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 약탈혼은 다른 문화권에 비해 오랜 기간 존속했다. 이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 그리고 지리적 요인과 관계가 있다. 첫째로,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는 엄격한 족외혼의 원칙을 요구했다. 그런데 초원은 그 지역이 광활한데 반해 인구밀도가 낮았다. 따라서 남자는 취처를 위해 아주 멀리 떨어진 부락으로 가서 배우자를 구해야 했는데, 이러한 절차가 너무 어려웠기에 노상에서 여성을 약탈하게 된 것이다.(전영란, 2017: 236; 특히 튀르크몽골계 부락에서는 혈연내혼의 금지 원칙이 더욱 엄격하여, 신랑과 신부는 부계로 위 7대간 통혼한 경우가 없어야 했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Werner,2009: 319 참조) 또 다른 요인은 신부대新婦代; bridewealth의 존재이다. 신랑측 가정은 신부의 친척들에게 소를, 그리고 신부의 부모에게는 유르트yurt, 가재도구, 옷, 장신구 등을 지참금조로 지불해야 했다.(Werner, 2009: 319) 이외에도 일반적으로 유목민의 경우 하나의 천막 안에 일정수 이상의 가족이 살기 힘들다는 거주상의 제약, 또 한 장소에서 일정수 이상의 가축을 방목하기 힘들 경제적 제약 등으로 인해 장성하여 혼인을 하는 아들들을 즉각 분가시켜 줄 수 밖에 없는 초원유목의 특수한 환경도 있었다.(김호동, 2004: 50) 따라서 가난한 가구의 남자는 비교적 용이한 약탈의 방식으로 신부를 얻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 약탈은 일종의 영웅적 행동이었기에 장려되는 측면도 존재했다.(전영란, 2017: 236)
그러나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 약탈혼이 언제나 횡행하였던 것은 아니였다. 대체로 사회가 안정되면 약탈혼, 특히 신부의 동의 없는 약탈혼은 배척받았다. 예컨대 소비에트 이전의 크르그즈Kyrgyz 사회에 대한 사료들에서는 신부의 동의 없는 약탈혼은 빈번하지 않았으며, 발생하는 경우 관습법에 의해 처벌받았음이 확인된다. 현재 카자흐스탄이나 크르그즈스탄에서 횡행하는 약탈혼의 풍습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다시 재개된 현상이다. 이는 소련 몰락 이후 혼란스러워진 사회·경제 상황에 따라 신부대금의 지불을 피하려는 남성쪽 가문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Werner, 2009: 320.) 마찬가지로 원대元代 몽골에서는 법률로 약탈혼이 금지되었고, 몽골 제국 해체 이후 혼란기 다시 보편화되었다가, 청대淸代 몽골 고원의 상황이 안정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전영란, 2017: 236) 여진-만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대에 약탈혼은 차츰 사라져갔다.(전영란, 2013: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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