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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테무진 생애 공백의 10년

by hanyl 2019. 12. 4.

달란 발주트의 패배(1187년 이전)와 금나라 주도의 타타르 원정(1196년)까지는 거의 10년의 공백이 존재한다. 몽골 제국의 사료들에서는 이 기간에 테무진의 활동에 대해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몽골 제국기 최중요 사료 가운데 하나인 라시드 알딘의 『집사』에서는 다만 1168년부터 1194년까지 테무진이 많은 고생을 했고,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다고만 적었을 뿐이다. (Rachnevsky, 1992: 53; Allsen, 1994: 337)

그렇다면 다른 사료는 어떠한가? 흥미롭게도, 남송의 사신 조공(趙珙)은 몽골측을 방문한 뒤 작성한 여행기인 『몽달비록』(蒙鞑备录)에서 테무진이 10년 동안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다고 적었다. 조공이 저서에서 여러 차례 종족적 편견을 보였기 때문에 이 기록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이나, 이 대목만큼은 진지하게 받아들일만 하다. (Rachnevsky, 1992: 54; 여담이지만 허영만 그림, 이호준 글,『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이 기록을 그대로 활용해서 테무진이 금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고 묘사했다)

유목민들은 전쟁이나 정쟁에서 패배하면 이웃지역으로 도망치기를 서슴치 않았다. 기실 이와 같은 활동은 유목 국가들의 형성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주엽은 이를 카자크 활동(Qazaqlïq)이라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카자크는 사회 또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소속된 국가나 부족, 고향을 떠난 정치적 방랑자를 의미한다. 유연[柔然], 토욕혼[吐谷渾], 고차 철륵[高車 鐵勒], 아사나 돌궐[阿史那 突厥] 등이나 우크라이나 코사크 집단, 그리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중앙아시아의 시반조 우즈벡(아불하이르조라고도 함. 부하라 칸국을 통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짐)과 카자크 우즈벡(카자흐 칸국을 통해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짐), 이 모두가 카자크 활동을 통해 고유한 국가와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주엽, 2016) 이러한 활동은 몽골 제국 출현 직전의 몽골 고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사람들은 몽골 고원으로, 반대로 전투에서 패배한 유목민들은 금나라나 카라 키타이에서 정치적인 망명처를 찾았다. 테무진 휘하에도 이러한 이들은 많았다. 이미 중국에 대한 원정을 실시하기 전부터 테무진의 휘하에 금나라를 떠난 키탄(거란)이나 중국인 관료들이 존재한 것이 전자의 예이고, 후일 테무진에 패배해 카라 키타이로 피난한 나이만 부락의 쿠출루크는 후자의 예이다. (de Rachewiltz, 1966)

도. 2007년 8월 1일, 몽골 공화국 군대 주도로 이루어진 몽골 유목민들 사이의 전투 리인액트 (Official U. S. Marine Corps photo by Sgt. G. S. Thomas)

다시 테무진에게로 돌아와 보자. 여러 기록을 대조해볼때, 달란 발주트의 패배 이후 테무진이 금나라로 일종의 망명을 했다는 가설은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자무카의 영도 아래 결집한 연합군이 승리하자 몽골 초원에는 정치적 위기를 낳았다. 테무진의 패배는 케레이트 부락의 지배자, 토오릴의 권력을 위축시켰다. 토오릴의 동생 에르케 하라(Erke Qara)는 이 기회를 이용해 토오릴을 축출했고, 토오릴은 카라 키타이의 영역으로 도망쳤다. 자하 감부(Jaqa Gambu)는 금나라로 은신했다. 테무진 역시 얼마 뒤 자하 감부를 따라 금나라로 갔던 것 같다. 라시드 알딘의 기록에 따르면, 테무진은 후일 옹 칸에게 자신이 그에게 했던 두번째 큰 봉사는 중국의 자우후트[Ja'uqut. 『몽골비사』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을 뜻하고 라시드 알딘에 따르면 중국인·탕구트인·여진인·솔랑가인(한반도 북부 거주민?)을 뜻한다]에 억류되어 있던 자하 감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즉, 당시 금나라는 토오릴의 세력이 몽골 고원에서 소멸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테무진과 자하 감부를 활용하여 토오릴의 몽골 고원 귀환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196년 봄, 주르첸, 케레이트, 몽골 연합군은 오난-케룰렌 지역에서 타타르 부락을 격파했다. 이후 금나라는 토오릴을 옹 칸으로, 테무진을 자우드 후리(ja'ud quri)로 임명했다. (Rachnevsky, 1992: 53-54; Allsen, 1994: 337-38)

테무진은 이 승리를 통해서 몽골 고원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테무진이 수여 받은 자우드 후리 칭호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초원에서 테무진의 권위를 늘리는데 큰 도움이 됐음은 틀림없다. 1197년 경,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주르킨 부락에 대한 처벌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성공한 것이 그 예이다. 그는 주르킨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부락민은 자신에게 복속시켰다. 이는 단순히 초원의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주르킨의 지배왕가라 할 수 있는 카불 칸의 맏아들 우킨 바르하그(Ökin Barqaġ)의 후예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몽골의 최고 혈통으로 자리매김한 사건이었다. (Allsen, 1994: 338)

참고문헌

Rachnevsky, Paul (1992). 『칭기스칸』. 김호동 옮김. 지식산업사.

이주엽 (2016). Qazaqlïq, or Ambitious Brigandage, and the Formation of the Qazaqs: State and Identity in Post-Mongol Central Eurasia. Koninklijke Brill.

Allsen, Thomas (1994). “The rise of the Mongolian empire and Mongolian rule in north China.” In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ett,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0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321-413.

de Rachewiltz, Igor (1966). “Personnel and Personalities in North China in the Early Mongol Period.” Journal of th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Vol. 09, No. 1/2: 88-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