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오스만, 그는 어디에서 왔나

by hanyl 2019. 8. 16.

오스만 제국사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콜린 임버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스만 가문의 근원에 대한 그 어떤 이론도,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가지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tale) 대부분은 창작일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초창기 오스만사가 블랙홀임을 인정하는 것 뿐이다. 이 구멍을 막기 위한 모든 시도는 단지 우화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일 뿐이다.”(Imber, 1993: 75)

도. ‘그’의 상상화

오스만 가문의 시조로 알려진 오스만 1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그’의 시대에 존재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발행인 오스만 이븐 에르토그룰’(ʿOthmān b. Ertoghrul)이란 문구가 새겨진 주화 두점이 존재하지만, 이것이 ‘그’의 생전에 발행되었다는 확증은 없다. 단지 그러했으리라 여겨질 뿐이다.(Imber, 1995: 180-81)

심지어, ‘그’의 이름마저도 논쟁의 대상이다. 당대에 ‘그’가 언급된 유일한 기록은 파키메레스의 것인데, 여기서 ‘그’를 아타만(Ataman)이라고만 불렀다.(Howard, 2017: 9) 아타만은 ‘그’의 이름이었을까 칭호였을까? 아니면 오스만의 튀르크어식 발음이었을까? 15세기의 한 설화에서는 ‘그’가 오스만즉[ʿOthmānjïq; 터: 오스만즉(Osmancık)]을 봉토로 받은 뒤에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오스만으로 취했다고도 한다. 바빙거는 이 설화를 부정했지만, 사실 ‘그’의 개명을 기억하는 설화가 아닐까? 단지 오스만인들이 ‘그’를 정통칼리프 오스만과의 구분하기 위해 ‘우리 오스만’[ʿOthmānjïq; 현대 터키인들도 친밀감을 표시할때는 ‘나의 오스만’(Osmancığım)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이라 불렀다는 오르한 시대에 오스만 공국을 여행한 이븐 바투타의 기록과 1324년 3월자로 발행된 와크프 문서를 근거로, 최소한 이 시점에는 ‘그’가 오스만이라 불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Babinger, 1995: 189; Imber, 1995: 180)

‘그’가 카이으(Qayï) 씨족의 수령이었다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은 어떤가? 현존하는 증거로 이 전통을 확실히 사실이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주요 논거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소아시아에 정착한 카이으 씨족의 정착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스만 공국이 기원했다고 하는 에스키셰히르(Eskişehir)란 사실이다. 에스키셰히르의 옛 이름은 술탄외뉘(Sultanönü)로, 이곳에서 카이으 씨족의 존재가 확인된다. (Sümer, 2012) 두번째 근거는 카디 부르한 알딘 아흐마드(Qāḍī Burhān al-Dīn Aḥmad)가 1380년에 남긴 기록에서 오스만이 ‘카이으 씨족의 후예’(Qayïkchï-oghlu)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이후 오스만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 예를 그대로 따라 ‘그’가 카이으 씨에 속했다고 기록했다. (İnalcık , 2010: 18-19)

꼭 아니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편하지도 않다. 단지 지명과 거의 100년 뒤에 처음 출연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굳이 혈통을 날조할 이유도 있었다. 카쉬가리와 라시드 알딘은 오구즈 집단에 각각 22개와 24개의 씨족이 속해있다고 적었다. 카쉬가리는 오구즈의 22개 씨족 가운데, “그 수령은 크느크(Qïnïq)로, 지금 우리 술탄[즉, 셀주크]이 속한 씨족이다. 그리고 둘째는 카이그[Qayïgh = 카이으]이다.”고 적었다. (al-Kāšгarī, 1982: 101) 라시드 알딘의 목록도 비슷했다. 그는 크느크 씨를 제일 마지막에 배치하고 카이으 씨를 필두로 세운 뒤, 오구즈 군주 야브구는 카이으 씨족에 속했다고 적었다. 일부 학자들은 오스만인들아 다른 오구즈계 튀르크 전체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카이으 씨를 참칭했다고 보고 있다. (Pritsak, 2007: 71; Sümer, 2012)

그럼 어떤 대안이 있는가? 앞서 언급한 대로, 파키메레스는 ‘그’를 ‘아타만’이라고 불렀다. 물론 바빙거의 추측대로, 이것이 아랍어식 이름 오스만을 튀르크어 화자가 발음한 것을 그리스어로 적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기로 볼 수도 있다. (Babinger, 1995: 189) 하지만 비잔틴인들은 오랫동안 튀르크나 이슬람 세계와 접촉하여 그들에 익숙한 상태였다. 또, 그리스어는 θ[θ]와 τ[t] 그리고 σ[s]를 구분할 수 있는 언어다. 그런데 당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을 못 알아들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아타만’을 동유럽의 코사크들에게서 종종 출현하는 헤트만(het’mаn)과 연결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튀르크어로 ‘수령’을 의미하는 ‘아타만’(ataman)에서 왔고, 17세기 자포로제 코사크 집단은 이를 그대로 차용해서 사용했다. (Kafadar, 1995: 124, note. 12, 13)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당시 오구즈계 튀르크 집단이 대부분이던 아나톨리아에서 동유럽, 즉 큽차크(Qïchaq)계 튀르크 어휘가 출연했을까? 13세기 초, 큽차크계 부락은 최소 2차례 발칸으로 이주했다. 1237년, 대규모 큽차크 부락이 바투가 이끄는 장자 원정대의 압박에 불가리아를 거쳐 트라키아로 진입했다. 1241년에는 또 다른 큽차크 부락이 헝가리에서 불가리아를 거쳐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들이닥쳤다. 두번째 이주민은 최소 10,000명이 넘는 수였다고 전해진다. 1241년 또는 42년,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는 발칸으로 진입한 큽차크 부락을 매수하여 이들을 로마군에 편입시켰다. 대부분의 큽차크인들은 트라키아나 마케도니아에 정착했지만, 일부는 소아시아로 보내져 로마와 셀주크 왕국 사이의 변경 지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메안데르, 프리기아, 그리고 스미르나 인근에 배치되었다고 전해진다. 현대 터키어 방언들을 살펴보면 큽차크 튀르크어 요소가 파플라고니아에서 주로 관찰되는데, 이는 이때 이주한 큽차크인들이 단지 프리지아 인근에만 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 큽차크 유목민들은 이미 헝가리를 거치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 시점에는 그리스 문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Korebeinikov, 2015: 37-38; Shukurov, 2016: 92)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그’를 종래의 서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다. 아마 ‘그’의 조상들은 13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큽차크 초원에서 유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투가 이끄는 장자원정대에 의해 로마 제국까지 밀려왔다. 요안니스 바타치스는 이들 중 일부를 뽑아 소아시아 각지에 배치했는데, ‘그’가 속한 부락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당대에 ‘아타만’이라 불리었는데, 이것이 이름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냥 수령이라서 그렇게 불렸던 것일까? 동로마 시기 다른 튀르크계 용병의 경우로 볼때 ‘그’ 역시 동방정교회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면 기독교식 이름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속한 부락은 로마 제국의 빡빡한 통제를 견딜 의지가 없었다. 어쩌면 파플라고니아까지 도망친 큽차크 부락들에게서 낙오한 집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들은 당시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변경에 진입했다. 그리고 이 부락은 주변의 오구즈계 인구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을 것 같고, ‘그’는 이제서야 ‘오스만’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아마 당대인들이 보기에 ‘오스만’의 가문이나 세력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기록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오스만’이 세력을 키운 뒤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출신이라 그 계통을 추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개종자이자 보잘것 없는 부락 출신이라는 ‘그’의 과거는 이슬람을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로 선택한 후대의 ‘오스만인’들에게는 껄끄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오스만 통치자들과 연대기 작가들은 이러한 진실을 분식하고 카이으 씨족 출신의 ‘오스만 이븐 에르토그룰’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오스만 연대기 작가들의 ‘분식’ 의혹은 Schamiloglu, 2014: 272-73의 가설에서 따왔다)

물론 이건 상상이다. 처음에 인용한 임버의 글대로, 어떤 이론을 세운들 그것의 개연성 여부를 판단할 근거는 없다. 마치 ‘오구즈계 카이 씨족 출신의 에르토그룰의 아들 오스만’설처럼. ‘그’의 과거는 너무 깜깜한 어둠 속에 감추어져서 그 어떤 빛도 비치지 않는다.

참고문헌

Babinger, Fr. (1995). “ʿOthmāndji̊ḳ.”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8. Koninklijke Brill: 189-90.

Howard, Douglas A. (2017). A History of the Ottoman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mber, Colin (1993). “The Legend of Osman Gazi,” in Elizabeth Zachariadou (ed.), The Ottoman Emirate (1300-1389). Crete University Press: 67-75.

Imber, Colin (1995). “ʿOthmān I.”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8. Koninklijke Brill: 180-82.

İnalcık, Halil (2010). Kuruluş Dönemi Osmanlı Sultanları (1302-1481). İslam Araştırmaları Merkezi.

Kafadar, Cemal (1995). Between Two Worlds: The Construction of the Ottoman Stat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l-Kāšгarī, Maḥmūd (1982). Compendium of the Turkic dialects (Dīwān luγāt at-Turk), pt. 1. Robert Dankoff and James Kelly (eds. and Trans.).

Korobeinikov, Dimitri (2015). “The Cumans in Paphlagonia.” Karadeniz İncelemeleri Dergisi 18: 29-44.

Pritsak, Omeljan (2007). “Tribal names and titles amongst the Altaic peoples,” Gwendolin Goldbloom (tran), in Clifford Edmund Bosworth, (ed.), The Turks in the early Islamic world. Routledge: 59-116.

Schamiloglu, Uli (2004). “The Rise of the Ottoman Empire: The Black Death in Medieval Anatolia and its Impact on Turkish Civilization,” in Neguin Yavari, Lawrence G. Potter, and Jean-Marc Oppenheim (eds.), Views From the Edge: Essays in Honor of Richard W. Bulliet. Columbia University Press: 255-79.

Shukurov, Rustam (2016). The Byzantine Turks, 1204-1461. Koninklijke Brill.

Sümer, Faruk (2002). “Kayı.” İslâm Ansiklopedisi. Türkiye Diyanet Vakfı: https://islamansiklopedisi.org.tr/kayi

도. ‘그’의 상상화. 1579년 경? 오스만 제국. 톱카프 궁전 박물관, 이스탄불.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I_Osman.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