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중앙집권적 통치
합성국가 내부에는 수많은 집단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강력한 통합 기제가 필요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카눈kānūn과 티마르timar 제도였다. 오스만 제국내 법규의 기본이 되는 것은 샤리아이다. 샤리아가 이슬람 법이라 불리기에 마치 분명히 정리되어 고정된 법인 것 같이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샤리아는 국가 권력이 만든 법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의 노력이 민간에서 축적되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범위와 규정, 책임소재가 명확한 성문법과는 거리가 있었고, 국가의 운용에 있어 샤리아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샤리아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실정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이와 같은 실정법은 카눈이라 불리었다. 메흐멧 2세는 군주의 독립적인 입법권ʿurf에 기초하여 성문법 카눈을 재정한 최초의 오스만 군주였는데, 이는 분명히 투르크·몽골 전통에 기초한 것이었다. 내용적으로는 정복지의 다양한 관습이 포용되는 한편 제국 행정의 필요도 일관적으로 반영되었다. 대개의 내용은 샤리아가 다루지 않거나 시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법 조항들을 마련했다. 메흐멧 2세의 카눈나메는 이후 17세기까지 오스만 국가의 법 체계의 기초이자 핵심이 되었는데, 카눈나메의 종류는 중앙정부의 행정적이고 군사적인 구성, 의전, 승진 봉금, 특전 및 왕조 계승 방법을 다룬 중앙 조직 법전teşkilat kānūnnāmesi, 전 제국에 걸친 농민, 기병, 중앙정부 사이의 토지 관계, 조세, 형벌, 그리고 부수적으로 도시의 상거래 등을 다루는 일반 법전umumi kānūnnāme, 산작마다 만들어진 특정 지방의 조세에 대한 법전, 특수 군사직능 집단에 대한 법전, 그리고 기타 개별 사안들에 관한 것 등으로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이은정, 2013: 199-205)
특히 각 산작마다 만들어진 특정 지방의 조세에 대한 법전은 봉토 소유의 체계화와 제국의 중앙집권도 증진에 큰 기여를 했다. 여기에는 티마르 소유자의 이름, 그 땅에서 나오는 연 수익, 무장한 종자는 얼마나 데려와야 하는지, 텐트나 갑옷을 얼마나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례는 16세기에도 이어졌으나, 좀 더 발전되었다. 바예지드 2세의 치세 이후 카눈나메의 서문에는, 매 산자크의 토지와 세입이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으로는 해당 산자크에 적용되는 세율, 해당 지역 농민의 지위와 관련된 규정들, 티마르 보유자의 권리와 의무 등이 있었다. 카눈나메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규정도 나타나는데, 이는 티마르보유자timariot과 여타 봉지보유자들이 해당 지역의 법과 질서를 유지시킬 의무와 형벌을 부과할 권리, 벌금 수령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마르보유자의 아들들에 대한 티마르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주목州牧(governors-general)이 술탄의 제국자문회의 허가없이 티마르를 몰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동시에, 티마르를 부여받는 절차를 매우 세세하게 규정했다. 후보자는 우선 임명장을 받아야 하며, 주목으로부터 해당 지역의 빈 티마르 보유자로 임명하겠다는 문서를 얻어야 했다. 이때 당사자 혹은 그 대리인은 이스탄불의 토지등기소로 가서 티마르의 존재와 그 가치를 문서상에서 확인한 이후, 조건이 만족할 시 술탄의 이름으로 인정서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규정의 목적은 봉토에 대한 술탄의 통제권 강화임이 명백하다. (Imber, 2010: 355-56)
봉토라는 외형적 유사성 때문에 티마르 제도를 서유럽 봉건제와 혼동하여 분권화의 결과로 봐서는 안된다. 카눈에서 세세하게 규정된 바에서 보이듯, 오스만 제국의 티마르(봉토) 제도는 중앙집권의 결과였다. 중세 유럽에서 봉토는 봉신이 상당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 봉토는 군주가 통제하는 공간이었고, 구체적인 봉직의 대가로 지급되는 것이었다. 즉, 티마르 제도는 거대한 다종족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다양한 언어, 종교가 존재해 발생한 구심력을 억제했다. 이 체제의 유연성으로 말미암아, 종족적 소수 집단, 비무슬림 집단 외국인 그리고 노예 계층 마저도 이러한 봉토의 재분배를 통해 주기적으로 제국 엘리트, 즉 아스케리로 편입되었으며, 이들은 지배자의 호의 외에 의존할 곳이 없었던 ‘덕분에’ 오히려 우선적으로,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티마르 제도는 중앙집권의 결과였다. 이는 초기 근대 국가들이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무굴제국의 경우도 거의 똑같은 제도가 존재했으나,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달랐다. 티마르는 자기르jagir(계층의 차이도 더 세세했다)라 불리었고, 그 소유자는 자기르다르jagirdar라 불리었다. 싸파비 국가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봉토 제도가 존재했고, 이크타iqta’라 불리었다. (Casale, 2015: 329-30) 후일 러시아 제국으로 진화하는 모스크바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모스크바 국가에서는 초기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티마르와 유사한 포메스티예поместье 제도를 도입했다. 포메스티 역시 군사적 봉직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토지로, 이를 받은 봉직자는 국가의 소집시에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박지배, 2014: 42-43) 형태는 달랐지만, 16세기 서유럽에서도 영토의 중앙집권화가 발생했다. 인신적 관계를 통해 다층위의 지배권과 지배영역이 중첩, 교착했던 봉건제, 대륙적 차원의 보편 세계를 관리했던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하며, 근대 초기 유럽은 국가의 영토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최갑수, 2006: 1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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