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71 터키에 출간된 티무르조 관련 사서들 들어가며 테뮈르와 테뮈르조 관련 연구는 터키에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다. 아타튀르크부터가 역사 연구 기관들에 테뮈르에 관심 많다고 수 차례 어필했을 정도다. 대중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테뮈르 연구의 정점으로 꼽히는 만츠(B. F. Manz) 교수의 The Rise and Rule of Tamerlane만 해도 연구서 임에도 불구하고 몇십쇄가 판매되었을 정도이다. 역사 연구는 어떨까? 1차 사료의 번역 내역을 한번 알아보면 연구가 어느 정도 활발한지 가늠해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하여, 터키에 소개된 테뮈르조 사료 번역 현황을 한번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2019년 퀴브라 튀트메즈(Kübra Tütmez)가 발표한 “Timurlu Devleti Tarihine Dair Tür.. 2020. 8. 15. 흉배, 중국에 남은 몽골의 유산 명나라라고 하면 “한족의 마지막 통일 왕조”라는 상이 강하다. 실제로 명태조 홍무제는 한족 문화의 이상 사회 부흥을 목표로 선언하고 당과 송 체제의 부활을 주장하기도 했으니,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만큼 실제로 명사 연구에 있어서는 몽골의 유산이 많이들 부정되어 왔다. (이같은 시각에 대해서는, Rossabi, 1998: 221; Brook, 2014: 508 참고) 그러나 실제로 명나라를 검토하면 몽골의 영향이 꽤 짙게 나타난다. 명대의 중앙 정부 체제나 세습되는 군 장교들이 통솔하는 군사 체계 등은 카안 울루스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중국의 ‘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 행정 체제 역시 몽골대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대명을 몽골 후계 .. 2020. 6. 20. 터키의 민군관계 完 마치며 군부의 계도는 터키 공화국 정치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군부의 계도라는 전통은 오스만 제국 말기에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해 이는 아타튀르크의 유산이라기보다는 독일인 장군 폰 데어 골츠와 연합진보회의 유산이었다. 물론 1950년대 이후의 터키 군부는 분명 1970년대의 라틴 아메리카나 그리스 군부와 달랐다. 이들은 권력을 잡거나 군사정권을 수립하려 들지 않았다. 터키 군부는 스스로를 세속주의의 수호자이자 국가 안보 그 자체로 보았다. 따라서 군부는 터키 정치를 주시하고, 때로는 개입하면서, 터키 정계에 군부의 존재를 제도화했다. 군부는 1960년, 1971년 그리고 1980년에 직접 정치에 개입했으나, 1997년 이후로는 정치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군부는 1960년 이후 최후통첩이나 담화 등을 통해 문.. 2020. 5. 19. 터키의 민군관계 Ⅵ 에르도안주의와 군부 계도의 끝 복지당 해산 명령이 내려지기 직전, 복지당을 구성하던 정치인들 다수는 1997년 12월 17일 미덕당(Fazilet Partisi)을 창당했다. 미덕당에는 모국당의 일부 국회 의원이 가세하여 총 의석수는 146석이 되었다. 사실상 미덕당은 복지당의 이름만이 바꾸어 만든 정당이었고 그 구성원과 정치노선은 대동소이했다. 복지당은 본래 민족적 가치론자(Milli Görüçü)를 자처하며 보수민족집단을 이루었다. 이들은 당수 에르바칸을 ‘호자(Hoca)’라 부를 만큼 이슬람 전통을 강조했다. (김대성, 2008: 6-7) 그러나 미덕당 창당을 전후로 미덕당 내부에서는 당내 소장파를 중심으로 에르바칸 일파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소장파는 에르바칸이 표방하는 보수성향의 민족적 가치론자의 노선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2020. 4. 29. 터키의 민군관계 Ⅴ 권위주의 헌법의 그늘 1980년 9월 12일, 터키공화국 역사상 두 번째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또다시 의정이 중단되었다.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참모총장을 비롯한 5인의 군인으로 구성된 국가안보회의(Millî Güvenlik Konseyi, MGK)가 다수당제에 의한 양원제 입법부를 가진 민주공화국을 일시에 장악했다. 이들은 근 10년 동안 심해져가는 정치적 폭력, 경제의 후퇴, 폭력적 노동쟁의, 무능한 연립내각 등으로 인해 혼란하고 피폐해진 국가를 구하고 민주정치의 기초를 재확립하겠다고 선언하며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을 해산시켰다. 대학 역시 엄격하게 통제하여, 많은 교수들이 해직당했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테러단체가 소탕당했다. 그리하여 케난 에브렌 사령관을 필두로 한 고위급 장성들로 구성된 국가안보회.. 2020. 4. 11. 훈 제국에서 헝가리까지 〈불가리아 왕후표〉: 흉노에서 불가리아까지 10년쯤 전에 훈 제국과 헝가리가 관련이 있다는 썰이 떠돌았다. 근거 가운데 하나가 HUNgary의 HUN이 HUN 제국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권 초판에도 이런 썰이 있다는 정도의 언급이 있었으니,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썰이라 할 수 있겠다. 우선 HUNgary의 HUN이 HUN 제국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학자들은 헝가리라는 말이 튀르크어 온오구르(On-Oğur)에서 나왔다고 본다. 온(On)은 튀르크어에서 ‘10’을 뜻한다. 오구르(Oğur) 역시 튀르크어인데, 오구즈(Oğuz)의 이형으로 ‘부락들’이라 새길 수 있다. 즉, 온오구르란 말은 10개 부락의 연맹체로 해석할 수 .. 2020. 3. 29. 〈불가리아 왕후표〉: 흉노에서 불가리아까지 1866년, 러시아 제국의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포포프(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Попо́в, Andrey Nikolayevich Popov)는 “러시아 고문서의 재발견(Обзор хронографов русской редакции, Obzor Chronographov russkoi redaktsii)”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통해 〈불가리아 왕후표〉(Именник на българските ханове, Imennik na bulgarskite khanove, Name List of the Bulgar Khans)의 존재가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사본은 3가지인데, 두종은 모스크바에, 한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장되어있다. 세 사본 모두 러시아어로 작성되었는데, 15세기 .. 2020. 2. 3. 터키의 민군관계 Ⅳ 군부 개입의 시대 지상군 사령관 제말 귀르셀(Cemal Gürsel)은 소수의 장교들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0년 5월 27일 새벽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멘데레스 등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장악하였다. 이후 귀르셀과 40세 이하인 37명의 장교들은 국가단합위원회(Millî Birlik Komitesi)를 구성해 권력을 장악했다. 1961년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38%나 나온데 놀란 이들은 멘데레스와 2명의 각료를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Robinson, 1998: 199-202) 그러나 폭력적인 쿠데타 과정과 별개로, 새로 도입된 1961년 헌법은 제1공화국 헌법보다 더 자유주의적이었다. 쿠데타 발생 직후 이스탄불대학교 출신 법률가들이 주가 된 위원회가 신헌법 초안을 발표.. 2020. 1. 29. 터키의 민군관계 Ⅲ 케말주의 공화국 제1공화국 시기에 군부의 역할은 여러모로 ‘후견인’이라 할만했다. 즉, 군부는 터키 공화국의 세속화와 근대화 개혁을 ‘후견’한 것이다. 이 시기 군부의 정치 개입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민군관계는 1950년대 이후 더 복잡해졌다. 터키가 차츰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하며 다당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헤일(William M. Hale)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터키 정치에서 군부의 역할을 3시기로 나누어 조망했다. 첫번째 시기인 1923년부터 1926년까지(즉, 아타튀르크 시대), 아타튀르크는 가능한 한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군 장교들은 이 시기 철저히 아타튀르크의 개인적인 권력을 위해 일했다. 그 다음 시기는 1926년부터 1950년까지(즉, 케말주.. 2020. 1. 22. 이전 1 2 3 4 5 6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