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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차르 권력의 기원, 포메스티예

by hanyl 2019. 12. 20.

도1. 모스크바 기병 상상화. 모스크바 병기창의 유물을 토대로 복원한 모스크바 기병. 표도르 솔른체프, 《러시아의 의복》(1869년)의 삽화.

베르나드스키는 모스크바 차르 권력의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로 군사 봉토 체제를 들었다. 이 군사적 봉토의 이름은 바로 포메스티예(Поместье, Pomest’e; ‘뽀메스찌예’라고도 표기됨)였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 봉직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토지를 뜻한다. 이를 받은 봉직자, 즉 포메시키(Помещики, Pomeshchiki)는 그 대가로 국가의 소집에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을 한 후에 전투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토지 150 데샤티나(미터법 이전의 러시아 면적 단위로, 1 데샤티나는 10,925㎡에 해당했다. 즉, 150 데샤티나는 대략 1,635,000㎡) 당 병사 1명과 장비를 갖추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을 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불복종한다면 포메스티예는 언제든 회수될 수 있었다. 또, 기본적으로 포메스티예는 상속되지 않았지만, 포메시키의 아들이 대를 이어 봉직을 수행하는 경우 포메스티예의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모스크바국의 포메스티예에 등록된 기병의 수가 20,000명이었고, 실제로는 약 만명 가량이 최대 동원되었다. 당시 모스크바 국가의 병력 동원 상한이 35,000명 가량이었음을 생각하면, 포메스티예가 모스크바 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느낄 수 있다. (박지배, 2014: 43; 오두영 2006: 173-74; Vernadsky, 2006: 534-35; Ágoston, 2011: 292-93, 296-97)

포메스티예는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외형적으로 유사하기에 많은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모스크바 국가에서 포메스티예 체제는 중앙집권화의 결과였다. 즉, 모스크바국에서 포메스티예는 중세의 봉토와 달리 근본적으로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이었다. (박지배, 2014: 43)

사실 루시 세계에 포메스티예 이전에도 세습봉토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0세기 중엽에 하자르 제국이 몰락한 이후 루시 세계에서는 자기 방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부유한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고, 최초에는 노예 인력이 이 집단의 중추가 되었다. 유목민의 약탈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이들 상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며 도시로 모여들었다. 이후 루시 세계의 통합이 느슨해지자 이들의 독자 세력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북동부 방면에서 식민화를 추진중이던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각 공후들은 이 상황에서 농민들을 관리할 관리와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무한정인 토지를 하사했다. 이 토지가 바로 보트치나(Вотчна, Votchina; ‘보뜨취나’로도 표기됨)였다. 그러나 광대한 토지에 비해 가신과 정착민의 수는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가신과 정착민 모두 자신의 군주를 바꿀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가 성립하였다. 군사적 가신의 이전 공후의 영역 내에 있는 토지의 상실 없이 다른 공후에게로 옮겨갈 수 있었다. 즉, 가신들은 이탈의 자유를 지녔고, 그들의 토지도 비제약적이었다. 따라서 가신들이 보유한 토지는 사유지의 성격이 강했다. (Riasanovsky, 2011: 175, 238; 오두영, 2006: 171-72)

따라서, 모스크바 차르는 봉직귀족을 확보하면서도, 보트치나와 달리 자신들에게 순전히 충성하는 관리를 확보해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포메스티예였다. 포메스티예의 첫 등장은 이반 3세의 재위인 15세기 말 노브고로드 정복이었다. 1478년,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를 정복한 뒤 포메스티예를 대규모로 설치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모스크바의 하층 귀족들에게 포메스티예를 내려주고, 노브고로드의 귀족들에게는 대신 모스크바 방면의 토지를 줬다. 요컨데, 포메스티예가 도입된 핵심적인 목적은 이반 3세가 자신들의 군사 봉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절대적인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Riasanovsky, 2011: 176, 238; Stevens, 2007: 38)

따라서, 포메스티예 체제는 근본적으로 보트치나 체제와 달라야만 했다. 베르나드스키에 따르면, 대공의 궁정에서 일하는 일부 관리는 대공의 노예, 즉 코미타투스였다. 대공은 이들 코미타투스에게 봉사의 대가로 소규모 토지의 임시 소유권을 주었는데, 이것이 포메스티예의 근원이다. 만약 그들의 복무가 중단되면, 토지 소유권도 중지되었다. 즉, 이들 코미타투스들은 보트치나를 소유한 봉직자와 달리 이탈의 자유를 지니지 못했다. 또한 포메스티예는 수도원 보유의 포메스티예를 제외하면 증여나 판매가 불가능한, 제약적 토지였다. 포메스티예에 허락된 거래는 다른 지역의 포메스티예와의 교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조치 덕분에 포메스티예는 보트치나나 서유럽의 봉토와 달리 철저히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Riasanovsky, 2011: 175-76; Ostrowski, 1992: 331-32)

포메스티예와 보트치나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포메스티예의 기원을 모스크바 외부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이미 여럿 있었다. 베르나드스키는 포메스티예의 기원에 대한 논의를 크게 네가지로 분류했는데, 그 가운데 세가지가 각각 비잔틴 제국,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에서 찾는 것이었다. (Vernadsky, 1939)

우선 로마 제국의 프로니아(πρόνοια, pronoia)부터 살펴보자. 프로니아는 본래 ‘시혜, 배려’라는 의미로, 관리가 봉직의 대가로 일정한 토지의 이용권을 받거나 농민들의 세금을 대신 받는 제도를 의미한다. 기록에 따르면 프로니아의 원초적 형태는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 재위에 처음 보이고, 마누일 1세 콤니노스 재위에 제도화되었다. 프로니에(πρόνοιαι, pronoiai: 프로니아의 복수형이나 여기서는 ‘봉직자’를 의미)의 직군은 다양했지만, 1204년 이후로는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프로니아의 시한은 최초에는 생애였으나, 차츰 봉직을 제공하는 기한으로 좁혀져갔다. (Bartusis, 2012: 597-602)

프로니아 제도 역시 봉건제와 유사한 외형적 특성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지만, 포메스티예와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 봉건제와 달리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은 강력했다. 마크 바투시스(Mark C. Bartusis)의 견해에 따르면, 프로니아 제도의 근간은 중세 봉건제보다는 로마법에서 찾는 것이 맞다. 프로니아 보유자는 국가의 권력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자비에 따라 노동의 대가로 세금을 거둘 자격을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Bartusis, 2012: 613)

도2. 소피야 말년의 모습을 유골을 통해 복원한 상. 니키티나(С. А. Никитина, S. A. Nikitin), 1994년.

그렇다면 프로니아는 어떻게 모스크바에 영향을 주었는가? 19세기 중반 네볼린(К. А. Неволин, K. A. Nevolin)은 이반 3세와 결혼한 소피야 팔레올로크[София Палеолог, Sophia Paleolog. 그리스식으로는 조이 팔레올로기나(Ζωή Παλαιολογίνα, Zoe Palaiologina)]의 영향이라 추측했다. 이반 3세가 포메스티예를 도입했음을 생각하면 소피야와 일행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은 있다. (Ostrowski, 1992: 335) 또한 꼭 소피야를 통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슬라브계 집단을 통해 프로니아 체제를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중세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 왕국은 13세기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Стефан Урош Милутин, Stefan Uroš II Milutin)이 스코페를 정복한 이래 비잔틴식 프로니아 제도를 운영했다. 세르비아어로 프로니야(Пронија, pronija)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Стефан Урош IV Душан, Stefan Uroš IV Dušan)이 1349년에 반포한 법전, 《두샤노브 자코니크》[Душанов законик, Dušanov zakonik: 두샨 법전. 더 정확한 이름은 자콘 블라고베르나고 차라 스테파나(Закон благовјернаго цара Стефана, Zakon Vlagovjernago cara Stefana: 신실한 황제 스테판의 법전)]에도 프로니야에 대한 항목이 존재한다. 세르비아의 프로니야는 왕국 말기까지 운용되었다. (Bartusis, 2012: 604-10)

그 다음 후보인 몽골 제국의 영향을 생각해보자. 이 가설을 처음 구체화한 사람은 베르나드스키였다. 1953년에 발표한 《몽골 제국과 러시아》의 서술을 보자. 그에 따르면, “이슬람 법학의 토지 소유 관념이 몽골 제국에 전파되었다. 따라서 조치 울루스의 칸들이 무슬림이 된 이후 일종의 ‘이슬람식 봉건제’를 몽골 지배기 루시 지역에 이전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서구의 봉토에 상응한다는 이크타 제도(Iqṭāʿ)는 모스크바 국가에서 포메스티예 체제의 운용에 일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Vernadsky, 1939: 312)

이크타 제도는 부와이흐조 시기 화폐의 부족으로 발생한 군인들의 봉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즉, 아미르에게 일정 토지의 수조권을 부여하여 봉급으로 삼게끔 한 것이다. 이크타의 규모는 다양해서, 하나의 지역 전체가 될수도 있었고 하나의 취락 수준일수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이크타는 군주의 선물이었고, 언제고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부와이흐조 치하에서 이크타 제도는 경제적으로 실패한 정책이었다. 이것이 성공을 거둔 것은 셀주크조 시대였다. 이크타는 이제 군인 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나 셀주크 가문의 구성원들에게도 나누어졌다. 이크타 봉직자(Iqṭāʿdār 또는 Muqṭaʿ)는 이제 단순한 세리라기 보다는 실질적인 지방의 통치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Peacock, 2015: 79, 좀 더 자세한 설명은 Lambton, 1998 참고)

몽골 침공 직후 이슬람 세계에서 이크타 제도는 한동안 작동을 멈추었다. 그 대신 소유르갈(soyūrghāl)이 등장한다. 소유르갈이란 본래 ‘배려, 보상’을 의미한다. 무인 알딘 나탄지(Muʿīn-al-Dīn Naṭanzī)는 아바카가 로리스탄의 아타베그 유수프샤에게 소유르갈을 부여했다고 기록했다. 14세기 무렵의 기록들에서는 소유르갈은 이크타의 한 종류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 가잔 칸이 왕령을 가려뽑아 천호장들에게 이크타로 사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크타와 소유르갈에 대해서는 Lambton, 1998 참고) 기록에 따르면 조치 울루스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이크타 부여는 13세기 말 노가이(Nogai)가 자신의 손자에게 크림 반도를 이크타로 내려준 것이었다. 소유르갈의 경우 조치 울루스에서는 1350년 이후에 출연하는데, 이는 조치 울루스의 분열 이후 칭기스조 울루스 각지에서도 관찰되는 바이다. (Pochekaev, 2018: 730)

이와 같은 소유르갈 제도의 운용이 모스크바 국가에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은 없지는 않다. 일전에도 언급했지만, 모스크바 대공은 조치 울루스의 제도와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았다. 모스크바 대공은 조치 울루스의 수도 사라이를 자주 여행했고, 그의 어린 후계자는 인격 형성기를 사라이에서 볼모로 보내야 했다. (Ostrowski, 1990: 525) 사실 자넷 마틴이 지적했듯, 16세기 후반 노브고로드 토지에 포메스티예를 받은 하위귀족층은 튀르크·몽골인이었다. (Martin, 1990) 랴자노프스키에 따르면 이들 몽골인들은 이슬람 신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는데(Riasanovsky, 2011: 238), 오스트로브스키는 보트치나는 비기독교도에게 수여된 일이 없었다며, 이 한계가 보트치나와 별개로 포메스티예를 도입해야할 이유 가운데 하나로 추측했다. (Ostrowski, 1992: 347-48)

마지막 후보는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운용한 군사적 봉토 제도는 티마르(Tīmār)로, 티마르는 페르시아어로 ‘배려’를 의미한다. 티마르 제도는 오스만 제국에서는 핵심지역에서 적용되었는데, 사실 원칙은 앞서 설명한 이크타 제도와 같다. 실제 운용에서는 지역별로 차이가 보이지만, 대체로 비잔틴 제국 프로니아 제도의 관행을 거의 따랐고, 소아시아에서는 룸 셀주크 왕국의 관행을 거의 따랐다. 요컨데 오스만 제국의 티마르 제도는 이슬람 세계와 튀르크·몽골 세계의 이크타 제도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비잔틴·로마 세계의 프로니아 제도를 실질적 운영의 틀로 둔 것이다. (Darling, 2008; 때문에 15세기 말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제국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주인이 바뀌는 동안, 프로니아와 티마르, 프로니에와 시파히 같이 서로 이름만 바뀐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Bartusis, 2012: 592)

사실 어떤 의미에서 티마르 제도야 말로 앞서 언급한 그 어떤 제도보다 포메스티예와 유사하게 운용되었다. 티마르는 봉직에 대한 대가로 받는 봉토로, 티마르 기병은 징집시 자신의 말과 무기 그리고 무장 수행원과 함께 전투원으로 등록해야했다. 원정에 참여하는 무장 수행원의 수는 티마르에서 나오는 수입에 비례했다. 두 제도는 봉건제와 비교해볼때 봉토라는 외형적 유사성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거대한 다종족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Casale, 2015: 329-30)

14세기부터 오스만 중앙 정부는 매 산작(sanjak)마다 토지와 세입 대장을 지니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티마르 소유자의 이름, 그 땅에서 나오는 연 수익, 무장한 종자는 얼마나 데려와야 하는지, 텐트나 갑옷을 얼마나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례는 16세기에도 이어졌으나, 좀더 발전되었다. 바예지드 2세의 치세 이후 카눈나메(qānūnnāme)의 서문에는 해당 산자크에 적용되는 세율, 해당 지역 농민의 지위와 관련된 규정들, 티마르 보유자의 권리와 의무 등이 기록되었다. 카눈나메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규정도 나타나는데, 이는 티마르보유자(timariot)과 여타 봉지보유자들이 해당 지역의 법과 질서를 유지시킬 의무와 형벌을 부과할 권리, 벌금 수령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눈나메의 가장 초기 형태는 1487년에 브루사(Brusa)의 휘다벤디가르(Khüdāvendigār) 산작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후 16세기까지 토지 및 세금 조사시마다 새로이 카눈나메가 작성되었다. (Imber, 2010: 355-56)

도3.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메흐메드 2세의 초상 (1480년, 캔버스 유화). 페레스베토프는《스카자니예 오 마크메테살타나》(Сказание о Магмете-салтане, Skazanie o Magmete-saltane: 메흐메드 술탄 이야기)에서 메흐메드 2세를 이상적인 통치자로 묘사하며 이반 4세에게 메흐메드 2세의 예를 따르라고 조언했다.

정황 증거도 앞서 이야기한 그 어떤 것보다 분명하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오스만 제국과 모스크바 제국의 관계는 우호적인 편이었다. 모스크바와 쿠스탄티니야 사이에 이따금 사절이 오갔고, 흑해 연안을 통한 무역도 활발했다. 당시 성장중이던 모스크바 국가는 오스만 제국의 사회제도와 군사기술을 흡수했다. 리투아니아의 루시계 하급귀족 이반 세묘노비치 페레스베토프(Иван Семёнович Пересве́тов, Ivan Semenovich Peresvetov)는 1547년에 이반 4세에게 오스만식 군 동원 체제, 즉 티마르 체제를 배워야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모스크바 국가에서는 오스만 제국에서 여러 제도를 수입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악명높은 스트렐치 군단(стрельцы́, streltsy)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나중에 스트렐치 군단이 예니체리 군단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지배, 2014: 42-43, 49; Ágoston, 2011: 291; 모스크바에서 페레스베토프의 활동과 이반 4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Skrynnikov, 2015: 34-37을 보라)

이상 모스크바 제국군의 척추였던 포메스티예 제도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간략히 검토해보았다. 포메스티예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은 모스크바 국가가 어떻게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지 잘 보여주는 듯 하다. 다른 제국들도 그러하지만, 모스크바 군주들은 루시 세계에 있던 자신들의 기원에서 갖히기보다는 유연하게 필요한 제도를 다른 나라에게서 배워왔다. 이반 4세 이후 포메스티예는 더욱 확장되어 보트치나와의 구분이 차츰 흐릿해졌다. 결국 모스크바 제국에서 세습적이건 아니건 간에 지주라면 차르를 위해 봉직을 담당하지 않고는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된 것이다. (Riasanovsky, 2011: 219; 현재 러시아어에서도 포메시키는 ‘지주’를 뜻한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 호다르코브스키(Michael Khodarkovsky)의 평가는 더욱 날카롭게 느껴진다. “요컨데, 모스크바는 제3로마이자 새로운 예루살렘이였으며, 동시에 새로운 사라이였다.” (Khodarkovsky, 2002: 40)

참고 문헌

박지배 (2014). “근대 초 러시아 국가의 군사개혁과 동서양의 영향.” 《서양사론》 제121호: 35-69.

오두영 (2006). “러시아 봉건제에 대한 재해석.” 《중세사학》 제108호: 16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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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tusis, Mark C. (2012). Land and Privilege in Byzantium: The Institution of Prono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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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모스크바 기병 상상화. 모스크바 병기창의 유물을 토대로 복원한 모스크바 기병. 표도르 솔른체프,《러시아의 의복》(1869년)의 삽화.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Russian_clothes_Soln.jpeg

도2. 소피야 말년의 모습을 유골을 통해 복원한 상. 니키티나(С. А. Никитина, S. A. Nikitin), 1994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paleolog_reconstruction03.JPG

도3.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메흐메드 2세의 초상 (1480년, 캔버스 유화). 출처: https://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gentile-bellini-the-sultan-mehmet-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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