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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초기 근대 제국으로서의 오스만 국가 Ⅳ 오스만 의식의 형성

by hanyl 2019. 4. 4.

Ⅳ. 오스만 의식의 형성

통합 기제가 적절히 작용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권력과 그 위상의 강화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했다. 지배자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할 때 제도의 반포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오스만조는 초기에 군주권의 강화를 위해 찾은 정당성은 가지gazi, 즉 종교 전사로서의 특성이었다. 이는 메흐멧 2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스스로를 ‘로마 황제Kayser-i Rum’이자 ‘대칸khaqan’이라 칭하여, 이슬람 역사 이전부터 지중해와 초원지대에 존재한 제국적 전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 입법자 쉴레이만의 시기까지, 오스만 가문의 군주들은 끝없는 전쟁과 정복을 통해 통치자의 카리스마를 확보했다. 따라서 바예지드 2세를 제외하면, 오스만 1세로부터 쉴레이만 1세까지 오스만 군주 대다수는 친히 전쟁터에 나가 군사를 지휘하면서 재위 기간을 보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바였다. 이 카리스마를 세대를 넘겨 계승시키기 어려웠고, 때로는 그 군주의 생전에 카리스마가 소멸하기도 했다. 따라서 메흐멧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얻은 미증유의 권위를 기초로 하여 메흐멧은 왕조의 관행과 특권에 기반을 두는 실정법 카눈을 통해 통치정당성을 마련했다.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 속도가 저하되자, 싸우는 군주의 모습은 군림하는 군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제 오스만의 황제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로서 관료적 명령을 정당화했지만 더 이상 정책을 입안하지 않았다. 오스만 국가에는 전사로서 싸우는 파디샤가 아니라 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추가하는 정통성을 가진 파디샤가 필요했다. 새 파디샤가 즉위하면 이스탄불의 에윕 성자묘에서 왕조의 시조인 오스만의 칼을 차는 의식을 거행했다. 오스만식 대관식이라 할 수 있는 이 의식을 통해 현임 파디샤는 13세기의 선조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와 연결되었다. 또 술탄은 자식의 탄생이나 아들들의 할례를 기념하는 축제를 통해 황실의 권위를 높였다. 또, 황실은 사재를 들여 공익 건물을 지어 신민들에게 왕조의 덕행을 일깨웠다. 이는 통치권을 재 확인하고 신민들로부터의 감사와 복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Quataert, 2008: 154-59).

또한 황실의 정통성을 고양하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신실하고 자애로운 통치자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애썼다. 성지 메카와 메디나로 가는 순례길을 재정비하거나, 이슬람 세계자의 지도자 칼리프의 위상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이다. (이은정, 2012: 171) 또,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로, 그들은 시아파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순니파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Imber, 2009: 110) 본래 이슬람 사회에서 순니-시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파비 샤들은 시아파였기 때문에 그들과 협력하여 순니파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를 위해 울레마들을 대율법사를 정점으로 하는 종교 관료로 편입, 양성하는 한편 이들과 협력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사회의 이슬람 신앙이 샤리아와 순나에 따르는 순니파의 틀 안에 맞춰져서 무슬림 사회 내의 대다수가 타종교 및 교파와의 경계를 의식하는 순니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은정, 2015: 150-51)

시대에 따라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목표는 같았다. 오스만 군주의 통치를 강조하는 경향은 ‘오스만 신민’이란 의식이 만들어지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 강역 내의 사람들은 황제의 보호를 받았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흐멧 2세와 쉴레이만 대제의 재위 기간 사이의 1세기 중 어느 시점에선가 관료들과 신민들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식의 형성은 다른 차원들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메흐멧 2세와 쉴레이만이 규범을 규정한 카눈의 반포와 세금의 정규화가 있다. 오스만 파디샤의 포고령은 제국이 언제나 '가난한 이들yoḳsullar'과 함께 '권력자들ḳudretlüler'에 맞선다고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관료기구, 토지조사, 카눈나메는 제국 정부가 단호하게 소규모 농장을 가진 농민 가정들k̲h̲āne bā čift의 착취문제를 강하게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국 내 다양한 집단들의 원심력을 압도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공통된 법 체제, 세금 그리고 모든 신민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공통의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오스만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쿼터트는 오스만 제국의 장기 집권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의 기여가 크다고 평가했다. (Quetaert, 2008: 68-69) 중국의 청조 역시 마찬가지로 타림 분지 인근(지금의 신짱 자치구), 티베트, 운남, 대만 등지에는 관료주의적 행정과 대규모 한족 신민의 사민을 통해, 몽골 지역에는 티베트 불교의 강조, 팔기제의 적용, 몽골 왕공들과의 계속되는 통혼을 통해 ‘다이칭 제국’의 관념을 이들 지역에 심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현대 중국의 국경은 청대 중국에서 외몽골을 제외하면 거의 변하지 않았다. (Lowe, 2014: 131-45) 유럽에서도 국가권력은 가톨릭(구교) 또는 프로테스탄트(신교)와 협조하면서 내부적으로 교리를 정비하고 신도의 교육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는, 교파화와 함께 중앙집권이 강화되었다 (황대현, 2006: 300-04). 또 각 왕실들은 다양한 의례와 관행을 만들어냄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영림, 2005: 317-28), 이를 통해 국가의 구심력을 키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