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알리 시르 나바이와 티무르조 르네상스

by hanyl 2019. 12. 21.

15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 동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궁정은 티무르조의 군주, 술탄 후세인 이븐 만수르 이븐 바이카라(Sulṭān Ḥusayn b. Manṣūr b. Bāyqarā), 일명 후세인 바이카라의 것이었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1469년부터 1506년까지 헤라트를 통치했는데, 이 시기 헤라트의 영화는 당대 사료에서 여러차례 강조된다. 다울라트샤 사마르칸디[Dawlatshāh Samarqandī, 《타드키라트 알슈아라》(Tadhkirat al-shuʿarā: 시인들의 전기)의 저자. 이 책은 150여 시인의 시와 삶을 다룬다]는 후세인 바이카라 재위를 예술가에 대한 후원과 예술의 발전으로 특징지었다. 후세인 바이카라가 죽은 직후에 헤라트를 방문한 바부르(Bābur)는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시대에 헤라트는 “그 아름다움과 단아함에 열 배, 아니 스무 배가 더해졌다”며 “술탄 후세인 시대는 놀라운 시대였다. 호라산, 그 중에서도 헤라트의 마을은 훌륭한 이들과 뛰어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간에 하나의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모두가 자신의 일을 완벽의 경지로 끌어 올리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 평가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일부 학자는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시대를 ‘티무르조 르네상스’(Timurid Renaissance)라고 극찬할 정도이다. (間野英二, 2009: 274-75; Subtelny, 1979-80: 797)

그러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영광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니잠 알딘 알리 시르 나바이(Niẓām al-Dīn ʿAlī Shīr Navāʾī, 1441년 ~ 1501년), 일명 미르 알리 시르(Mīr ʿAlī Shīr)이다. 현대 우즈벡어 표기에 따라 알리셰르 나보이(Alisher Navoiy)라 불리기도 한다. 미르 알리 시르는 헤라트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바부르에 따르면,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 같은 마드라사에서였다. 샤루흐가 죽은 뒤 나바이의 삶은 부침을 거듭하여 이란과 호라산 각지를 떠돌아다녔지만, 1469년, 마침 헤라트를 장악하고 호라산의 통치자가 된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교우(muṣāḥib) 미르 알리 시르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였다. 이로서 이후 40년 동안 이어질 나바이의 공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바이는 결혼도 하지 않고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궁정 문화를 가꾸고 튀르크어 문학을 장려하는데 자신의 모든 삶을 오롯이 바쳤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부름을 받기 전부터 나바이는 튀르크어를 적극 활용하는 시인으로 호라산에서 유명했다. 그러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에게 등용된 뒤인 1470년대 중반에 그 명성은 호라산을 넘어 각지로 퍼져 나갔다. 나바이는 튀르크 시문학이 이슬람 세계 동부 문학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이바지했다. 이후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는 투르크·몽골 세계와 페르시아·이슬람 세계가 겹치는 복합적인 문화권에서 지식인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Dale, 2009: 209-10)

도1.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의 초상

알리 시르 나바이의 삶

미르자 하이다르[Mīrzā Ḥaydar. 본래 이름은 무함마드 하이다르(Muḥammad Ḥaydar)이지만, 저술에서는 자신을 미르자 하이다르 칭했다. 페르시아어로 《타리히 라시디》(Taʾrīkh-i Rashīdī: 라시드의 역사)를 저술했다]에 따르면 알리 시르는 기야스 알딘 키츠키나 바흐시(Ghiyāth al-Dīn Kīchkīna Bakhshī)의 아들로, 우이구르(위구르) 바흐시 가문에 속했다 (“Aṣl-i vay az bakhshīyān-i Ūighūr”). 바흐시(bakhshī ← 산스크리트어 bkhikshu)는 본래 우이구르제국에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제국기가 되면 이 단어는 ‘서기’나 ‘관리’를 의미하게 되었다. 몽골제국이 불교도 우이구르인들을 관료로 많이 기용했기 때문에 의미가 이처럼 변한 것이다. 티무르제국 시대가 되면, 바흐시는 튀르크 디바니(기능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에 소속되어 실무를 담당했다. (Brophy, 2018; 堀川徹, 2005: 260; 티무르제국이 페르시아 문화의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이들의 업무가 전적으로 페르시아어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차가타이 울루스가 붕괴한 뒤 나타난 티무르제국과 모굴칸국은 위구르 문자를 행정분야에서 여전히 사용했다. 통치자의 칙령은 항상 페르시아어와 위구르 문자로 쓰인 차가타이어, 두 본으로 제작되었다. Boeschoten, 1998: 166-67; 松井太, 2011; 松井太, 2015 참고)

알리 시르의 외할아버지인 부 사이드 창(Bū Saʿīd Chang)와 키치키나 바흐시 역시 티무르조의 다양한 왕공들을 위해 일하며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52년에 발견된 티무르조 사료 《샤라프나마》(Sharaf-nāma: 영광의 책)에 따르면 알리 시르가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퀴캘태쉬(kükältäsh: 젖형제)였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만 하다. 그러나 알리 시르가 어린 시절에는 가문의 전통에 걸맞게 행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울라트샤에 따르면, 키츠키나 바흐시는 유목민마냥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아들을 교육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어쨋든 티무르 제국에서 튀르크·몽골 관습법에 따라 실무를 운용하던 우이구르 바흐시 가문이라는 알리 시르의 중앙유라시아적 배경은 그의 삶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Subtelny, 1979-80: 799-802; Subtelny, 1993: 90)

도2. 미란샤의 이름으로 발행된 칙령. 좌측은 위구르 문자로 작성된 튀르크어 칙령이고, 우측은 그 요지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것이다. 칙령에 대한 설명은 松井太, 2015 참고. 이란국립박물관 소장

알리 나바이의 행복한 어린 시절은 1447년, 샤루흐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알리 시르의 가족은 헤라트와 호라산을 떠났다가 1450년대에야 다시 돌아왔다. 이후부터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가 1469년에 헤라트를 장악하여 알리 시르를 불러들이기 전까지 알리 시르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454년에 키치키나 바흐시 또는 알리 나바이가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 함께 행동했던 것 같다. 1456년에 알리 시르와 술탄 후세인 미르자는 아불카심 바부르의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1457년, 아불 카심이 죽은 뒤에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진다. 술탄 후세인은 카자크 생활을 선택했고, 알리 시르는 마쉬하드, 헤라트, 사마르칸트를 떠돌며 공부를 이어갔다.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지만, 1464년 이후 알리 시르는 사마르칸트에서 호자 파들 알라 아불 라시(Khwāja Faḍl Allāh Abu ’l-Laythī)의 밑에서 법학과 아랍어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1468년, 아부 사이드가 죽자,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가 1469년 3월 24일, 헤라트를 장악했고, 이를 기해 알리 시르 역시 사마르칸트를 떠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에게 합류했다. (Subtelny, 1993: 90)

이후 알리 시르는 티무르 가문 그리고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의 관계를 통해 정권의 중신으로 활동했다. 1472년,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알리 시르를 디바니 알리(dīvān-i aʿlā: 문자 그대로 옮기면 ‘대참사회’)의 아미르(manṣab-i imārāt), 즉 벡으로 임명했다. (앞서 알리 시르의 통칭이 미르 알리 시르라 하였는데, 이 시점에서 아미르, 즉 미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까지 티무르조에서 디바니 알라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티무르 국가에서 행정부는 크게 둘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디바니 부주르기 이마라트(dīvān-i buzurg-i imārāt: 대공들의 자문회) 또는 튀르크 디바니(Türk dīvāni: 튀르크청)라 불리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튀르크 디바니는 티무르조의 튀르크·몽골 부족 수령들이 여기에 소속되었지만, 실무는 대부분 바흐시가 담당했다. 튀르크 디바니는 군대의 소집과 감독을 위시한 군무를 담당하고, 투르크·몽골의 관습법 규정에 따라 생활하는 군인을 관할했다. 다른 관청은 디바니 말(dīvān-i māl:재무부) 또는 사르트 디바니(Sart dīvāni: 사르트청)라 불리었다. 구성원은 대체로 타지크계 관료들이 담당했다. 이는 이름대로 징세와 재무를 취급하였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의 발전을 꾀하며 납세자인 주민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튀르크 디바니가 사르트 디바니보다 더 높은 지위로 여겨졌다. 디바니 알라의 기능에 대해서는 튀르크 디바니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 두 디반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라는 설, 이 두 가지가 주류이다. (Manz, 2007: 79-81; Subtelny, 1979-80: 802-04; 堀川徹, 2005: 260-61; 堀川徹, 2009: 112, 114-15; 행정에서 보이는 이같은 이중구조는 정주지역을 지배한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인다. Biran, 2004: 342-45, 특히 n. 15 참고. 몽골제국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Ostrowski, 1998 참고)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알리 시르를 이용해 국정을 주도적으로 움직이려 했던 것 같다. 혼다미르[Khwāndamīr. 역사서 《하비브 알시야르》(Ḥabīb al-siyar: 전기들의 친구)의 저자]에 따르면 알리 시르는 무흐르다르(muhrdār: 옥새를 관리하고 날인을 담당하는 관직)로 임명됐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가 미르 알리 시르에게 부여한 권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미르 알리 시르는 부여받은 인장을 바를라스 부의 무자파르(Muẓaffar Barlās)를 제외한 다른이들의 인장보다 위쪽에 찍을 권한이 있었다. 이로 인해 튀르크 디바니의 다른 귀족들은 미르 알리 시르가 새로 얻은 권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겁에 질려 지켜봤다고 한다. 그러나 미르 알리 시르는 그 권력을 활용하지 않았다. 처음 아미르로 임명될때도 알리 시르는 끝까지 거부하다가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강권에 겨우 받아들였다. 인장 관리자로 임명된 뒤에도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게 종이의 맨 밑에 인장을 찍었고, 그나마도 직위를 걷어차버렸다. 1487년에는 아스트라바드 지역의 하킴(ḥākim: 직역하면 ‘권위를 가진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행정관으로 새겨야한다)으로 임명되었다가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퇴직을 요청했다고 한다. 숩텔리는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가 튀르크·몽골 귀족층에 속하지 않은 관리를 임용했다가 많은 반발에 직면했기 때문에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와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양쪽 모두가 이를 원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Subtelny, 1979-80: 802-06)

그러나 술탄 후세인의 총애가 미르 알리 시르를 괴롭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가로 소유르갈(soyūrghāl)을 수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에서 소유르갈은 귀족에게 부여되는 군사 봉토를 의미했다. 소유르갈을 부여받은 사람은 일정 토지의 수조권을 부여받았다. 티무르조 시대에는 그 범위가 더 넓어져, 통치자의 총애를 받는 행정관리나 종교사제, 심지어 문인들까지 주어졌다. 어떤 사료는 알리 시르가 막대한 양의 소유르갈을 하사받아 하루에 75,000 디나르(dīnār: 이슬람 세계의 금화. 비잔틴제국의 솔리두스를 모방했기 때문에 본래는 가치가 같았다. 하지만 포스트 몽골 시대 마 와라 알나흐르에서는 은화, 동화 디나르도 발견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가치를 환산하기는 어렵다. Miles, 1991: 298)를 벌어들이고, 하루에 15,000 디나르를 소비했다고 한다. 이 같은 수치를 그대로 신뢰할수는 없지만, 알리 시르가 호라산에서 특히 물산이 풍족한 헤라트 북쪽에 소유르갈을 부여받았고, 당대에 눈에 띄게 부유했음은 사실로 보인다.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 소유의 건물이 헤라트 인근에만 400개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Subtelny, 1979-80: 806-07)

1488년에 아미르 직위도 벗어던진 미르 알리 시르(다만 경칭으로 아미르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되었다)는, 바부르에 따르면, 이후 얼마동안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전의 경험 때문인지 특정한 관직을 맡지는 않았지만(미르 알리 시르가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재상이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복심과 같았던 점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알리 시르는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와 그에 반항하는 아들들 사이를 중재하거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가 원정으로 헤라트를 비울때 그의 직위를 대행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는 1501년 1월 3일,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를 위해 일한지 40년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유해는 헤라트에 매장되었다. (Subtelny, 1993: 90-91)

당대에나 후대에나 미르 알리 시르의 성격에 대해서는 나쁜 평이 거의 없다. 알리 시르는 정직하고 품위있으며, 여러모로 너그러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미르자 하이다르나 바부르는 알리 시르에게 단 한가지, 너무 감수성이 뛰어난 것이 단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에 따르면 이 감수성은 예술에 대한 사랑과 결합되어, 나바이가 예술에 있어서는 가학적일 정도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알리 시르의 개인적인 삶은 굉장히 금욕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첩이나 창녀와 자지도 았았기 때문에 자식도 없었다. 영적인 스승이자 친구, 피후견인이었던 낙쉬반드 종단의 알둘라흐만 자미(ʿAbd al-Raḥmān Jāmī: 일명 페르시아 문학사상 ‘마지막 시인’)가 낙쉬반드 종단에 들라고 무던히 설득했지만, 알리 시르는 신비주의에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시아파에 가까운 입장을 견지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당시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평균 이상으로 시아파에 가까운 태도를 내비추었다는 증거는 없다. (Subtelny, 1993: 92)

문인 나바이

알리 시르는 군주의 특별 보좌관으로 지내며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활약했지만, 동시에 대단히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다. 그는 나바이(Navāʾī)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나바이는 차가타이(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글을 썼다. 바부르는 특히 튀르크어로 시를 짓는데 있어서 나바이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이다. 한편나바이는 음악에도 정통했다. 악기를 직접 연주하고 작곡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대에는 음악이 문인의 교양 가운데 하나로 중시되고 있었다. 궁정 생활이나 회합에는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間野英二, 2009: 280, 282)

도2.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궁정 연회

나바이는 특이하게도 튀르크어가 페르시아어보다 문어로 더욱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지지 아래 1499년에 발표된《무하카마트 알루가타인》(Muḥākamat al-lughatayn: 두 언어에 관한 판결)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나바이는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의 어휘 등을 비교하며 튀르크어가 페르시아어보다 우위성을 가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아마 당시 페르시아어 문학 작품은 문장의 수사에 너무 치중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을 좋아했고, 또 그로 유명했던 나바이의 기호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논문에 사용된 단어의 62.6%가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단어였다고 하니,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쨋든, 나바이는 차가타이어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차가타이어로 쓰여진 나바이의 작품들은 페르시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꽤 드문 경우이다. 나바이만의 노력은 아니었지만 이 이후에 튀르크어는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 못지 않은 문화어로 인식되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바부르가 회고록을 차가타이어로 적은 것 역시 나바이의 영향으로 추측될 정도이다. 이런 연유로 후기 차가타이어(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차가타이어)는 ‘나바이어’(Navāʾī dili)라 불리기도 한다. (間野英二, 2009: 280-81; 間野英二, 2010: 4; Kut, 1989; Doerfer, 1991)

나바이가 두각을 드러낸 또 다른 분야는 문화 활동의 후원자 역할이었다. 가장 유명한 그의 문화 후원은 건축 활동이었다. 알리 시르 나바이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바크프[Vaqf 또는 와크프(Waqf)]로 운영했다. 바크프란 이슬람법에서 규정한 재산 기진 제도이다. 개인이 자신의 재산(예컨데 토지)로부터 얻은 수익을 특정 자선 목적으로 영구 충당하기 위해 대상이 되는 개인 재산의 소유권 또는 그 행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크프는 영원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바크프 재원은 부동산이 일방적이었다. 또한 “바크프는 선행이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바크프 재원에서 얻어진 수익은 종교 시설이나 공공시설의 건설과 유지·운영, 여행자나 빈민 구제 등의 자선행위가 명목상으로나마 들어갔다. 바크프 재산은 통치자가 몰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족의 재산 보존을 위해 전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바크프 제도를 통해 공공시설이나 상업시설의 건설이 이루어졌기에 마냥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예배를 지도하는 이맘의 급료, 마드라사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생활비, 빈곤구제소에서 제공하는 식사 등의 서비스나 마을 순찰이나 청소 등 많은 서비스가 바크프 재원을 통해 충당되었다. (間野英二, 2009: 277-78; 堀川徹, 2009b: 185-87)

어느 기록에 따르면 알리 시르 나바이가 헤라트를 포함한 호라산 지방에서 건설 혹은 개축한 건축물의 수가 다리 14개, 공공목욕탕 9개, 대상숙소 52개, 저수지 19개, 다르 알후파즈(Dār al-ḥuffāẓ: 코란 독송자를 위한 학원) 1개, 병원 1개, 빈민용 식당 5개, 숙박시설 7개, 마드라사 4개, 모스크 20개, 낙타 우리 1개, 집단예배실 1개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것이 이흐라시야 단지(Ikhlāṣiyya: 충성 단지)였다. 다울라트샤의 기록에 따르면 알리 시르 나바이의 생전에는 이흐라시야 단지는 모스크, 마드라사, 숙박시설, 병원, 공공목욕탕 등으로 구성되었다 숙박시설에서는 매일 100명에게 먹일 식사와 숙박의 편의가 제공되었고, 매년 약 200벌의 의류도 무료로 공급되었다. 혼다미르에 따르면, 1500년에 이흐라시야의 마드라사에는 7명의 선생님이 있었다. 당시 술탄 후세인의 마드라사에 8명, 샤루흐와 가우하르 샤드의 마드라사에 각각 4명의 선생님이 고용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이다. 이흐라시야의 번창과 나바이의 재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間野英二, 2009: 276-77; 이 마드라사의 구성과 운영에 대해서는 알리 시르 나바이가 직접 적은 차가타이어 바크프 증서가 남아있다. 원본은 페르시아어였지만, 후일 직접 차가타이어로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페르시아어 사본은 소실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Subtelny, 1991 참고)

앞서 언급한 건축 활동도 좋은 예지만, 자신의 집에 시인이나 예술가, 학자들이 모이는, 마즐리스(Majlis: ‘머무는 장소’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일종의 ‘살롱’으로 새길 수 있다)을 마련한 것도 유명하다. 나바이의 마즐리스는 비판 정신이 풍부한 문예비평의 공간으로 이름 높았다. 당시 문인들은 여기에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영예로 받아들였다. 바부르는 나바이의 문예 후원에 대해서도 나바이만큼 예술가나 학자들에게 아낌없는 원조를 제공한 후원자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극찬을 바쳤다. 미르자 하이다르는 구체적으로 알리 시르 나바이의 물질적 후원을 받은 예술가들을 열거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물 몇몇만 꼽아보아도 그 무게감이 상당하다. 역사가 미르혼드(Mīrkhwānd)와 혼다미르, 다울라트샤, 시인, 일명 페르시아 문학사상 ‘마지막 시인’ 압달라흐만 자미, 화가 비흐자드(Bihzād) 등이 나바이의 후원을 받았다. 나바이가 티무르조 말기 헤라트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또 그를 중심으로 한 문화 활동이 티무르조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공헌했는지 알 수 있다. (間野英二, 2009: 281-82; Subtelny, 1993: 92)

참고문헌

間野英二 마노 에이지 (2009). “티무르조 문화.” 間野英二, 堀川徹 편,《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현승수 옮김. 책과함께: 261-84.

間野英二 (2010). “바부르 나마(Bābur-nāma).” 중앙유라시아연구소 2010년도 문명아카이브 해제 프로젝트.

堀川徹 호리카와 토오루 (2005).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 소나무: 191-275.

堀川徹 (2009a). “중앙아시아의 융성: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間野英二, 堀川徹 편,《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현승수 옮김. 책과함께: 91-116.

堀川徹 (2009b). “투르크 이슬람 사회의 성숙: 와크프 제도와 타리카.” 間野英二9, 堀川徹 편,《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현승수 옮김. 책과함께: 182-94.

Kut, Günay (1989). “Ali Şîr Nevâî.” TDV İslâm Ansiklopedisi: https://islamansiklopedisi.org.tr/ali-sir-nevai

松井太 마츠이 다이 (2007). “An Uigur decree of tax exemption in the name of Duwa-Khan.” Proceedings of the Mongolian Academy of Sciences: 60-68.

松井太 · 渡部良子 와타베 료코 · 小野寛 오노 히로시 (2015). “A Turkic-Persian Decree of Timurid Mīrān Šāh of 800 AH/1398 CE.” ORIENT, Vol. 50: 52-75.

Biran, Michal (2004). “The Mongol Transformation: From the Steppe to Eurasian Empire.” Medieval Encounters, Vol. 10, Issue 1-3: 339–61.

Boeschoten, Hendrik and Marc Bandamme (1998). “Chaghatay.” In Lars Johanson and Éva Ágnes Csató (eds.), The Turkic Languages. Routledge: 166-78.

Brophy, David (2018). “The Uyghurs: Making a Nation.” Oxford Research Encyclopedia of Asian History. DOI: 10.1093/acrefore/9780190277727.013.318

Dale, Stephen (2009). “The later Timurids c. 1450–1526” in Nicola Di Cosmo, Allen J. Frank and Peter B. Golden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18.

Doerfer, Gerhard (1991). “Chaghatay Languages and Literature.”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chaghatay-language-and-literature

Manz, Beatrice Forbes (2007). Power, Politics and Religion in Timurid Ir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Miles, G. C. (1991). “Dīnār.”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2. Koninklijke Brill: 297-99.

Ostrowski, Donald (1998). “The tamma and the dual-administrative structure of the Mongol empire.”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Vol. 61, No. 2: 262-77.

Subtelny, Maria Eva (1979-80). “ʿAlī Shīr Navāʾī: Bakhshī and Beg.” Harvard Ukrainian Studies, Vol. 3/4, Part 2: 797-807.

Subtelny, Maria Eva (1991). “ʿA Timurid Educational and Charitable Foundation: The Ikhlāṣiyya Complex of ʿAlī Shīr Navāʾī in 15th-Century Herat and Its Endowment.”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 111, No. 1: 38-61.

Subtelny, Maria Eva (1993). “Mīr ʿAlī S̲h̲īr Nawāʾī”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7. Koninklijke Brill: 90-93.

도1.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의 초상. 마흐무드 무자히브 작. 16세기 마쉬하드. 아스타니 쿠드시 라자비 미술관 소장.

도2. 미란샤의 이름으로 발행된 칙령. 이란국립박물관 소장.

도3.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궁정 연회.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장미를 들고 있다. 비흐자드 작. 1488년 헤라트. 이집트 국립박물관 소장.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터키의 민군관계 Ⅰ 들어가며  (0) 2020.01.06
티무르 르네상스  (0) 2019.12.30
차르 권력의 기원, 포메스티예  (0) 2019.12.20
테무진 생애 공백의 10년  (1) 2019.12.04
다르샨 의식  (0)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