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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티무르 제국의 역사

by hanyl 2019. 4. 3.

티무르 시대

서기 1370년부터 1405년까지의 기간입니다. 1370년은 바를라스 부 출신인 티무르가 차가타이 울루스의 권좌에 오른 시점입니다. 1405년은 티무르가 중국 원정을 위해 동진하던 와중에 죽은 시점입니다.

지도: 티무르 영토의 개념도

이 기간에 티무르는 전쟁을 통해 페르가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등지를 정복하고, 이집트, 소아시아, 킵착크 초원 등지에서 상위 군주로 인정 받으면서 정권을 확립했습니다. 이를 통해 티무르의 지배지는 과거 몽골 제국의 서방 3왕가(주치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의 영역을 넘어 서쪽으로는 이집트, 소아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원정을 이용해 티무르는 측근 세력을 키웠고, 과거 차가타이 울루스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족 세력들은 티무르 이후로는 큰 권력을 행사하지 못 했습니다.

티무르의 제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부족 연합들이 지배하는 땅과 그렇지 않은 땅. 페르시아 서부, 킵차크 초원, 모굴리스탄 등이 전자에 해당하고 후라산, 페르가나, 화레즘 등, 나중에도 티무르의 후예들이 계속해서 지배한 땅은 후자에 속합니다. 티무르는 전자에 대해서는 항구적인 정복보다는 상위 군주로 인정받고, 조공을 받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이는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 연합 국가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중앙 집권적 국가로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업적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후자에 속하는 땅들에서 티무르는 항구적 정복을 위한 조치들을 여럿 취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각 도시들을 군대를 이용해 복구하고, 관개 시설을 설치하거나 요새를 건설한 행위, 정복지의 군대를 트란스옥시아나로 이주시키고, 반대로 트란스옥시아나의 군대는 각 정복지로 이주시키는 등의 정책이 여기에 속하겠습니다. 정복지에 이주한 군대는, 각 부족에서 뽑아내 합친 것으로, 그 군대 자체가 티무르의 군대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행위에서 주민들이 받는 압력은 티무르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 것 같습니다. 만츠는 티무르의 관료들이 맡은 주요 업무가 주민들을 쥐어 짜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티무르가 용인술에 있어서 중요시 여긴 것은 상호 견제였습니다. 어떤 직책이건 여러 방향에서 견제 받게 함으로써, 티무르는 자신 이외에 제국 안에서 권력의 중심이 생기지 않게 하였습니다. 또, 그는 한 인물에게 한 직책을 오래 맡기지도 않고 많은 권한을 한번에 주지도 않았습니다. 특히 부족의 지배층에게는 요직을 단 한번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티무르를 절대적인 군주로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후계자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티무르 사후 벌어진 계승 전쟁이 특히나 길고, 잔혹했던 것은 여기서 기인했습니다.

계승전쟁기

1405년부터 1420년까지의 기간입니다. 티무르가 죽은 직후에 그의 아들들, 손자들, 측근들은 티무르의 뒤를 잇기 위해 또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 1420년, 길고 잔혹한 내전을 치른 끝에 샤루흐가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상위 군주로 인정 받으면서 티무르조는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이 기간에 티무르조는 내적으로만 진통을 겪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우선 모굴 칸국의 지배자들이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분열된 차가타이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합치려 시도했습니다. 또, 오스만조나 이집트의 맘룩조는 이 틈을 타서 세력을 회복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악크 코윤루와 카라 코윤루였습니다. 이들은 결국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이란 서부 등지를 티무르조에게서 영원히 빼앗아 갔습니다.

샤루흐 시대

1420년부터 1447년까지의 기간입니다. 1420년은, 앞서 언급하였듯, 샤루흐가 티무르조의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제압한 시점입니다. 1447년은 샤루흐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진하다가 죽은 시점입니다.

길고 잔혹한 내전의 끝에 복구된 제국은 티무르 시대의 제국보다는 조금 더 약했습니다. 때문에 티무르조는 티무르의 시대와 달리 외부 세력을 힘으로 완전히 찍어 누를 수 없었습니다. 북방에서는 모굴 칸국이 공세적 입장으로 돌아서서 카슈가르를 공격했습니다. 또, 아불 하이르를 중심으로 한 우즈벡 세력이 샤루흐의 치세 내내 트란스옥시아나를 약탈했습니다. 페르시아에서는, 투르크멘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샤루흐는 이 지역에 대한 원정을 여러차례 수행했지만, 몇몇 대도시들과 명목 상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티무르조가 존속한 기간을 모두 통틀어 가장 안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전성기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샤루흐는 티무르에 비해 온건한 이미지이지만, 필요하다 생각하는 시기에 폭력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반항하는 부하들과 종교계 인사들을 모두 죽였고, 고의적으로 시스탄과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들이나 아미르들은 주변 지역에 대한 원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샤루흐의 내정은 티무르와 비슷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샤루흐는 아랫 사람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였습니다. 다만 한 개인이 오랫동안 같은 지위를 맡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 샤루흐는 티무르 제국의 영역을 소유르갈로 분배하여 봉건적 지방 분권화 정책을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이 경향은 샤루흐 시대에는 제국의 분열로 이어지지는 않아서, 죽기 직전까지 샤루흐는 반란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티무르의 시대 이상으로 이 시대가 융성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문화 활동은 헤라트에서 전개된 건축 사업입니다. 이 시기에 지어진 화려한 건물들은 아직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이에 못지 않게 명성이 높은 문화 분야는 샤루흐의 아들인 바이순구르 미르자가 벌인 사본 제작 활동입니다. 바이순구르는 공방을 조직하고 매일 예술가나 장인들에게 아름다운 사본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또, 샤루흐의 치세는 페르시아어 사용이 급증하는 동시에, 문화어로써의 튀르크어 사용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계승전쟁기

1447년부터 1459년까지의 기간입니다. 1447년은 샤루흐가 죽은 시점입니다. 1459년은 티무르의 3남 미란샤의 손자 아부 사이드가 헤라트를 장악하는 시점입니다.

계승 전쟁의 초기에 샤루흐계 군주들이 내분으로 자멸합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티무르의 3남 미란샤의 손자인 아부 사이드가 우즈벡 칸국의 도움으로 1451년에 사마르칸드를 장악합니다. 아부 사이드는 1459년에 이어서 헤라트까지 장악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명실상부한 티무르조 최고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아부 사이드 시대

1459년부터 1469년까지의 기간입니다. 아부 사이드가 티무르조 소유의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도시, 헤라트와 사마르칸드를 모두 지배하게 된 시점부터 악크 코윤루의 손에 생포되어 처형되는 1469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아부 사이드는 우즈벡 울루스의 힘을 빌어 사마르칸드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타쉬켄트에서 낙쉬반디 교단의 호자 아흐라르를 초청하여 그 종교적 권위를 배경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했습니다. 이어 헤라트를 중심으로 하는 이란 동부 지역을 지배 아래에 둠으로서 제국의 재통일을 완수했습니다.

아부 사이드는 민중들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아부 사이드의 정권에서 정책들은 성직자들, 특히 호자 아흐라르의 영향력이 지대했습니다. 호자 아흐라르의 요청에 따라 아부 사이드는 토지세의 징집 횟수를 줄이는 등, 일반 민중들에게 부담이 되는 여러 종류의 세금들을 폐지하거나 완화하였습니다. 또한 토지 개간을 위해 댐을 건설하는 등의 업적도 남기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주변 지역에 투사되는 티무르조의 힘은 약해졌는데, 이는 우즈벡 칸국과 모굴 칸국, 악크 코윤루의 대두 때문이었습니다. 아부 사이드는 모굴 칸국에 대해서는 티무르조 영내에 거주하던 유누스를 칸으로 임명하여 파견함으로써 안정을 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는 우즈벡 칸국이 시르 다리야 남쪽을 약탈하는 것은 막을수 없었습니다. 또, 아부 사이드는 1469년에 악크 코윤루와의 전쟁에서 대패했고, 그 자신은 생포당한 뒤에 처형 당했습니다.

남북조 시대

1469년부터 1495년 경까지의 기간입니다. 아부 사이드가 죽은 뒤에 비교적 짧은 기간(1469년 ~ 1470년) 동안 계승 전쟁이 치뤄졌습니다. 그 결과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아무 강 이남의 영토는 티무르의 서장자인 우마르 셰이흐의 증손자 술탄 후세인이 차지하고, 아무 강 이북은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이 차지했습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가운데 그 구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 시기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술탄 후세인이 지배하던 헤라트의 문화입니다. 술탄 후세인과 재상 알리 시르 나바이가 문예를 보호함으로써 헤라트의 궁정을 중심으로 티무르조 시대 최고의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특히 재상 알리 시르 나바이는 문화계에서 투르크어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투르크어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버금가는 3대 문화어로서 인식되어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회고록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바부르나마》 역시 이 영향으로 투르크어로 쓰여졌습니다. 반면 사마르칸드의 궁정은 낙쉬반디 교단의 영향으로 후세인의 궁정만큼 예술을 부흥시키지는 못 했다고 합니다.

몰락

1490년대 중반부터 1507년까지의 기간입니다.

1490년대 중반에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이 죽자 트란스옥시아나는 큰 혼란에 빠져듭니다. 이 틈을 타서 우즈벡 유목민들과 모굴 칸국이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는데, 이는 결국 1500년에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사마르칸드를 점령하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1501년, 페르가나의 군주였던 바부르가 잠깐 사마르칸드를 탈환하였으나, 결국에는 샤이바니에게 패배하여 결국에는 잃어버립니다.

이후 바부르는 트란스옥시아나를 떠나 모굴리스탄을 방황하다가 1504년, 모굴리스탄을 떠나 카불로 갔습니다. 본래 카불은 티무르조의 통치를 받았으나, 이 직전에 아르군조가 이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아프간의 부족들은 바부르에게 저항하였으나, 바부르는 이를 결국 격파해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바부르가 몽골 제국의 오랜 전통인 적의 목으로 탑을 쌓는 전략을 부활시킨 것 입니다. 바부르는 온후한 성격에 세계사에 길이 남을 회고록을 남길 정도로 교양인이였는데, 이런 점과 정치적 냉정함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 것이였을까요. 어쨋든 바부르는 카불을 장악하여 티무르조의 망명지를 마련하는데 성공합니다. 후일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무굴 제국은 바부르가 마련한 망명지가 변모한 것 입니다.

1490년대에 트란스옥시아나가 한참 혼란스러워진 것은 어쩌면 술탄 후세인에게 티무르조를 재통일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시 술탄 후세인의 영지는 그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킨 덕분에 이 호기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술탄 후세인은 이 반란을 진압하고 카불의 바부르와 협력해 우즈벡 칸국을 몰아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1506년, 후세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후세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내분을 일으킵니다. 바부르는 후세인이 죽은 직후에 헤라트에 도착하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모든 희망을 버리고 카불로 도망칩니다. 1507년, 바부르의 예상대로 샤이바니 칸이 헤라트를 정복합니다. 이후 티무르조는 중앙 유라시아에서 주요한 세력이 되지 못 합니다.

그러나 티무르조가 완전히 끝장난 것은 이 이후의 일이였습니다. 1600년대 초까지 바다흐샨은 우즈벡 칸국에 복속된 티무르조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굳이 이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위에서 언급하였듯 아프간과 인도에 자리잡은 무굴 제국 역시 티무르조의 연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참고한 글들

김호동. 2004. “칭기스 칸의 자제분봉(子弟分封)에 대한 재검토 -『집사(集史)』〈천호일람(千戶一覽)〉의 분석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연구》 9. 중앙아시아학회: 29–65.

마노 에이지, 호리카와 도오루 엮음. 2009.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현승수 옮김. 서울: 책과 함께.

스튜어트 고든. 2010. 《아시아가 세계였을 때》. 구하원 옮김. 서울: 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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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출처

지도: 티무르 영토의 개념도

Mladjov, Ian (2015). “The Mongols in the early 14th Century (division of the Mongol State)”, Ian Mladjov's Resources. (지도 원본)

호리카와 토오루 (2009). “중앙아시아의 융성: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책과함께: 91~116. (특히, 102쪽)

김호동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특히, 166~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