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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초기 근대 제국으로서의 오스만 국가 Ⅴ 17세기의 위기

by hanyl 2019. 4. 4.

Ⅴ. 17세기의 위기

15세기와 16세기에 세계는 인구가 더 증대하고, 도시화가 진전되고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세계 각지에서 중앙 집권적 국가들이 출연하였으며, 문화도 크게 발달했다. 그에 반해 17세기는 총체적인 난국의 세기였다. 17세기 세계는 ‘소小빙하기’로 불릴 정도로 낮은 평균 기온(표 1)과 잦은 홍수, 가뭄을 경험했다. 따라서 농업 생산력은 급감했고, 산업 분야의 생산성도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이로 인해 15세기 중반 이래 한 세기 넘게 지속된 인구의 팽창 추세가 한풀 꺽이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에 혁명과 민중봉기가 유례없이 빈번하게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이 혁명과 봉기는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1620년경부터 1660년대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는데,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의 프롱드의 난을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카탈루냐, 포르투갈, 나폴리, 시칠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 프랑스의 보르도 등지에서 크고 작은 혁명과 봉기가 이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혁명과 봉기의 직접적인 이유를 정치적, 사회적인 요인에서 찾았다. 특히 이들은 이 시기에 정부의 신민에 대한 재정적 요구가 가중되고 이로 인해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 사실에 주목했다. 잦은 혁명과 봉기는 본질적으로 ‘분배의 위기’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를 17세기의 위기seventeenth-century crisis라 한다. (김준석, 2012: 116-17)

이 같은 격변에도 불구하고 초기 근대 국가의 구조는 여전히 건재했다. 반란민들은 강력한 통치를 어디서 할 것 인지만 문제 삼았을 뿐 강력한 통치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누구 하나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경우에는 1660년 이후 권력이 상인과 지주를 대표하는 의회와 국왕, 두 곳으로 양분되는 양상이었다. 중앙의 권력 출현을 저지하고 지방의 자치를 지켜내려던 막바지의 중요한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 뒤였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프롱드의 난에서 교훈을 얻어 귀족층 및 관료 지배층과 협의한 정책을 기반으로 왕권을 재확립했다. 1661년 프랑스에서는 좀 더 강력한 정부가 세워지면서, 1789년까지 프랑스는 프롱드의 난과 같은 사태를 두 번 다시 겪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비록 명나라가 청나라로 대체되었으나,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구조가 변화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17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기후 변화에 더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지중해 중계 무역을 통해 얻어온 수익은 감소하였고, 유럽에서 유입된 은으로 인해 악체akçe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또한 영토 확장 중단과 연공, 조공 등을 통해 들어오던 국고 수입이 감소하자, 오스만 정부의 재정 적자는 심화되었다. 티마르 토지의 사유화는 국가의 재정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오스만 정부는 부족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악체의 함량을 낮추고 세율을 인상하였다. 토지 소유주들은 증대되는 국가의 세금 수취에 견디지 못하고 저항을 시작했다. 아나톨리아에서 발생한 레벤드Levend나 젤랄리Celali 반란이 대표적 예이다. 이들은 티마르 소유주들의 가혹한 세금 수탈과 억압을 피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불만세력들이 결집하여 반정부 활동을 하였다. 또 어떤 농민들은 오지로 숨어 산적이 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그 세력을 군벌의 수준으로 불렸고, 곧 정부의 군대를 공격했다. 예니체리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화폐 가치의 하락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여러 황제가 목숨을 잃었지만, 오스만 국가의 구조는 여전히 건재했다. 반란자들은 강력한 통치를 어디서 할 것 인지 문제 삼았지만, 강력한 통치를 통해 ‘분배의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는 데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보다는, 지방 주목직 등을 내려줌으로써 오스만 국가 체제 내부로 포용했다. 17세기의 위기에 지방 관직을 제수 받은 군벌들은 지방 명사로 변화, 제국과 얼마간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협력하고, 정치적 동맹을 형성했다. 오스만의 파디샤는 쿨 계층 및 지방 명사들과의 협의한 정책을 기반으로 왕권을 재확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적 관계는 제국의 전통적인 위계 체계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으며, 하향식 명령, 임명 체제와 변해선 안 될 충성심에 대한 요구, 즉 초기 근대 제국적 요구는 유지되었다. 지방 명사 가문들은 호혜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술탄과 중앙정부의 권위를 일반적으로 인정했고, 약간의 조세 수입을 중앙으로 보냈으며, 전쟁 시에는 군사도 파견했다. 그들은 오스만 체제의 일부로서 중앙 정부를 지지했다. 오스만 중앙정부는 이러한 방식으로 지방의 안정을 얼마간 복구하자, 셀림 3세와 마흐무드 2세는 개혁을 통해 이집트의 메흐멧 알리를 제외한 지방명사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다시 중앙집권적 통치를 확립했다. (Yaycıoğlu, 2011) 


오스만 국가는 17세기 이후 찾아온 경제 위기에도 개혁을 통해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재정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봉토에 기반한 티마르 제도의 비중을 점차 축소하고 예니체리를 필두로 하는 상비군 중심으로 변화시키며, 급속히 규모를 키웠다. 티마르 토지는 술탄의 하스hass(개인 영지)로 전용된 이후, 조세징수도급iltizam을 위해 징세업자Mültezim들에게 넘겨졌다. 징세업자들은 국가와 계약을 맺고 조세를 거두었고, 만약 그 액수가 계약된 바에 미달된다면 업자 개인의 자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여기에 발맞춰, 쾨프륄뤼Köprülü 시대에 중앙 재무부의 개혁이 이뤄졌고, 결국 재정 적자를 흑자로 반등시킬 수 있었다. 마흐무드 2세는 조세징수도급 제도에 있어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더 늘리는 한편, 루멜리와 아나돌루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인구조사의 실시, 우편 제도의 재건, 도로 상황의 개선, 상업세의 신설 등을 통해 재정에 여유를 줬다. 마흐무드 2세의 개혁을 통해, 오스만 국가는 중앙정부의 힘을 다시 키웠고, 이는 탄지마트의 시대, 개혁에 힘이 되었다. (Darling, 2006)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몰락했다는 인상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를 베네치아에게서 빼앗고 북아프리카, 루마니아, 폴란드 남부로도 강역을 크게 확장했다. 비록 빈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1683년), 오스만 제국은 1710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고, 1739년에는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며 베오그라드 조약으로 세르비아 및 루마니아의 일부를 탈환했다. 오스만 국가는 1870년까지 끊임없이 진화하며 영토를 거의 대부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