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샤흐세반[Shahsevan; 아제리어: 샤흐세밴(Şahsevən), 터키어: 샤흐세벤(Şahseven)]이라 불리는 샤흐 세밴(shāhï sēvän)은 아제르바이잔 동부의 무간과 아르다빌, 그리고 이란 서북면의 잔잔과 카즈빈 사이 카라칸과 캄사에서 유목하는 부족집단을 가리키는 통칭이다. 이들은 16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며 차츰 유목부족 연맹체를 이루었다. 20세기 말 샤흐 세밴인들은 5,000에서 6,000가구, 즉 40,000명 정도가 남았고, 대부분 유목 또는 반유목적 삶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샤흐 세밴 엘(el: 부족 연맹체)은 느슨하게 조직된 40개 타이파(ṭāyfā: 부족)로 이루어졌고, 각 타이파는 50개에서 수백개의 가구를 포함했다. 문화나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오구즈계에 속하지만, 각 부족들의 출신은 튀르크뿐만 아니라 쿠르드계 등 다양하다.(Tapper, 2010)
집단명인 샤흐 세밴은 ‘샤를 사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이란어 사료들에서는 샤히세반(shāhī-sēvan)이라 표현되는데, 중간의 ‘이(-ī)’는 튀르크어의 목적격 접사 ‘-(y)İ’를 반영한 것인데, 실제로는 모음조화 현상에 따라 ‘으(-ï)’로 발음되었을 것이다. (Minorsky, 1934: 267) 세밴은 오구즈 튀르크어에서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세브맥(sev─)’에 동형용사 접사 ‘+An’이 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음조화 현상에 따라 실제로는 ‘앤(+än)’으로 발음되었을 것이다. 이 표현에서는 동형용사가 대명사처럼 활용되었다.
샤흐 세밴 연맹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스콧인 존 말콤 경(Sir John Malcolm)이 주장한 설로, 압바스 대제가 반역적인 크즐바싀 수령들에 대항하기 위해 부족연합체를 구성하고 ‘샤를 사랑하는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사파비 시대의 사서에서는 17세기 중반 이후 샤흐 세밴이라는 이름의 부대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는 미노르스키의 것으로, 윤쉬르 파샤(Yünsür Pasha)가 이끌고 소아시아로부터 이주한 부족들이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 고관들의 기록에서 나온 것인데, 19세기 경 무간 지역 샤흐 세밴 연맹체 귀족들이 스스로 인식한 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 설은 근대 이후 일반 부족민과 교류한 이들이 남긴 기원으로, 샤흐 세밴은 16세기와 17세기 33개 크즐바싀 부족들이 함께 결성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미노르스키의 설은 최근 학계에서는 거의 수용하지 않고 있다. 첫째와 셋째 역시 실제로 사서상에서 이를 확인할 기록이 없다. (Tapper, 2010)
스트라이샌드는 좀 다른 관점에서 샤흐 세밴을 설명했다. 어떤 면에서는 첫째 가설과 셋째 가설 모두에 어느 정도 드러맞는 것 같다. 우선 본래 이스마일 1세는 사파비야 교단의 전통에 따라 메시아적 존재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타흐마스프는, 당시 유럽의 교파주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경건한 시아파 신비주의자 왕’으로 포장했다. 압바스 1세 역시 이 흐름에 맞추어 사파비조 지지자들의 특징은 수피가리(ṣūfīgarī: 수피의 지도, 즉 사파비 종단과 그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에서 샤흐 세밴(왕을 사랑하는 이)로 대체하려 했다. 압바스는 이를 통해 크즐바싀의 영적 스승으로서 지위가 아니라 군주로 자리매김하고, 크즐바싀 개개인이 각기 속한 부족이 아니라 샤에게 충성을 바치길 바랐던 것이다. [Streusand, 2010: 150-51 그리고 163-65. 다만 그는 이를 샤히시바니(shahisivani)라고 적었는데, 왜 이와 같은 독법을 택했는지는 의문이다]
압바스는 재위 초기부터 샤흐 세밴 원칙으로 키질바쉬들을 규합하여 무르시드 쿨리 칸 우스타즐루의 집권에 대항하는데 지원받고자 했다. 압바스는 여기에 호응한 키질바쉬 부족민을 새로운 군사 조직으로 편성했다. 샤흐 세밴 부대는 키질바쉬 인력 자원에 의존했지만, 부족의 지도력에는 의존하지 않았다. 압바스의 다른 개혁들과 마찬가지로, 샤흐 세밴 부대가 지방군에서 키질바쉬 부족 군단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키질바쉬 부족은 새로운 자사들 아래에서도 계속 종군했고, 토지세 수익권을 보장받거나 지방 재무부에서 봉급을 받았다. (Streusand, 2010: 172)
1720년대에 사파비조가 급작스레 몰락한 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이란 북서부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샤흐 세밴 군단이 주로 유목하던 무간과 아르다빌 일대가 이란 제국과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의 삼파전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었다. 이 시기 기록들에 따르면, 샤흐 세밴 군단은 일종의 사파비조 충성파로, 아르다빌에 있는 사파비조의 성지를 지키며 오스만 군대에 대항했다. 그러나 1720년대 말이 되면 그들의 저항도 차츰 줄어가며, 샤흐 세밴 군단은 뿔뿔히 흩어졌고, 일부는 러시아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며 이주하기도 했다. (Tapper, 2010)
샤흐 세밴 군단이 다시 무간과 아르다빌 인근으로 돌아온 것은 나디르 샤 아프샤르가 이 지역을 장악한 1732년의 일이다. 나디르 샤는 무간과 아르다빌 인근에 유목하는 부족들을 자신의 휘하에서 종군한 바드르 칸 샤흐세밴(Badr Khan shāhï-sēvän)이 지배하는 부족연맹체로 형성하려 했던 것 같다. 나디르 칸 사후에도 바드르 칸의 일족들은 주변 소규모 칸국들과 협조해가며 20세기까지 반독립적인 지위를 지켜나갔다. (Tapper, 2010)
:)
참고문헌
Tapper, Richard (2010). “Shahsevan,”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shahsevan
Minorsky, Vladimir (1934). “S̲h̲āh-sewan.” Encyclopaedia of Islam, First Edition (1913-1936), vol. IV, pt. 1. Koninklijke Brill: 267-268.
Streusand, Douglas E. (2010). Islamic Gunpowder Empires: Ottomans, Safavids, and Mughals. Westview Press.
도. 이동 중인 샤흐 세밴 가구. 1966년 5월. 무간 지역. 출처: Richard Tapper, Frontier Nomads of Iran: A Political and Social History of the Shahsev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Fig. 3.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흐 세밴, 왕을 사랑하는 이들 (0) | 2019.10.13 |
---|---|
몽골 제국과 루시 그리고 러시아의 탄생 (23) | 2019.10.01 |
오스만, 그는 어디에서 왔나 (1) | 2019.08.16 |
인도의 황제가 된 거란인들 Ⅰ 일투트미쉬 (1) | 2019.08.02 |
알리 케말, 보리스 존슨의 터키인 증조부 (0) | 2019.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