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합성국가와 민족의 초월
1400년부터 1800년의 기간에 세계 각지에서 초기 근대 국가들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몽골제국의 흥기, 약 2세기 동안 지속되는 소빙하기의 시작, 흑사병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질병의 출연 등으로 인해 중세의 국가들은 쇠락하였다. 이로 인해 1400년의 세계는 분열과 축소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당시 존재했던 국가들은 영토 기반의 거대 국가가 아니라 정치, 종교적 위계질서를 갖춘 중소 규모 국가였고, 대개의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국가의 신민보다는 봉건 군주 아래에 있다고 인식했다. (Goldstone, 2015: 447-49)
그러나 15세기 들어, 기후 하강이 반전됨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 각지에는 합성국가composite state들이 출연하기 시작했다. 합성국가는 왕조의 이익을 대표하는 중앙정부가 다수의 지배영역domain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치시스템을 지칭한다. 중앙정부는 각 영역을 직접 통제하는 대신 지역엘리트에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일종의 간접 지배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각 지배영역에 부여한 자치권의 성격이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앙정부가 각 영역들에 동일한 자치권을 일률적으로 부여하는 대신 지역엘리트들과의 개별 협상을 통해 그 내용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김준석, 2012: 118)
16세기 세계 각지에 성립한 국가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합성국가였다. 예컨데 중국의 명조는 대개 옛 중국의 국경을 따랐으나, 운남과 남만주의 요하 유역은 몽골의 유산이었다. 옛 타이계 왕국 운남은 원세조 쿠빌라이가 즉위 전 직접 정복하여 중국이 아닌 몽골 제국의 일부였다. 요하 유역은 몽골 제국기 한반도의 포로를 강제 이주시킨 지역이었다. (Okada, 1999) 따라서 명조는 중국의 중심으로 하여, 타이계 운남과 고려인이 다수였던 요하 유역을 합성한 국가라 할 수 있다. 에스파냐, 유럽 중부, 네덜란드 등이 합성국가를 이룬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아일랜드, 웨일스, 잉글랜드(그리고 나중에는 스코틀랜드까지)의 지역이 합성된 영국 연합왕국 역시 그렇다. 모스크바 국가 역시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의 군주들은 기독교도 신민들에 대해서는 순수한 기독교적 용어를 통해 통치를 정당화하면서도 초원에서는 칭기스조 통치자로 행세하였다. 모스크바(그리고 나중의 로마노프) 통치자들은 한편에서 자신을 전 루시의 차르царь всея Руси라 칭하는 한편, 초원에서는 차간 칸Chaghan Khan, 즉 ‘하얀 칸’이라 칭하여 금장 호르드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Allsen, 2015: 164; 박지배, 2015: 85-86)
오스만 국가는 초기에는 군벌들의 연합체였으나, 세계적으로 제국들이 형성되는 15, 16세기 무렵이되면 합성국가로 변모한다. 초창기 통치자들, 즉 오스만 1세, 오르한 1세, 무라드 1세는 단순한 변경의 베이 즉, 군벌에 지나지 않았고, 이러한 지위는 다른 아나톨리아 베이들과 다를 것이 없는 지위였다. 마찬가지로 메흐메드 1세나 무라드 2세의 시대에도 오스만 술탄은 에브레노스오울라르나 미할오울라르 등, 즉 튀르크계 변경 군주들 가운데 제일인자primus inter pares라 할만한 지위에 지나지 않았다. 몇 세대 동안 오스만 국가의 재상 지위를 독점한 튀르크 씨족 찬다를르 가문 역시 마찬가지로, 막대한 부와 카드아스케르라는 지위를 이용해 술탄의 결정에 빈번히 반대하기도 하였다. 찬다를르 할릴 파샤가 메흐메드 2세 재위 초기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반대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오스만 술탄은 거의 동등한 엘리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해야 했다. (Ágoston, 2009: 10)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술탄 메흐멧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근본적으로 변했다. 메흐멧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통해 미증유의 권위를 얻었고, ‘정복자Fatih’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메흐멧 2세의 오스만 국가는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이주한 튀르크 유목민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재빨리 뛰어넘어, 그들이 접했던 매우 다양한 민족의 에너지를 융합한, 합성국가로 변화하게 된다 (Quataert, 2008: 23).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특징은 1538년, 쉴레이만이 몰도바의 벤데르의 성벽에 새긴 비문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신의 노예이자 이 세계의 주인이다. (중략) 신의 은총과 무함마드의 기적은 나의 동반자이다. 나는 쉴레이만이고 이슬람의 성지에서 목회자들은 내 이름을 낭송한다. 나의 함대는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프랑크인들과 싸웠다. 나는 이라크와 바그다드에서는 샤shah이고 로마 땅에서는 카이사르caesar이며, 이집트에서는 술탄sultan이다. (하략)” (Streusand, 2011: 64)
오스만 합성국가의 기본적인 단위는 밀레트millet였다. 아랍어 milla에서 기원한 밀레트는 ‘종교 공동체’ 또는 ‘민족’을 의미하는 말로, 종교와 민족별로 구성된 일종의 종교 자치체를 이른다. 각 밀레트는 무슬림이 연관된 재판 외에는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자치권을 누렸다. 앞서 언급하였듯, 합성국가는 각 지배영역에 부여한 자치권의 성격이 조금씩 차이를 보였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스만 제국 역시 국가와 신민의 관계가 지역적 관습, 신분, 경제적 지위 등 개개의 상황에 따라 국가 대 집단 간의 틀 속에서 이뤄졌다. 또한 모든 밀레트 구성원은 개인의 능력과 동기에 따라 사회적 이동이 가능했으며, 개종하여 다른 밀레트로 옮길 수도 있었다. (이은정, 2012: 158-63)
밀레트 제도를 통해 민족을 구분한 오스만 제국은, 각 민족의 에너지를 융합할 필요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들은 군인을 의미하는 ‘아스케리askeri’라 불리었다. 이들 아스케리는 대부분 ‘쿨ḳul’이라고도 불렸다. 쿨이란 ‘노예’를 의미하는 말로, 쿨 계층이란 술탄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처형되고 내쳐질 수 있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노예는 자유민과 다른 법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에게 완전히 충성할 수 밖에 없었다. 노예들은 개개인이 말그대로 지배왕가(하렘의 여성들도 포함된다)에 ‘속했기’ 때문에, 황실 노예들은 권력자와 아주 친밀하게 여겨졌고, 직접 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보통의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라 인식되었다. (Casale, 2015: 333-34)
쿨 계층을 수급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데브시르메devşirme(징모徵募) 제도였다. 데브시르메란 기독교도 소년들을 모집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술탄에게 충성을 다하여 봉사할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모하는 제도였다. 3 ~ 5년에 한번 평균 기독교도 40가구 중에서 14 ~ 18세 소년이 1명씩 선발되었다. 이들 소년들은 대개 아나톨리아의 농촌 지역 튀르크 가구에서 농사일을 하며 튀르크어를 익히고 예니체리가 되었지만, 극소수의 행운아들은 궁정학교에서 교육 받으며 술탄과 황실에 대한 충성심과 유대관계로 결속된 통치 집단을 형성했다.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오스만제국의 재상, 제독, 각종 예술가의 절대 다수가 데브시르메를 통해 충원된 이들이었다.
오스만 황제의 ‘노예’가 된다면 제국의 지배층에 편입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외국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투신하는 결정을 내리게끔 하였다. 메흐멧 2세는 출신에 차별을 두지 않고 페르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랍인, 그리스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오스만인을 고용했다. 사료에 따르면 국가 조직에 대한 울레마ʿUlamāʾ들은 이전과 같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울레마들은 이전의 찬다를르 가문과 달리 관료제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술탄의 의중이나 국가의 업무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İnalcik, 1999)
차츰 오스만 국가의 군, 관료 집단이 확대되며 정치 제도가 성숙됨에 따라, 오스만 국가는 내부로부터의 인력 충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베지르, 파샤와 고위 울레마 가문들은 행정 직무 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군사, 재정, 통치 등 여러 업무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공급해주었다. 데브시르메보다 유연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새로운 인원들이 제공되자, 이 가문들은 성공적으로 데브시르메와 경쟁했다. 데브시르메 제도는 불필요하게 되면서 오스만 국가는 점진적으로 데브시르메 제도를 포기했고, 17세기 말에 이르면 베지르와 파샤 가문 출신자들이 중앙과 지방 행정의 주요 지위의 거의 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데브시르메 제도의 점진적인 변화가 쿨 계층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데브시르메 제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등용된 새로운 관료들은, 자유로운 무슬림이었으나 술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쿨을 자처하며 스스로의 특권을 버렸다. 오스만조의 군주들 역시 18, 19, 20세기 내내 자신들의 딸, 자매, 조카딸들을 요직에 있는 인물들에게 출가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스만 파디샤는 관료 엘리트들과 동맹을 유지하면서 통제력을 유지했다.
세부적인 방식은 다르나, 의도적인 민족 경계의 설정과 초월은 초기 근대 제국들 전반에서 관찰된다. 청조는 만주, 몽골, 한족 집단을 각기 다른 법률로 통제했다 (Okada, 1999). 그러나 이 경계설정은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협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데, 1688년 팔기 한군 정람기의 무관이었던 동국강은 그의 민족 출신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기 위해 강희제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의 종조부 동복년은 17세기 명군을 지휘하며 중국 동북 지역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동국기는 1645년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팔기 한군 정람기로 편입되었다. 이후 그의 딸은 청조 황실로 들어가, 동국강은 강희제의 삼촌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강희제는 청원서를 받아들여 동국강을 만주족으로 인정했다. (Lowe, 2014: 31-35) 무굴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이 나타난다. 무굴 제국에서도 투르크-몽골, 이란, 힌두로 의도적인 민족의 구분이 있었다. 이와 같은 종족들은 자기르다르jagirdar 계층으로 통합, 초월되었다 (Casale, 2015: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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