 3월 16일에 쿠스탄티니야를 점령한데 환영을 표하며, 황제의 군대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반역도당을 토벌하기를 기원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성공 소식이 이어지자 잠깐 터키 군인들의 용맹을 찬양했으나, 곧 그릇된 민족주의에 대한 비난과 세계 여론을 존중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과거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İz, 1997: 873)

그러나 그해 9월, 민족주의자 군대가 에게해에 이르자, 알리 케말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터키의 위대한 승리’를 인정하며 자신의 목표도 “이들과 항상 같았다”고 주장했다. 너무 늦은 일이었다. 무스타파 케말 정부는 이미 오스만 정권의 인사들을 앙카라로 끌고 와 재판에 회부하기로 다짐한 바였다. 그러나 모든 인물을 한번에 숙청하기에는 위험했기 때문에, 알리 케말을 시범 케이스로 정했다. 11월 18일, 알리 케말은 페라(지금의 베이오을루)의 동방클럽(Cercle d’Orient) 밖에서 민족주의 진영 요원들에게 납치됐다. 그는 그곳에서 배를 통해 이즈미드로 끌려갔다. 당시 제1군단을 이끌고 이즈미드에 주둔 중이던 사령관, 누르 알딘 파샤(Nūr al-Dīn Pasha)가 알리 케말을 심문했다. 심문 후 알리 케말은 앙카라로 이송되어야 했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분노한 대중들이었다. 군중들은 나무 막대기나 돌, 칼 등 손에 집히는 모든 물건을 사용해 그를 처단했다. 당시 심문을 맡았던 누르 알딘 파샤가 의도적으로 알리 케말을 성난 군중들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의혹이 퍼졌기 떄문에, 당시 외무장관으로 로잔 평화 협상에 참가중이던 이스메트 파샤[나중의 이스메트 이뇌뉘(İsmet İnönü)]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진땀을 뺐다. (İz, 1997: 873; Mango, 2012: 332)

그림3. 알리 케말과 위니프레드 브룬
그림4. 알리 케말과 셀마
그림5. 제키 쿠네르알프

알리 케말은 2번 결혼했다. 첫번째 결혼은 1903년의 일로, 영국-스위스 국적의 위니프레드 엠마 브룬(Winifred Emma Brun)과 이루어졌다. 알리 케말이 1902년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에 두 사람이 만났고, 그 이듬해에 런던에서 식을 올렸다. 엠마 케말과의 사이에서 첫째 딸 셀마(Celma)와 오스만[ʿOthmān, 현대 터키어로는 Osman. 풀네임은 오스만 윌프레드 케말(Osman Wilfred Kemal) 1909년생]이 태어났다. 위니프레드는 오스만이 태어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알리 케말은 1912년에 오스만 제국으로 돌아가면서 아들과 딸을 영국에 있던 처가에 맡겼다. 세계대전의 광기 속에서 영국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나빠졌기에, 두 사람은 외할머니 마가렛 브룬의 중간 이름 존슨을 성으로 삼고,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꾸었다. 이제는 윌프레드 존슨(Wilfred Johnson)이 된 알리 케말의 아들 오스만에게서 스탠리 존슨(Stanley Johnson)이 나왔고, 스탠리 존슨의 아들이 바로 영국의 신임 총리 보리스 존슨이다. (Uzun, 1989; Mallinder, 2016; BBC)

두번째 결혼은 무스타파 제키 파샤(Mustafa Zeki Pasha)의 딸 사비하 하늠(Sabiha Hanım)과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1914년 1월에 결혼했다. 사비하 하늠과의 사이에서 제키 쿠네르알프(Zeki Kuneralp; 1914년 10월 5일 ~ 1998년 7월 26일)가 태어났다. 알리 케말이 잔혹하게 살해당한 후 사비하 하늠은 제키 쿠네르알프를 데리고 스위스로 망명했고, 제키는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38년에 베른대학교에서 법학과 박사과정을 끝냈다. 이후 쿠네르알프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터키 외교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부쿠레슈티, 프라하, 파리, 마드리드 그리고 나토 등에서 일했다. 쿠네르알프의 아내, 네즐라 쿠네르알프(Necla Kuneralp)는 마드리드에서 아르메니아 해방비밀군(ASALA: Armenian Secret Army for the Liberation of Armenia)에 의해 암살당했다. 알리 케말이 당대에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판한 몇 안되는 오스만 고위층 인사였음을 생각하면 얄궃은 일이다. 제키의 아들 셀림 쿠네르알프(Selim Kuneralp) 역시 외교관으로 일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앙카라를 방문했을 당시 스스로를 보리스 존슨의 사촌이라고 소개했다.(Uzun, 1989; Barchard, 1998; Genç, 2013)

알리 케말은 총명한 사람이었고, 그의 백과사전적 지식은 당대인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당대 청년 튀르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서구 세계가 모든 면에서 오스만 제국을 앞서고 있음을 인정했다. 언론인으로서 그가 기고한 글들은 당시 서구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발전상을 오스만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 점은 청년 튀르크와 알리 케말이 가진 공통점으로, 사실 알리 케말의 초기 논설 대부분은 청년 튀르크계 언론을 통해 오스만 세계에 퍼져나갔다. (İz, 1997: 873-74)

그러나 알리 케말은 청년 튀르크와 달리, 오스만인으로 남았다. 이런 일면은 문학적 성향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부분에서 서구의 영향을 받았던 그의 논설과 달리, 문학 부문에서 그가 남긴 글들의 문체는 대체로 고전적인 아랍 문학, 페르시아 문학, 튀르크 문학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언어 개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늘 견지했다. (İz, 1997: 874)

알리 케말은 날카로운 사람이었지만 명민하고 재기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치적 경력에서 나타나듯, 그는 끝까지 오스만인으로 남았고,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소모적으로 지엽적인 논쟁에 빠져들고 날카롭지만 유머가 부족한 언변으로 적을 양산했다. 그러면서도 재빠르게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도 못했다. 그는 절망적인 순간까지 오스만 왕가를 옹호했다. 알리 케말은 이런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고 끝내는 스스로의 경력까지 끝장내버렸다. (İz, 1997: 874; Mallinder, 2016)

참고문헌

Lewis, Bernard (1994). 《오스만제국 근대사》. 김대성 옮김. 펴내기.

Mango, Andrew (2012).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곽영완 옮김. 애플미디어.

Barchard, David (1998). “Obituary: Zeki Kuneralp.” Independent: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obituary-zeki-kuneralp-1171140.html

BBC. “Boris Johnson: How we did it.” WHO Do You Think You Are?: http://www.bbc.co.uk/whodoyouthinkyouare/new-stories/boris-johnson/how-we-did-it_1.shtml

Genç, Kaya (2013). “Ali Kemal: Martyred Journalist and Iconic Traitor.” Los Angeles Review of Books: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ali-kemal-martyred-journalist-and-iconic-traitor

İz, Fahīr (1997). “Kemāl”, in: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4. Koninklijke Brill: 871-74.

Mallinder, Lorraine (2016). “Istanbul Letter: Lunch with Boris Johnson’s Turkish cousin.” The Irish Times: https://www.irishtimes.com/news/world/europe/istanbul-letter-lunch-with-boris-johnson-s-turkish-cousin-1.2650967

Uzun, Mustafa (1989). “Ali Kemal.” TDV İslâm Ansiklopedisi: https://islamansiklopedisi.org.tr/ali-kemal

그림1. 중년의 알리 케말. 출처: Mustafa Uzun, “Ali Kemal,” TDV İslâm Ansiklopedisi(1989).

그림2. 1908년 8월 17일자 《이크담》 1면. 출처: Nesimi Yazıcı, “İkdam,” TDV İslâm Ansiklopedisi (2000).

그림3. 알리 케말과 위니프레드 브룬, 그림4. 알리 케말과 셀마 그리고 그림5. 제키 쿠네르알프 출처: Ekrem Buğra Ekinci, “İngiliz Bakanın Türkiye’deki Kökleri: Ali Kemal Bey’in Acıklı Sonu,” kainatingunesi.com (2008): https://kainatingunesi.com/ingiliz-bakanin-turkiyedeki-kokleri-ali-kemal-beyin-acikli-so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