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8년, 몽골군은 바그다드 성벽에 도달했다. 짧은 포위전이 뒤따랐고, 그들은 “날아가는 비둘기를 공격하는 굶주린 매처럼, 양을 공격하는 사나운 늑대처럼” 도시를 휩쓸었다.
“13세기 몽골인들이 바그다드의 도서관들을 태워버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아랍인들은 더욱 과학을 발전시켜 훨씬 예전에 원자폭탄을 개발했을 것이다. 바그다드 약탈은 우리를 몇세기 이전으로 퇴보시켰다.” - 시리아 고위 공직자의 말 (Hottinger, 1957)
이 사건은 단순히 바그다드라는 한 도시의 함락이나 압바시야 칼리프 국가의 붕괴 정도가 아니라 이슬람 문명의 몰락을 야기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왔다. 이와 같은 시각은 2003년 미국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에 더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바그다드 함락은 무슬림에게 있어 이슬람 또는 이라크 문명에 대한 불신자들의 공격 또는 반달 행위로 이해되었다. 프레이저가 『뉴요커』에 기고한 글이 대표적이다. 그는 파괴자 몽골과 그로 인한 이슬람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형적인 서술을 보여주었다. (Frazier, 2005)
이와 같은 인식은 당대 이슬람 사료 일부에 기인한 바이다. 무슬림 저자들은 몽골 침공을 세상의 멸망인양, 수백만 단위의 학살이 각지에서 행해졌다고 기록했다. 종래에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몽골을 학살자나 문명의 파괴자 등으로 지칭하고, 몽골의 이슬람 세계 침공을 ‘동부 이슬람 세계의 사막화’라고 일컫었다. (김능우, 2008)
그러나 연대기들은 상투적인 과장법을 사용했을 따름이다. 우선 실제로는 당시 이슬람 세계에 그렇게 많은 인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슬람 사서에 전해지는 숫자는 실제 숫자에서 한자리 내지 두자리는 더 부풀려져 있다. 몽골측의 기록에서도 굉장한 수가 살육되었다고 주장되어 있으나, 이 역시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형태에 있어서 파괴나 살육은 공적이 되는 행위에 가까웠다. 따라서 가능한 그 수를 부풀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9: 50-51; Morgan, 2012: 135-36)
남겨진 기록 및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라크와 바그다드에 대한 몽골 침략의 충격은 단기적인 이미지와 달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라크의 몰락은 이슬람 정복 직후부터 이어져 온 농업 생산력의 약화와 이라크 지역이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으면서 교역로가 바뀌면서 상업 중심지의 기능을 잃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어질 글들은 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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