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불무자파르 샴스 알둔야 왈딘 일투트미쉬 이븐 엘람 칸(Abuʾl-Muẓaffar Shams al-Dunyā wa-l-Dīn Iltutmish b. Ēlam Khān: 엘람 칸의 아들, 승리의 아버지, 세계와 이슬람의 빛, 나라를 움켜진 자[國主])은 인도의 노예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이로 꼽힌다. 일투트미쉬는 노예 왕조의 군주로써는 3번째이며, 델리 술탄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이다. “아이베그의 활동은 인도에서 독립적인 무슬림 국가의 출현을 의미했고, 델리 술탄국을 세운 이는 일투트미쉬였다. (Jackson)” 샴스 왕통Shamsiyya의 통치자로써는 첫번째였다. 일투트미쉬의 왕통은 총 6명의 델리 군주를 배출했다.
일투트미쉬의 출신에 대해서는 킵차크계 욀베를리Ölberli 부족 출신이라는 기록과, 카라키타이 출신이라는 기록이 엇갈린다. 무슬림 사가들은 카라키타이를 튀르크의 일부로 생각하였는데 (Biran, 2005: 143-45), 이 때문인지 안사리는 카라키타이 튀르크의 한 분파인 욀베를리 부족 출신이라 정리했다 (Bazmee Ansari, 1971: 1155). 이와 유사한 예로는 화레즘샤 무함마드 이븐 테키쉬의 어머니, 테르켄 하툰이 있다. 대체로 그녀는 킵차크계의 캉글리Qangli 부 또는 이멕Yimek 부(키멕Kimek) 출신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에서는 카라 키타이 출신으로도 여겨진다. 이븐 할둔은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여, 테르켄 하툰이 카라키타이에 신종한 이멕 부의 바야우트Bayawut 씨족에 속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투트미쉬는 카라키타이인들과 많은 접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행실 역시 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맘루크 측근 중 상당수가 카라키타이 계통이었으며, 케르만의 거란인들 역시 델리 술탄국에 친척을 찾아 망명하거나, 이를 시도했었다. (Biran, 2005: 144-45) 일투트미쉬의 후계자로 라디야가 선출된 것 역시, 그 자신이 거란인이거나, 그 정권의 주류가 키타이에 속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Biran, 2012: 95)
이외에 일투트미쉬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가 노예로써 가즈나, 부하라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세월을 보냈다는 것 뿐이다. 일투트미쉬의 첫번째 주인은 부하라의 식자층에 속했는데, 그를 상인에게 팔기 전에 충분한 교육을 제공해주었다. 일투트미쉬를 산 상인은 그를 데리고 바그다드와 가즈나를 떠돌았다. (Hambly, 1994)
일투트미쉬는 마침내 델리에서 쿠틉 알딘 아이베그Quṭb al-Dīn Āybeg(아이바크)에게 팔려갔다. 당시 아이베그는 구리조 술탄, 무이즈 알딘 무함마드 이븐 삼Muʿizz al-Dīn Muḥammad b. Sām 휘하의 장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이즈 알딘은 일투트미쉬의 활약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에 쿠틉 알딘을 불러 그의 ‘노예’ 일투트미쉬가 용감무쌍하게 싸웠다며, 이크타를 부여했다. 이후 일투트미쉬는 아미리 셰카르amīr-i Shekār(사냥 담당관. 최고사령관 정도의 직책)으로 올라서고 아이베그의 딸과 결혼하는 등 총애를 받았다. 이후 괄리야르Gwāliyār(지금의 괄리오르Gwalior)의 태수직을 수행한 뒤 바란Baran(지금의 불란드샤흐르Bulandshahr), 바다운Badāʾūn을 이크타로 수여받았다. (Auer, 2012: 27; Jackson, 1998)
1206년, 무이즈 알딘 무함마드가 살해당하자 아이베그는 라호르를 수도로 삼아 인도에서 독립했다. 아이베그 또한 1210년에 사망하는데, 이때 아미리 다드amīr-i dād(법무장관 정도의 지위) 알리이 이스마일이 이끄는 맘루크들은 바다운에 머무르던 일투트미쉬를 델리로 소환하여 군주로 옹립했다. 아이베그의 아들 아람샤Ārāmshāh는 이에 불복하였으나, 패배하고 사형당했다. 이후 일투트미쉬는 인도의 다른 노예 군주들 ─ 신드 하류를 지배하고 아이베그 사후 라호르를 점거한 카마르 알딘 쿠바차나 라흐나우티를 수도로 벵갈 서부를 지배한 할라즈 장교들 ─ 을 제압하여 상위 군주로 인정받았다. (Jackson, 1998; Jackson, 1999: 28-29)
한편, 일투트미쉬는 가즈나에서 무함마드의 지위를 이어 받은 또다른 노예 출신 군주, 타즈 알딘 이을드즈Tāj al-Dīn Yïldïz의 종주권을 받아들여 인도의 통치자로 책봉되었다. 1211년 8월에 만들어진 명문에서, 일투트미쉬는 단지 (대)왕al-Malik al-Muʿaẓẓam을 자칭했다. 그러나 1216년, 이을드즈가 화레즘에 패배해 펀자브로 도주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을드즈는 라호르 지방을 두고 쿠바차와 다투다가, 델리 방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투트미쉬는 즉시 군대로 대응했다. 1216년 1월 25일, 일투트미쉬와 이을드즈의 군대는 사마나Sāmāna 인근 타라인Tarāʾin에서 격돌했다. 이을드즈는 패배했고, 바다운으로 유폐되었다가 사형당했다. 이후 일투트미쉬는 술탄을 자칭했는데, 압바스 칼리프 알무스탄시르에게서 책봉의 문서를 받아낸 것은 1229년의 일이었다. (Jackson, 1999: 30)
그러나, 일투트미쉬의 술탄위 참칭이 당장의 영토 확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쿠바차는 라호르를 다시 장악하여 자신의 영토를 동서로는 인더스 강에서 아라비아 해까지, 북쪽으로는 난다나와 페샤와르까지 넓혔다. 일투트미쉬는 1216년과 1217년 사이의 겨울에 아이베그의 옛 수도를 장악하고 맏아들 나시르 알딘 마흐무드Naṣīr al-Dīn Maḥmūd에게 분봉하였으나, 펀자브 동부의 타바린드Tabarhindh와 쿠흐람Kuhrām, 사르사티Sarsatī에서 반발이 일어나 곧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투트미쉬가 바흐라이치Bahraich를 맡긴 자마지Jāmajī는 쿠바차 쪽에 붙으며, 1220년에는 우츠츠Uchch를 들어 받쳤다. (Jackson, 1999: 30-31)
일투트미쉬 일생일대의 위기는, 이을드즈의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이을드즈의 영토를 흡수한 화레즘샤 알라 알딘 무함마드 이븐 테키쉬ʿAlāʾ al-Dīn Muḥammad b. Tekish는 맏아들 잘랄 알딘 망부르니Jalāl al-Dīn Mangburnī에게 그 영토를 분봉하였다. 잘랄 알딘은 이후 인도 방면으로 군세를 보내, 페샤와르를 두고 쿠바차와 다투었다. 또한 몽골 침공 이후에도 잘랄 알딘은 북인도에서 3년을 보내며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일투트미쉬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잘랄 알딘의 우선적인 적이 쿠바차였다는 점이다. 일투트미쉬는 선봉을 우선 쿠바차에게 원군으로 파견하는 한편, 그 자신도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잘랄 알딘은 인도에서의 재기를 포기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Jackson, 1999: 33)
잘랄 알딘은 떠났으나, 쿠바차의 제국은 크게 약화되었다. 쿠바차의 아래에 있던 하사니 니자미Ḥasan-i Niẓāmī와 아우피ʿAwfī가 반란을 일으켜 일투트므쉬에게 투항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쿠바차는 일투트미쉬에게 신종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일투트미쉬는 약해진 적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군대를 보내 신드와 물탄 지방을 공략했다. 나중에 쿠바차의 영토인 라호르를 이크타로 수여받을 나시르 알딘 아이테무르 알바하이Naṣīr al-Dīn Aytemür al-Bahāʾī는 물탄 방면으로 진군했고, 일투트미쉬 자신은 우츠츠 방면으로 진군했다. 1228년 5월, 결국 쿠바차의 세력은 모두 함락당했다. 그달 26일 쿠바차는 항복하였으나, 일투트미쉬는 그를 인더스 강에 빠뜨려 죽였다. 다이불의 군주 차니사르Chanīsar도 이에 항복하여, 일투트미쉬는 아라비아 해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Jackson, 1999: 34-35)
신드를 장악한 일투트미쉬는 이제 잘랄 알딘의 남은 세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잘랄 알딘은 인도를 떠나며 인도 서북면의 영토를 자한파흘라완 우즈벡Jahān-Pahlawān Özbeg에게 맡겼다. 우즈벡의 영토는 빈반Binbān, 난다나Nandana, 구자라트, 소드라, 시얄코트Sialkot, 가즈나, 쿠라만Kurramān 등 지역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1229년과 1230년 사이에 델리 군대는 우즈벡을 공격했고, 우즈벡은 이라크로 도주하였다. 우즈벡에 신종하던 지방군주, 하산 카를루크Ḥasan Ḳarluḳ는 일투트미쉬에 항복하였다. (Jackson, 1999: 34; 36)
서쪽에서 세력을 안정시킨 일투트미쉬는 벵갈 지역으로 나아갔다. 1225년의 친정으로 이 지역의 지배자, 술탄 기야스 알딘 이와드Ghiyāth al-Dīn ʿIwaḍ은 일투트미쉬를 상위군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하였으나, 일투트미쉬의 귀환 직후 이를 번복하고 다시 비하르를 점령했다. 이때 일투트미쉬의 맏아들이자 후계자, 나시르 알딘 마흐무드는 아와드 지방을 이크타로 수여받은 상태였는데, 군대를 이끌고 벵갈로 진군했다. 이와드가 아삼 지역으로 원정을 간 틈을 타 마흐무드는 라흐나우티Lakhnawtī를 점령했다. 이와드는 급히 되돌아 왔으나, 마흐무드는 그를 패배시킨 뒤 처형해버렸다. 일투트미쉬는 마흐무드에게 부왕의 지위를 부여했으나, 2년을 채우지 못한 1228년과 1229년 사이의 겨울에 마흐무드는 죽어버렸다. 이후 그의 지위는 이흐티야르 알딘 다울라트 샤 빌게 말리크Ikhtiyār al-Dīn Dawlāt shāh Bilge Malik이 탈취했다. 일투트미쉬가 벵갈에 다시 나타난 것은 이때로, 1230년과 1231년 사이에 그의 군대는 빌게 말리크를 몰아냈다. 이후 20여년 동안 벵갈 지역은 델리의 온순한 봉신으로 지냈다.(Jackson, 1999: 36-37)
라흐나우티 수복으로 델리 술탄국은 인도의 유일한 무슬림 정부가 되었다. 일투트미쉬는 본래 델리의 힌두교도 군주들이 발행하던 델리화Dihlīwāl를 없에고 순은으로 된 탕가tanga(혹은 탕카tanka)로 대체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서 술탄으로 책봉된 것도 이 시기였다. 칼리프는 일투트미쉬에게 ‘신의 대리인의 오른팔Yamīn Khalīfa Allāh’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압바스 칼리프는, 과거 구리조 술탄들이 화레즘 제국을 남쪽에서 견제하였던 역할을 일투트미쉬가 수행하길 바랐다. 한편 일투트미쉬는 본래 이와드가 사용하던 ‘신앙인의 지휘자의 보조자Nāṣir Amīr al-Muʾminīn’이라는 칭호도 사용하기 시작했다.(Jackson, 1999: 37-38)
이후 일투트미쉬가 죽을때까지 그의 지위가 위협받는 일은 없었다. 1235년부터 이스마일파가 물탄 지방에서 준동했으나, 일투트미쉬의 군대는 이들을 격파했다. 일투트미쉬는 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 자신을 배신하고 몽골에 신종하기 시작한 카를루크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이스마일파의 암살 시도로 일투트미쉬는 크게 다친 상태로 델리로 귀환했다. 1236년 2월, 일투트미쉬는 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Bazmee Ansari, 1971: 1155; Jackson, 1999: 34)
참고문헌
Auer, Blain H. (2012). Symbols of Authority in Medieval Islam: History, Religion and Muslim Legitimacy in the Delhi Sultanate. I.B.Tauris.
Bazmee Ansari, A.S. (1971). “Iltutmis̲h̲.” Encyclopaedia of Islam, 2nd ed. vol. 03. Brill:1155-56.
Biran, Michal (2005). The Empire of the Qara Khitai in Eurasian History: Between China and the Islamic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Hambly, Gavin R. G. (1994). “Delhi sultanate, i.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Jackson, Peter (1998). “Ēltotmeš, Šams-al-Din.”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Jackson, Peter (1999). The Delhi Sultanate: Political and Military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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