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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몽골 제국과 루시 그리고 러시아의 탄생

by hanyl 2019. 10. 1.

200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고고학 대회가 열렸다. 주제는 몽골 제국의 루시 침공에 대한 것이었다. 러시아 학계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야 꽤 놀랄 일이겠지만, 이들은 몽골의 러시아 침공과 그 지배를 ‘암흑기’로 정의하는데 문제를 제기했다. 고고학 발굴 결과는 문헌 사료의 과장된 파괴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Waugh, 2017: 17)

문명파괴자 몽골?

러시아 고고학 학계에서 몽골 침공의 참상을 사료 상의 과장과 달리 받아들인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그 시작은 1940년대 몽가이트(A. L. Mongait)가 이끄는 소비에트 고고학 연구팀이 진행한 구[舊]랴잔 시[市] 발굴 조사였다 (이하 랴잔으로만 표기). 랴잔은 루시 문화권과 초원 사이를 잇는 교역로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몽가이트의 결론은 놀라웠다. 그에 따르면 13세기 초반 랴잔은 대규모 파괴 행위에 노출되었지만, 그 범인은 1237년의 몽골인이 아니라 1208년의 블라디미르 대공 프세볼로드 3세[Всеволод III, 일명 ‘큰 둥지’ 프세볼로드(Всеволод Большое Гнездо)]였다. 오히려 1237년 이후 랴잔은 이전보다 더 큰 성채를 세웠다. 1970년대 후반에 랴잔의 다른 지역에서 발굴 조사를 마친 다르케비치(V.P. Darkevich)와 보리셰비치(G.V. Borisevich)의 결론도 동일했다. (Waugh, 2017: 17-18)

랴잔 조사 결과는 몽골 침공의 결과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를 야기했다. 20세기에 가장 저명한 고고학자 가운데 하나였던 카르게르(M. K. Karger)는 키예프가 몽골 침공 이후 몰락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드네프르 강 중류에서도 정주지 취락이 쇠락했던 흔적이 있었지만, 몽골과의 관련성은 부정되었다. (Waugh, 2017: 19) 밀러(D.B. Miller)는 더 나아가, 몽골 침공기 석조 건축물 건설이 잠시 쇠퇴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후 2세기 동안은 크게 늘어났다며, 몽골 지배기 러시아 지역은 경제적 호황을 맞이했다고 주장했다 (Miller, 1989).

표1 12세기 ~ 15세기 루시 북부 지역의 기념 건축물 신축 통계

이런 연구들이 축적된 결과 몽골 침공에 대한 러시아 학계의 결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물리적 황폐화를 초래하지 않았다. 몽골 침공의 직격타를 맞은 지역에서도 상상한 바와 같은 대규모 파괴나 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이 있었던 만큼 경제적으로 일시적인 후퇴를 맞이했던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명의 붕괴는 아니었다. 도시 생활은 계속되었고, 몇몇 지역은 곧 다시 일어섰다. 황폐화된 교외 지역도 곧 복구되었다. 장인들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거대한 몽골 제국의 교역망에 연결된 루시 지역은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몽골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이익을 추구했다. 그런데 굳이 대규모 파괴나 학살로 부의 원천을 제거할 이유는 없었다. (Waugh, 2017: 17; Riasanovsky, 2011: 171-72; Franklin, 1999: 801; Martin, 2006: 132-33; 宮脇淳子, 1992: 272)

루시 중심지의 이동

몽골 침공으로 인해 루시 지역의 중심지가 남부 키예프에서 북부 모스크바로 이동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몽골 침략군에 의해 침략로에 있던 남부 지역이 처절하게 몰락하였다. 그로 인해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무인지경이 되었고, 중세 루시 사회의 중심지는 자연히 몽골의 손에 파괴되지 않은 북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미 몽골 침입기 이전에 이미 키예프의 정치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키예프 루시 체제의 붕괴 시점에 대해 현대의 연구자들은 크게 세 가지 연도를 제시한다. 첫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Владимир Мономах)의 아들 므스티슬라프 1세 블라디미로비치(Мстислав I Владимирович)가 죽은 1132년이고, 둘째는 로스토프·수즈달(안드레이 보골륩스키가 중심지를 블라디미르로 옮긴 뒤로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다)의 공후였던 안드레이 유리예비치 보골륩스키(Андрей Юрьевич Боголюбский)가 키예프를 점령한 후 본거지인 수즈달로 돌아간 1169년이며, 마지막이 몽골의 침공으로 키예프가 함락된 1240년이다. 특히 이미 안드레이 보골륩스키가 키예프를 점령하고도 포기한 것은 실질적으로 키예프가 당시 루시 사회 중심지로서의 가졌던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황성우, 2015: 66-67; 최정현, 2012: 228-29)

실제로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루시 동북부 지역이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루시 지역 동북 방면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은 북동부 타이가 지역을 개척, 교역과 식민지화를 통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보며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가 수즈달의 드미트리 사원과 블라디미르 주교구의 성립, 그리고 ‘큰 둥지’ 프세볼로드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이었다. 루시 공후들 가운데 처음으로 몽골 제국에게서 야를릭을 발행받은 것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공후, 프세볼로드의 아들 야로슬라브(Ярослав Всеволодович)였던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박지배, 2018: 45-46; 황성우, 2015: 67; 최정현, 2012: 229 그리고 237-41;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타이가 지역 ‘식민화’에 대해서는 Janet, 2007: 77-78을 참고)

반대로, 루시 세계에서 키예프의 지위는 1054년 야로슬라프 사후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국가 형성 이전부터 키예프에 부를 선물해준 발트해-흑해 교역로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11세기 이후 이탈리아 상인들이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상권이 활달해지자 발트해-흑해를 통하는 교역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누폴리스가 함락당하자, 흑해 방면의 무역로는 국지적 교역로로 나가떨어졌다. 몽골의 루시 정복(1240년 ~ 1480년)이 서유럽의 비잔티움 정복(1204년 ~ 1261년)과 맞물리면서 시작된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박지배, 2015: 79-80; 황성우, 2009: 265-66)

앞서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몽골 군대의 잔혹한 파괴 행위로 키예프가 완전히 파괴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카르게르는 1240년에 대규모 파괴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실 루시 지방 북부의 연대 작가들은 남부 지방이 파괴당했다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이후의 키예프가 여전히 번성했다고 기록한 문헌 사료도 많다. 이와 같은 사료를 무시하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동부 평원에서 블라디미르·수즈달의 북동부로 루시의 중심이 옮겨간 것은 강조한 설명은 소비에트 시대 모스크바가 중앙이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강박관념이 학문에서도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Waugh, 2017: 19; Morgan, 2012: 191; 최정현, 2012:237-38, 특히 no. 20)

루시와 러시아

몽골 침공이 루시 지역에 야기한 또 다른 상황은 루시계 공국의 분열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몽골 제국은 루시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루시 공후들 간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리하기에 앞서, ‘루시’(Русь)와 ‘러시아’(Россия)라는 용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흔히 사용되는 ‘키예프 루시’라는 표현은 당대 사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18세기 이후 근대의 사학자들이 관례적으로 칭하기 시작한데서 유래했다. 최정현, 2012: 225 no. 3; Dvornichenko, 2016: 6)

‘루시’라는 말의 정확한 기원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9세기 ~ 12세기 중앙 유라시아 서부 평원을 중심으로 정치 · 문화 · 종교적으로 유사성을 가졌던 동슬라브계 종족 집단을 부르는 명칭이었음은 분명하다. 루시 초기 문헌에는 아직 ‘러시아’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고, ‘루시’ 또는 ‘루시 땅’(Русская земля)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Повесть временных лет)의 852년 항목에 ‘루시’와 ‘루시 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고, 912년 항목에서 루시와 비잔티움의 협정에 대해 서술하며 ‘그리스 땅’(Греческая земля)에 대비되어 ‘루시 땅’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루시 땅’이라는 표현은 12세기 중반까지 키예프, 체르니고프, 페레야슬라블 인근 지역을 가리켰으나, 12세기 말부터는 동슬라브 종족의 정주지 전체를 지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12세기 말의 작품 《이고리 원정기》(Слово о полки Игореве)에서는 ‘루시’와 ‘루시 땅’이라는 말이 완전히 동일시되어 사용되는데, 이는 점차 루시가 단순히 종족의 의미를 넘어서서 지역의 의미와 혼동해서 쓰였음을 보여준다. (박지배, 2018: 44-45; 최정현, 2012: 225-28; Ostrowski, 2012: 41-43 특히 n. 61)

그런 맥락에서, 루시 세계가 최저점이었던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사이에 ‘전 루시’(всея Русь)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전 루시’라는 표현은 세속 군주가 아니라 루시 교회의 고위 성직자, 블라디미르의 수좌대주교가 처음 사용했다. ‘러시아’라는 말이 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은 1387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루시의 수좌대주교 키프리안(Киприан)이 처음으로 ‘키예프와 전 러시아의 수좌대주교’라고 서명하면서였다. 이는 루시 본토에도 전해져서, 15세기 초 키프리안을 기리는 명문에서 ‘러시아의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Российский)라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즉,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라는 말은 정치적 실제가 아니라 단지 대주교관구를 의미하던 말로, 교회에서나 사용되었다.(박지배, 2018: 45-46)

러시아라는 단어가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이반 3세 바실레비치(Иван III Васильевич)의 재위기였다. 이반 3세가 16세기 초에 발행한 주화에 처음으로 ‘전 러시아의 군주’(Господарь всея Росии)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종족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러시아 국민을 뜻하는 개념이었던 ‘로시야닌’(росиянин)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전반이었고, 16세기 말에 이르면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Российское царство)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17세기 초가 되서야 러시아의 공식문서들에서 러시아는 하나의 통일된 영토 국가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박지배, 2018: 46-47)

루시 세계의 분화

11세기와 12세기 루시 지역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더 큰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처럼 루시 크냐지(князь)들이 각자를 공통의 조상을 가진 가족으로 생각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1097년 류베치에서, 그리고 1100년 우베티치에서 모였던 시장들이나 코뮨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문화 공동체에 속했다고 여겼지만, 아담을 제외하면 공통적인 조상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몽골 지배기인 13세기 초와 16세기 사이에 서서히 형성되었고, 세속적인 국가 정체성으로 진화한 것은 19세기나 되어서였다. (Ostrowski, 2018: 49; 박지배, 2018: 50-51; Billington, 2018: 45-47)

당시 루시 사회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와 유사한 여러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국가라기보다는 여러 코뮨들의 집합체였다. 도시국가들 사이의 연대감도 약했다. 리하체프(D. S. Likhachev)는 이들 도시국가가 가진 공통점이 교회, 공후들, 그리고 언어라고 주장하며, 이를 하나의 국가적 연합체로 해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루시 사회를 하나로 잇는 국가도 없었고 국법도 없었다. (Dvornichenko, 2016: 9-10; Ostrowski, 2012: 29-30)

현대의 쥐보프(В. В. Живов), 플로히(Serhii Plokhy) 존 린드(John Lind) 같은 학자들은 루시의 통일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이에 대한 집착은 ‘연대기 작가의 루시의 정치적 통일에 대한 상상의 산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갈리치와 볼르인은 1018년에 이미 자신들이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정치체에 속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노브고로드는 1132년부터, 로스토프, 수즈달, 블라디미르는 1146년부터, 랴잔과 무롬은 1147년부터, 스몰렌스크는 1148년부터, 그리고 폴로츠크는 1140년부터 그러했다. 이들은 루시 문화권에 속했다고는 여겼을지는 몰라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정치체에 속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최정현, 2012: 229-31; Ostrowski, 2012: 41-42)

이렇듯 소위 말하는 ‘키예프 루시’라는,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봉건 연합체라는 관념은 불분명한 것이었다. 루시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일체성을 지니지 않았다. 언어나 종교적으로 유사한 세계였을 뿐이다. 지민(A. A. Zimin)의 표현대로, “우리의 근원이 고대 루시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몽골 야만족속에 파괴되기까지) 고대 루시 세계가 하나의 계보로만 이어져 나갔다는 관념은 순전히 환상이다.” 몽골 침공 전야의 루시 세계는 최소한 세 개의 분파로 나누어진 상태였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동루시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남방 진출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권을 확립하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두번째 세력이었다. 마지막은 서루시에서 로만 공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갈리치·볼르인 공국이 있었다. (Dvornichenko, 2016: 10-14; Hautala, 2013: 210; 최정현, 2012: 240-41)

지도 12세기 ~ 13세기 초의 루시 세계

이러한 경향은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동슬라브어는 11세기 즈음부터 이미 나중의 벨로루시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로의 언어적 분화가 진행되는 와중이었다. 러시아어 안에서도 중부 러시아 구어와 남부 러시아 방언의 경계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 그 남쪽에 위치한 랴잔 공국, 체르니고프의 경계와 대략 일치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진원, 2018: 49)

이런 관점에서 볼때, 갈리치·볼르인 공국을 포함, 루시 세계의 남부가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손에 들어갔을때도 이 지역에 살던 루시인들이 이를 외국의 지배라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들이 비록 이교도이기는 했지만 정교도 신민의 통치자로서 교회와 협조했다.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는 군대, 행정, 법체계, 재정 등의 방면에서 이전 키예프 공국의 예를 그대로 따랐다. 어떤 면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모스크바 이상으로 키예프 대공국과 연관이 깊었다. 키예프의 유산은 모스크바-러시아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Riasanovsky, 2011: 200-01; Dvornichenko, 2016: 13-14)

러시아의 탄생

15세기 모스크바 국가와 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맞았다. 콘스탄티누폴리스 함락으로 루시 세계에서 모스크바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커졌고, 1438년 이후 이어지는 조치 울루스의 분열로 모스크바 국가의 군사적 입지도 강화되었다. 모스크바 국가가 이 기회를 이용해 인근 지역을 병합하기 시작하자, ‘하나의 러시아’를 위한 정교한 이념이 필요해졌다. 여기에서 이용된 것이 역사서의 편찬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국가에는 독자적인 연대기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국가는 다른 공국들의 연대기를 묶어 편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수좌대주교들의 전서들에서 보이는 정치적 분리주의 관점은 교묘히 감추어지기 시작했다. (박지배, 2018: 55-58)

현실에서 그 누구도 동슬라브 지역을 ‘루시’라는 하나의 정치적 집단으로 바라보지 않을때 이를 만들어낸 것은 루시 교회였다. 정교 지식인들은 계속해서 루시를 기념하고 교회가 관할하는 지역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었으며 ‘전 루시’의 교회라는 말을 끝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1328년, 루시 수좌대주교청이 모스크바로 이전하며 수좌대주교의 교회 통합 정책과 모스크바 대공의 루시 통일 정책이 일치하게 되며, 교회와 국가는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러시아 건설’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게된다. (박지배, 2018: 49-55)

몽골 지배 이전의 루시 사회는 근본적으로 이교적이었다. 몽골 침입기 이전에 기독교는 루시 사회를 겉돌고 있었고, 루시 사람들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상위 계급과 도시민들 정도만이 겉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정도였지, 농민들의 대부분은 이교도였다. 예를 들어 9세기 이래 루시 공후들의 이름은 대부분이 슬라브계 어휘를 사용했다. 1240년 이후에서야 지배 왕공들은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Vernadski, 2016: 543; Dvornichenko, 2016: 9; Ostrowski, 2012: 35)

루시 교회는 몽골 지배기 크게 성장했다. 칭기스 칸 이래 몽골 제국의 특징은 다양한 종교에 대한 관용이었다. 칸과 그 가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만 해준다면, 어떤 종교이건 제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257년, 베르케 칸은 인구조사를 마무리하며 루시 교회가 몽골 제국의 보호 아래에 있으며 면세의 특권을 가진다는 야를르그(yarlïgh, yarlïq; 러시아어: ярлык)를 발행했다. 칸의 칙령으로 보호받는 루시 교회는 러시아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정치 권력에서 자유로웠다. 교회 토지는 면세 대상이 되었고, 폭넓은 불수불입권이 적용되었다. (Ostrowski, 1998: 18-19; Dvornichenko, 2016: 10; Riasanovsky, 2011: 177)

이와 같은 물질적 기반에 힘입은 몽골 지배기 루시 교회의 발전상은 눈부셨다. 동부 러시아에 4개, 서부 러시아에 2개 그리고 사라이에 1개의 교구가 조직되었다. 교회와 수도원의 수는 몽골 지배기 첫 1세기에만 30여 개가 세워졌는데, 이는 나중의 1세기의 5배에 달했다. 특히 수도원이 퍼져나가면서 교외지역의 개종과 식민지 개척도 가속화되었다. (Vernadski, 2016: 543-44)

사제 출신 저술가들은 중앙유라시아 유목민들을 비기독교도로 몰아가며 정교도들과 적대적으로 구분하며 러시아인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전쟁을 기술할때 신의 섭리를 끌어들여, 전쟁을 어둠의 이교도 세력과 빛의 기독교 세력 사이의 충돌로 묘사했다. 이렇게 되자 초원의 유목민들과 정주 정권이 서로 양해된 준거에 의거해 행동해왔던 실용적인 협상의 복합적인 과정은 기록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실용적인 조건으로 때로는 외교 관계와 통상 관계를 맺다가도 떄로는 전쟁을 벌이던 관계가 연대기에서는 서로 이질적인 두 세력 간의 첨예하고 화해 불가능한 대립의 세계로 묘사되었다. (박지배, 2018: 66-67; Ostrowski, 1998: 23; Perdue, 2012: 122-25)

초원의 영향력을 기록에서 분식한 교회 사가들은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다시 비잔틴·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를 직조해서 이를 대체했다. 수좌대주교 키프리안이 편찬을 주도하여 1408년에 펴낸 《삼위일체 연대기》(Троицкая летопис)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해 키예프의 류릭을 거쳐 모스크바 대공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연대기를 만들어냈다. 이 연대기로 인해 모스크바는 사실상 별 상관이 없는 키예프와 연관을 맺게 되었다. 1418년 포티 수좌대주교가 주도한 《블라디미르 연합연대기》(Владимиский полихрон)는 더 나아가 ‘루시 국가’를 만들고 그 중심지로서 모스크바의 역할을 강조했다. 16세기 초경에 익명의 저자가 작성한 《블라디미르 공후들에 대한 이야기》(Сказание о князьях Владимирских)는 한층 더 나아가 모스크바 대공의 가계를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공후와 루시의 시조 류릭을 거쳐 슬라브 지역의 통치자 프루스(Прус)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까지 연결시켰다. (박지배, 2018: 58-60; Riasanovsky, 2011: 185-86)

몽골 후계 국가로서의 모스크바 국가

신생 모스크바 제국은 이념적으로는 ‘하나의 러시아’를 지향했지만, 막상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몽골 제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무엇보다 모스크바 대공은 조치 울루스의 수도 사라이를 자주 여행했고, 그의 어린 후계자는 인격 형성기를 사라이에서 볼모로 보내야 했다. 모스크바 대공이 몽골의 제도와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Ostrowski, 1990: 525) 15세기와 16세기 절대국가 형성기에 큰 역할을 했던 모스크바식 몽골 제도는 18세기와 19세기 전반까지도 러시아 국가의 사회 · 경제적 기반으로 남아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힘이 서구화를 통해 극적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옳지 않다. 러시아는 동서양 양쪽 모두의 영향을 받으며 오랫동안 자신의 환경에 맞게 체제를 진화시켜나갔다. (박지배, 2014: 66-68)

애초에 루시 지역에는 행정 관료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루시 지역에 최초의 관료 행정이 시작된 것은 뭉케 카안이 1253년 몽골 제국 전역에 대한 전면적인 인구조사(census)를 명령하면서였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뭉케 카안은 비칙치를 조치 울루스로 보내 루시의 인구를 조사하게끔 했다. 이란 방면에 파견되어 있던 아르군 아카(Arghun Aqa)와 바투의 맏아들이자 후계자격으로 바투 울루스 안에서 루시를 포함한 영지 서쪽을 위임 받은 사르탁(Sartaq)이 루시 지역 인구 조사를 총괄했던 것 같다. (Franklin, 1999: 805; Allsen, 1987: 134-43; 宮脇淳子, 1992: 272; 杉山正明, 1999: 114)

표2 14세기 조치 울루스 행정 구조와 15세기 모스크바 국가 행정 구조

따라서 14세기 모스크바 공국의 제도는 조치 울루스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조치 울루스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국가의 지배구조는 군총사령관(조치 울루스에서는 베글레리베그, 모스크바에서는 치샤츠키)과 재무총수(조치 울루스에서는 베지르, 모스크바에서는 드보르스키)로 나누어진 이원지배구조였다. 세금 징수나 주화, 문서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복잡한 역참제나 왕공에 대한 청원 등도 몽골 제국의 것을 그대로 계승했기에 그 용어까지 튀르크·몽골어를 사용했다. 더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문만 지배 왕공, 즉 칸을 배출하고 다른 유럭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엄격한 위계제 아래에서 작위를 받는 ‘씨족 정치체’도 계속이어져, 몽골 제국의 황금 씨족을 모스크바의 지배 왕가가 대체했을 뿐이었다. (Ostrowski, 1990; Perdue, 2012: 114-15에서 재인용)

당연히 모스크바의 군대 구성도 몽골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했다. 15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군대는 중앙의 본대(центральный полк), 우익 부대(правая рука), 좌익 부대(левая рука), 선봉 연대(передовой полк), 호위 연대(сторожевой полк), 총 다섯 개의 단위로 편성되었다. 이는 몽골의 병력 구분 방식과 동일했다. 몽골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군대에서도 좌익보다는 우익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한편 실제 전투에서도 몽골의 전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모스크바 군대는 양익으로 적을 포위하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박지배, 2014: 39-40)

도1 시메온 벡불라토비치의 초상

더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 국가가 조치 울루스의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사실이다. 모스크바 대공의 ‘차르’(царь) 칭호를 사용하여 이를 명확히 했다. 본래 ‘차르’는 로마의 카이사르에 어원을 두었다. 하지만 몽골이 루시 땅을 정복하면서 루시 땅의 사람들은 조치 울루스의 칸을 차르라 불렀다. 즉, 13세기와 14세기의 루시 사람들에게는 두 명의 차르가 있었는데, 하나는 정교 세계의 차르, 즉 로마 황제였고, 다른 하나는 현실 세계의 차르, 즉 몽골 칸이었다. 그러나 사실 몽골이 처음 루시를 정복한 시기 콘스탄티누폴리스는 라틴 제국이 점령중이었기에, 정교 세계의 차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루시 교회는 공개 석상에서 몽골의 차르를 위해 기도했고, 몽골의 통치가 영원하기를 염원했다. 점차 사라이에 수도를 둔 몽골 칸만이 차르라 불리기 시작했다. (박지배, 2015: 79-80; Vásáry, 2014: 263-65)

모스크바 군주 가운데 처음으로 차르로서 대관식을 치룬 이반 4세의 사례는 몽골 황금 씨족만이 차르가 될 수 있다는 ‘칭기스 원칙’이 루시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었는지 보여준다. 이반 4세는 1575년 조치 왕가의 사인 불라트[Saín Bulat, 러시아식 이름은 시메온 벡불라토비치(Симеон Бекбулатович)]를 받아들여 전 루시의 차르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양위를 받아 새롭게 자신이 전 루시의 차르가 되었다. 이반 4세가 일부러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취했던 것은 ‘칭기스 원칙’에 따라 칭기스 혈통의 남성이 아니면 ‘칸 = 차르’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몽골 황자로부터 선양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전 루시의 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岡田英弘, 2002: 206; Ostrowski, 2013; 다른 몽골 후계 제국에서 나타난 ‘칭기스 원칙’의 양상에 대해서는 宮脇淳子, 1992: 265-72 참고)

마치며: 모노마흐의 모자

전세계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외적으로 내보이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공후와 차르의 경우, 한쪽 손에는 홀을 잡고, 다른 손에는 황금색 구를 든다. 그리고 머리에는 독특한 왕관을 쓰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이것을 ‘모노마흐의 모자’(Шапка Мономаха)라고 부른다. ‘모노마흐의 모자’ 위쪽에는 십자가가 고정되어 있고, 가운데 몸체 부분에는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등 값비싼 보석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쪽은 담비의 모피가 둘러져있다. (김혜진, 2011: 87)

도2 모노마흐의 모자

16세기 루시 문헌인 《블라디미르 공후들에 대한 이야기》은 이 모자가 키예프의 공후 블라디미르 프세블로도비치(Владимир Всеволодович)가 1113년 키예프 공후의 자리에 오르자, 외할아버지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Κωνσταντίνος Θ΄ Μονομάχος)가 이 모자를 손자에게 선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노마흐의 모자를 건네줬다는 콘스탄티노스 9세는 1055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박지배, 2018: 59-60; 박지배, 2015: 81; 김혜진, 2011: 87; Vernadski, 2016: 554-55; Riasanovsky, 2011: 185)

사실 이 모자는 13세기 말, 14세기 초 중앙유라시아 예술의 걸작품이었다. 14세기 초 조치 울루스의 우즈벡 칸이 모스크바 공후인 유리 다닐로비치(Юрий Данилович)나 그 후계자 이반 1세[이반 칼리타(Иван Калита)]에게 준 하사품이었던 것이다. 이반 칼리타의 시대만 하여도 이 모자는 단지 ‘황금 모자(шапка золотая)’라고만 불리었고, 공식적으로 ‘모노마흐의 모자’란 이름을 얻은 것은 훨씬 후대인 이반 4세의 시대이다. 어쨋든, 이 모자는 1724년 표트르 대제의 두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 1세가 유럽식 왕관으로 대체하기 전까지 차르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박지배, 2018: 59; 박지배, 2015: 81; 김혜진, 2011: 88; Vernadski, 2016: 555)

이 ‘모노마흐 모자’의 이야기는 근현대 러시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시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들은 과거 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들과 맺었던 정치 · 외교적 유대관계는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몽골의 지배는 어둡고 굴욕적인 시기로 묘사해왔다. 그러면서 그 자리를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민족으로서의 루시 관념’과 유사 비잔틴적이라는 말이 더 걸맞는 ‘비잔틴-로마’ 계승의식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박지배, 2015: 70-72; 이용규, 2010: 54-55)

하지만 역사서는 분식해도 현실을 분식할 수는 없었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에서 나타나듯, 민족으로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인구 43%를 넘지 않았다.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내에서는 《블라디미르 공후들에 대한 이야기》에 묘사된 모노마흐 모자에 대한 이야기를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럽 군주들에게 고집스레 자신의 칭호에 ‘카잔과 아스트라한의 차르’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구화를 추구했다는 표트르를 비롯한 로마노프 황제들도 ‘카잔의 차르, 아스트라한의 차르, 시베리아의 차르’ 등을 계속 사용했다. (Allsen, 2015: 특히 164; 박지배, 2015: 81-87; 기계형, 2015: 10)

이것은 몽골 제국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도 아니고 부정적으로 보자는 것도 아니다. 굳이 정하자면, 문화적 혼합이 국가의 형성과 진화에 있어서 보이는 창조적 연할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모스크바 국가는 초원과의 밀접한 접촉 덕분에 통치자의 권력 강화를 위해 초원의 기구를 이용했다. 좀 더 나중의 만주 집단이 훨씬 동쪽에서 그러했듯이. (Perdue, 2012: 115-17; 러시아 역사와 문화의 다문화적 성격을 재고하는 연구에 대해서는 같은 책, 112-25와 그 각주들을 참고. 박지배, 2015: 70-72에 따르면, 러시아사 연구자 주류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침묵’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제국의 다각적 면모에 대해 주목하는 러시아의 소장파 연구자들에 대해서는 기계형, 2015 참고)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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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12세기 ~ 15세기 루시 북부 지역의 기념 건축물 신축 통계
출처: David B. Miller, “Monumental Building as an Indicator of Economic Trends in Northern Rus’ in the Late Kievan and Mongol Periods, 1138–1462,”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4, Issue 2, 1989, p. 368, Fig. 3.

표2 14세기 조치 울루스 행정 구조와 15세기 모스크바 국가 행정 구조
출처: Donald Ostrowski, “The Mongol Origins of Muscovite Political Institutions.” Slavic Review, Vol. 49, No. 4, 1990, p. 531.

지도 12세기 ~ 13세기 초의 루시 세계
Janet Martin, Medieval Russia, 980-1584, 2n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 106.

도1 시메온 벡불라토비치의 초상. 작자미상.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초?
출처: Высоцкая Н. Радзивиллы. Несвиж. Замок. Книга II. Часть 1, Минск 2014.

도2 모노마흐의 모자.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 소장.
출처: https://kr.rbth.com/travel/2016/02/16/moscow-kremlin-bomul_568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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