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김인희 편, 『움직이는 국가, 거란』

by hanyl 2020. 10. 8.

김인희 편 (2020). 『움직이는 국가, 거란: 거란의 통치전략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311쪽. 17,000원.

중앙유라시아사에서 어떤 분야에 대한 학계의 중론이 알고 싶을때 자주 찾아보는 책이 있다. 윤영인 외, 『10~18세기 북방 민족과 정복왕조 연구』(동북아역사재단, 2009)와 윤영인 외, 『외국 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동북아역사재단, 2010)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두 책을 통해 중앙유라시아사 공부에 있어 시각이 크게 확장되었지만, 전문 학자들에게는 단순한 연구동향과 연구사 정리에 머물렀던 점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오늘 소개할 책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선보인 앞의 두 책에 대한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책머리에”의 표현을 빌자면, “이번 연구에서는 한국적 관점의 정복왕조론 정립을 목적으로, 거란·금·원·청에 대한 연구를 4년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이를 종합하는 이론서를 집필하고자 한다. 이 책은 그 첫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하여 서양이나 일본, 중국 학계와 차별되는 독자적인 한국형 정복왕조론을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본문 10쪽)

책은 8개 장으로 구성된다. 김인희 선생이 작성한 1장 “최초의 정복왕조, 거란”은 정복왕조론의 발생과 중국학계의 반응에 대해 간략히 다루었다. 같은 저자가 작성한 2장 “움직이는 국가, 거란”은 거란 국가에 대한 개괄이라 할 수 있다. 국호 문제부터 시작해서 기원과 역사, 통치 원칙, 5경의 운용, 날발 등을 다루며 결국 거란 국가가 가진 다면적 특성을 조망했다.

윤영인 교수가 적은 3장 “거란의 대외정책과 동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의 세력 균형”은 거란의 외교사를 검토하는데서는 거란 중심적 접근이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르면 침략자라는 인상과 달리 거란은 그다지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거란인들은 성종 이후 다원적 국제질서의 맹약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다. 오히려 공격적인 쪽은 한족 왕조들이었다.

이성규 교수의 4장 “거란의 정체성 유지와 언어·문화 정책”은 거란의 언어 정책을 통해 자신들만의 정체성 유지 노력을 조망했다. 우선 거란인들은 다수의 한족 언어 화자 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하고, 한문 서적을 번역하고 자국 역사를 거란어로 기록하였으며, 문학어로도 사용했다. 또한 거란어 보존을 위해 애책, 묘지명과 비문 등을 거란어로 작성하였다. 한편 한족이나 위구르, 여진 등 집단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하는 포용 정책을 실시했다. 다만 본문에서 ‘알타이어족’ 등 논쟁적인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제시되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이유표 선생이 적은 5장 “거란의 한인 통치를 위한 군정기구 운용”은 북면관제와 남면관제를 중심으로 거란의 군사 제도를 검토하여 거란 국가가 정복왕조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거란은 ‘인속이치’(因俗而治), 즉 각 종족의 풍속에 따라 통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유목 부족은 전통적인 부족을 통해, 한인과 발해인은 주현제를 통해 제국을 운영했다. 기본적으로 북남면관제에서 북추밀원은 거란인이 중심이 되었고, 남추밀원은 한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흥종 이후 거란인이 남추밀원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거란은 차츰 정주 세계의 행정체계 운용법을 익혀 단순한 유목 국가를 넘어선 정복왕조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지훈 교수의 6장 “거란의 유학 수용 원인과 거란화”는 거란 통치자들의 유학 수용과 유학의 거란화에 대해 다루었다. 거란은 유목세계의 제도와 이념만으로 한족을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식 이념과 통치 방법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거란의 한화가 아니었다. 이들은 자국의 의례와 유학을 접목하여 반대로 유학을 거란화시켰다. 이 점은 김인희 선생이 적은 7장 “북방 민족 최초의 정통왕조, 거란-황제(黃帝) 후예설을 중심으로”에서 잘 드러난다. 거란이 중국의 정통왕조가 되고자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러면서도 날발, 거란 문자 사용 등을 통해 자신들만을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금을 거쳐 대원과 대청에 이르러서는 북방 정권이 중국의 정통왕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김인희 선생과 윤영인 교수가 함께 작성한 8장 “정복왕조의 길을 연, 거란”은 책의 결론부라 할 수 있다. 두 분은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다시 한번 요약하며 거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대상임을 보였다. 이는 마지막 단락의 서술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본 연구팀은 … 거란을 단선적(單線的)으로 중화민족이 일체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란 역사를 중국사의 한 시대로 설정하고, 일방적인 문화적 동화 현상(한화)이라는 단선적 발전의 틀에서 접근하는 것은 정복왕조의 역사적 특성과 중요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권을 형성한 거란이 중원, 만주, 한반도, 나아가 내륙 아시아 여러 지역에 미친 영향을 간과하게 한다. 다민족 제국 거란은 필요에 따라 한족 제도와 전통문화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거란과 한족의 전통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하였다. 거란 제국은 정치·제도·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일원적(一元的) 체제였던 한족 왕조 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복왕조 거란은 지배자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고자 본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언어·전통·문화·종교에서 차별되는 이원(二元)적 체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던 것이다.”(본문 279쪽)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저자들은 거란과 한족의 정치적, 문화적 유산 사이의 차이점을 결합하고 나아가 이를 초월하면서 거란 국가의 비전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거란의 기원과 그 영향력을 잘 묘사해주었다. 그러나 책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저자들은 “거란이 연 정복왕조의 문을 통해 이후 금·원·청은 중원으로 향하는 발검을을 더욱 세차게 내딛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거란 멸망 이후 북방 지역에서 흥기한 국가들이 진정한 ‘정복왕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거란의 성장과 멸망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한 학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본문 239쪽). 그러나 막상 책에서 거란의 경험을 이후의 국가들이 거란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예컨데 스기야마 마사아키 교수는 칭기스의 참모 중 참모인 야율아해(耶律阿海)와 야율독화(耶律禿花) 형제를 비롯한 거란인들의 존재를 지적하고, 몽골 제국이 거란 제국의 조직과 체제를 대폭적으로 도입했다고 적었다. 마사아키 교수는 거란이 몽골과 언어도 유사하고 유목민으로서 제국 통치의 경험을 지닌 위대한 선배였다며, 몽골을 가르친 교사라고까지 표현했다. (杉山正明, 1999: 39-40, 52, 68)

편집면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우선 주석이 모두 후주로 처리되었다. 물론 각주로 처리할 경우 일반 독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질 수도 있으나, 이론서를 표방하고 있는만큼 그런 부분을 희생하더라도 각주를 두는 쪽이 나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참고문헌이 부재한 점도 아쉽다. 주석을 통해 출처가 제시되긴 하지만, 참고문헌의 일목요연한 정리도 중요하다. 한편 본문에는 도판이 다양하게 제공되어 이해를 돕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흑백인 점도 아쉽다. 지도는 몰라도 그림이나 사진은 채색본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회골(回鶻)과 위구르(Uyghur)가 혼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쉽다.

종합하자면,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움직이는 국가, 거란』은 거란 국가에 대한 훌륭한 개설서라고 본다. 지금껏 한국에 소개된 거란과 관련된 개설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외국 서적의 번역이거나 발간 후 시간이 오래된 상황이었다. 반면 이 책은 최근 국내외 학계의 연구 결과를 반영한 한국의 연구서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어느 책에 견주어도 거란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대상을 부족함 없이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나올 여진, 대원, 대청에 대한 이론서도 기대된다.

:)

* 2020년 10월 3일 구매, 5일 수령. 5일에 일독 시작하여 7일에 완료했다. 8일 기록했다.

* 동북아역사재단의 도서는 거의가 무료 PDF로도 제공된다. 감사한 일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책들의 다운로드 링크는 다음과 같다: 『10~18세기 북방 민족과 정복왕조 연구』, 『외국 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움직이는 국가, 거란

참고문헌

杉山正明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9).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