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테일러,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by hanyl 2020. 10. 12.

A.J.P. 테일러 (2020).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 유영수 옮김. 페이퍼로드. 400면. 25,000원.
Taylor, Alan John Percivale (2009). The First World War: an Illustrated History. Penguin Books.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현대사에 큰 관심이 없다. 내게 현대사는 전근대 역사에 비해 재미는 없는 반면, 너무 가까워서 심적으로는 불편한, 그런 영역이다. 일상생활에서 편식이 심한 편인데, 문득 생각해보니 공부나 독서에서도 그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의식적으로 그런 성향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보려 노력중이다. 편식은 해로운 것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어쨋든 지금에 영향을 준 과거의 사건들이라고 하면 시기적으로 가까울수록 비중이 더 커지는게 자연스럽기도 하니까.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전쟁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18세기 이전 그곳의 역사는 알아도 근현대사는 도통 모르기 때문에 이 분쟁에 대해서는 얼개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물론 이 분쟁은 책의 내용과 크게 관련이 없다)

어떤 분야의 역사를 처음 파볼때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한 사람의 학자가 시간 순서로 적은 이야기책을 읽는 것이다. (학자는 아니지만)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도 그래서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어쨋든 재미가 있으니 한번 흐름만 타면 고대 말기까지 로마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거기서 머물러버리는 쪽이 아닐까.

서론이 길었는데, A.J.P. 테일러 교수의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도 그런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한 사람의 학자가 시간순에 따라 이야기체로 꽤나 세세하게 적은 책이다. 옮긴이인 유영수 교수께서 적었듯, 문장도 멋들어지기 때문에 글을 읽는 재미도 좋다. 처음 출간된지 반 세기가 넘어가는 시기에도 널리 인정을 받는 책에게 당연한 미덕이겠지만, 그걸 자연스레 한국어로 번역한 옮긴이의 실력도 출중하다는 느낌이다.

책의 또 다른 미덕은 간결함이다. 400쪽에 달하는 책인데 어떻게 간결하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이것도 분량이 적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큰 기여를 한 점이, 내가 보기에는, 테일러 교수가 개개의 전투나 병참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단 사실이다.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겠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개설서이기에 국제정치 시각에 집중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책 제목에서 보이듯 곳곳에 지도와 (흑백)사진이 있기 때문에 간결한 서술에도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책을 읽으면 수없이 많은 인명들이 튀어나오는데, 책 뒤쪽에 포함된 인물 소개를 길잡이로 삼으니 전체 흐름을 잃지 않고 계속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주로 공부하는 분야가 중앙유라시아쪽이다 보니 오스만 제국-터키 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테일러 교수는 이 방면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렇게 주목받지 못한 분야가 분명 많을 것인데, 사실 400면 정도의 분량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이는 차후 다른 책이나 논문을 통해 내가 보충해나가야 할 일일 것이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참고문헌”이나 “더 읽어보기”가 없다는 점이다. 혹시나 해서 원서를 찾아보았는데, 원서에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참고문헌”을 뒤적거리면서 더 세분화된 연구를 찾아보는 스타일이라 많이 아쉬웠다.

한국어판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만족한다. 1980년 페리기 출판사(Perigee Book)에서 나온 원서와 살짝만 비교해봤는데, 책의 디자인은 한국어판이 월등히 좋아보였다. 일부 출판사들이 뻔뻔하게 생략하는 지도 목차와 사진 출처가 포함된건 물론이다. 앞서 언급한 인물 소개도 1980년 판본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는데, 만약 한국어판에만 포함된 것이라면 정말 감사한 작업해주셨다. “찾아보기”가 포함되지 않은 옥의 티가 있지만 말이다.

종합하자면,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은 전문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절묘하게 잘 잡은 명저라 생각한다. 분량적으로도 과다하지 않고 지은이와 옮긴이의 글쓰기 능력도 출중하다. 어떤 주제를 처음 공부할때 이렇게 좋은 책이 존재하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차후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도서가 더 나오길 기대한다.

본 서평은 역개루 카페 서평 이벤트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2020년 10월 6일 책을 수령했다. 8일 일독을 시작해 10일 완료했다. 11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