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라고 하면 “한족의 마지막 통일 왕조”라는 상이 강하다. 실제로 명태조 홍무제는 한족 문화의 이상 사회 부흥을 목표로 선언하고 당과 송 체제의 부활을 주장하기도 했으니,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만큼 실제로 명사 연구에 있어서는 몽골의 유산이 많이들 부정되어 왔다. (이같은 시각에 대해서는, Rossabi, 1998: 221; Brook, 2014: 508 참고)
그러나 실제로 명나라를 검토하면 몽골의 영향이 꽤 짙게 나타난다. 명대의 중앙 정부 체제나 세습되는 군 장교들이 통솔하는 군사 체계 등은 카안 울루스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중국의 ‘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 행정 체제 역시 몽골대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대명을 몽골 후계 국가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岡田英弘, 2000: 264-67; Roberts, 2012: 50; Serruys, 1957)
이같은 몽골의 흔적은 명대의 관복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흉배(胸背)이다. 흉배란 왕족과 백관이 입는 상복의 가슴과 등에 덧붙이던 사각형의 장식품으로, 그 품계에 따라 문양이 달라졌다. 이같은 전통은 당송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송대에는 관품에 따라 의복 원단의 문양과 색깔의 차이를 두었을 뿐이다. (門井由佳, 2005: 43)
흉배와 유사한, 의복 가슴팍에 문양을 새긴 흔적은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나타났다. 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투르판의 마니교 회화 자료에 흉배와 유사한 것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흉배 비스무리한 것은 종교적 상징을 담았지, 착용자의 신분을 말해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중앙아시아의 전통은 원대 몽골 귀족을 통해 처음 중국에 전파되었다. 몽골의 흉배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을까? 《원사》(元史)에 관련된 서술이 없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운견(雲肩)과 유사하게 몽골인의 세계관과 연관이 있었지 않을까 추정한다. (정혜란, 2001: 214; Shea, 2016: 158-63; 門井由佳, 2005: 43; 운견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는 Cammann, 1951: 1-9 참고)
이 ‘장식판’이 ‘흉배’로 재정된 것은 1391년(홍무 23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흉배’의 채용이 그리 순탄하기만 하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명태조 주원장이 몽골식 의복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명실록》(明實錄)에 따르면, 주원장은 1367년, 1368년, 1372년, 심지어 1391년에도 몽골식 의복을 착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주원장의 명령은 잘 먹혀들지도 않았던 것 같다. 《명실록》은 유사한 명령이 1443년과 1491년에도 다시 내려졌음을 전해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1391년의 흉배 제정은 정말 하다하다 어쩔 수 없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Serruys, 1957: 148-70; Shea, 2018: 35)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명의 제도에 편입된 흉배는 명나라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였다. 이웃인 조선은 물론이고, 명이 멸망한 뒤 중국을 집어삼킨 청 역시 명나라의 흉배 제도를 확대,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상 논의에 대해서는 정혜란, 2001 참고) 그런 점에서 흉배 역시 문화적 혼합이 가진 창조적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참고문헌
정혜란 (2001). “중국흉배와 한국 흉배의 비교 고찰.” 《 고문화》 제57집: 211-31.
Brook, Timothy (2014). 《하버드 중국사 원·명: 곤경에 빠진 제국》. 조영현 옮김. 너머북스.
Roberts, J. A. G. (2012). “중국: 명제국.” 《아시아의 대제국들》. 박경혜 옮김. 푸른길: 46-71.
Cammann, Schuyler (1951). “The Symbolism of the Cloud Collar Motif.” The Art Bulletin, 33-1: 1-9.
Rossabi, Morris (1998). “The Ming and Inner Asia,” in Denins Twitchett and Frederick W. Mote,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08, The Ming Dynasty, 1368-1644, Pt.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 221-71.
Serruys, Henry (1957). “Remains of Mongol Customs in China During the Early Ming Period.” Monumenta Serica, 16-1/2: 137-90.
Shea, Eiren L. (2006). “Fashioning Mongol identity in China (c. 1200-1368).” 박사논문. University of Pennsylvania.
Shea, Eiren L. (2008). “The Mongol Cultural Legacy in East and Central Asia: The Early Ming and Timurid Courts.” Ming Studies, 78: 32-56.
岡田英弘 오카다 히데히로 (2000). “China as a Successor State to the Mongol Empire,” in David Morgan and Reuven Amitai-Preiss, eds.,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Brill: 260-72.
門井由佳 카도이 유카 (2005). “Beyond the Mandarin Square: Garment Badges in Ilkhanid Painting.” HALI, 138: 42-47.
그림
그림 1. 쌍육(雙陸)을 즐기는 몽골 귀족들. 진원정(陳元靚),《사림광기》 (事林廣記) 지순본(至順本)의 삽화. 출처: https://www.newton.com.tw/wiki/%E9%9B%99%E9%99%B8%E6%A3%8B
그림 2. 사환(謝環), 《살구동산에서의 우아한 모임》(杏園雅集圖; 1437년?).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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