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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오스만 제국의 즉위 의례

by hanyl 2019. 6. 16.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군주의 권력은 단순히 그들이 지휘하는 군대와 관료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권력은 왕조와 그 신민들, 그리고 기타 유력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중앙과 지방 모두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협상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군주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신민들에게 일상적으로 상기시키려고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오스만 파디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군주들은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통성 확보의 도구를 사용했다. 왕조의 생애 주기의 각 단계를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선을 그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다. 이 글에서는 왕조의 생애 주기를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행사들 가운데 그 군주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법한 오스만 파디샤의 즉위 의례에 대해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도판 1: 가잔 칸의 즉위

초창기 오스만 가문의 즉위 의례는 단순한 것이었다. 옛 튀르크몽골 전통에 따라 군주가 사망하면 새 군주는 옥좌에 앉고, 오스만 가문의 코미타투스들은 새 군주에게 복종의 맹세 ─ 왕위 계승을 축하하거나 오랜 통치를 기원하는 내용 ─ 를 하였다. 이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임 군주가 옥좌에 ‘앉는 것’이었기 때문에 쥘루스cülûs(아랍어로 ‘좌식’을 의미하는 julus의 터키어식 표기)라 불리었다. 이 의식이 치뤄지지 않으면 어떤 왕자이건 간에 계승권을 요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의식이 일어나는 장소는 언제나 옥좌가 있는 곳, 즉, 전임 군주가 사망한 곳에서 이루어 졌다. 예를 들어 쉴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 공성전 와중에 죽자 셀림 2세는 즉각 베오그라드로 와서 옥좌에 앉는 의식을 치루었다.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 속도가 저하되자, 오스만 파디샤의 모습은 싸우는 카간이 아니라 군림하는 황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오스만 군주의 즉위 의례 역시 더욱 의식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코미타투스들과 충성 맹세의 의식만을 가졌던 이전의 의례와 달리 이제는 콘스탄티니예의 신민들 앞에서 왕조의 시조인 오스만 1세의 검을 차는 의식 ─ 일종의 오스만식 대관식 ─ 이 추가되었다. 이는 오스만 군주권의 제약과 함께 제국 행정의 많은 부분이 평민 출신에게 개방되는, 정치적 인민political nation의 확대(이에 대해서는 Tezcan, 2010 참고)와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다.

도판 2: 톱카프 궁의 구조
도판 3: 행복의 문 앞에서 이루어지는 셀림 3세의 즉위식. 콘스탄틴 카프다을르 작. 1787 ~ 1807년. 톱카프 궁 소장

즉위 의례의 첫 단계는 톱카프 궁전에서 이루어지는 새 군주의 즉위를 승인하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이 체계화된 것은 오스만 군주들이 차츰 친정에 나서지 않게되는 15~16세기였다. 따라서 즉위 의식 또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에서 치뤄졌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다른 각기 다른 여러 겹의 구역들로 이루어져,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더 구역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일반인들은 궁의 정문으로 해서 첫 번째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공적인 용무가 있는 사람들은 파디샤의 각료회의Divan에 고하기 위해 두 번째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뜰은 관료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외의 부분은 황제, 왕실 그리고 하인들과 시종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새 황제의 즉위 의식이 이루어진 곳은 두 번째 뜰의 알라이 메이다느Alay Meydanı[직역하면 (군사) 연대의 광장이란 의미로, 각종 의식이 이뤄지던 광장이었다]였다. 옥좌는 세 번째 뜰로 들어가는 대문인 바뷔스사데Babüssaade, 즉 행복의 문 앞에 설치되었다. 의식에 참가할 것을 허락받은 이들은 그 가운데 셰이흐 알이슬람shaykh al-Islām(터키어로는 셰이휼이슬람şeyhülislam)과 황제의 각료회의 구성원들 뿐이었다. 이들은 두 번째 뜰에서 세 무리로 나누어 새 군주의 입장을 기다렸다. 좌측(새 황제의 입장에서는 우측)에는 궁문장들이, 우측(새 황제의 입장에서는 좌측)에는 궁정의 엘리트 집단(파샤의 아들들, 속신들, 시식시종장çaşnegir 등)이, 중앙에는 제국 각료회의 호위병çavuş들이 있었다. 새 파디샤는 오른쪽에는 흑인환관장Darüssade Ağası, 왼쪽에는 바뷔스사데 궁문장Babüssaade Ağası(톱카프 궁의 왕실 부문을 관장하는 이)과 함께 광장에 입장했다. 파디샤는 입장 직후 옥좌에 앉기 전에 세 무리에 각각 경의를 표하고, 인사를 받는 무리는 갈채와 함께 “황제 폐하와 그 통치가 영원하라”고 외쳤다.

본격적인 행사는 새 황제가 옥좌에 앉으면서 시작되었다. 나킵 알아쉬라프naqīb al-ashrāf(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예들 가운데 제일인자로 오스만 제국의 울레마 관료계 고위인사에 속하는 지위. 터키어식으로는 나키뷜레쉬라프nakibüleşraf)가 새 황제의 앞으로 나와 기도를 진행했다. 새 군주가 일어나면 나키뷜레쉬라프는 새 군주의 손에 입맞춤을 건내고, 황궁 호위병들은 박수를 쳤다. 이후 황제는 다시 옥좌로 돌아가고, 각 각료들은 순서에 따라 황제의 앞으로 가 충성의 맹세를 했다. 그 동안 혼란을 막기 위해 황제 곁의 호위병들은 “폐하, 일어서십시오”나 “폐하, 앉으십시오”라고 말하며 언제 새 황제가 일어서야 하는지 앉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이 의식은 앞서 언급한 옛 튀르크몽골적 즉위의식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면 그 성격에 있어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본래 이 의식에서 오스만조의 코미타투스들은 충성 맹세에서 다른 왕위 요구자를 제치고 군주의 직위에 오른 점에 대한 축하나 통치가 오래가기를 기원의 말을 건냈다. 그러나 1603년 아흐메드 1세의 즉위식에 대해, 아흐메드의 조언자였던 사피는 이를 서약bayʿa이라 표현했다. 바이아는 아랍어로 ‘매매’를 의미하는 바아bāʿa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 사회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어느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복종의 의지를 나타내는 ‘계약’행위를 의미한다. 즉, 이 시기에 오스만인들은 파디샤 지위를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계약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론상으로 그의 통치가 ‘계약’의 조건, 즉 적절한 통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폐위될 수 있었고, 실제로 이후 오스만 역사에서 군주의 폐위는 빈번한 일이 되었다. 이 의식이 끝나고 나면 파디샤는 이 중추적인 집단에게 선물을 하사하고(이를 쥘루스 바흐시시cülus bahşişi, 즉 즉위 보너스라 한다), 군주의 특권이었던 새 동전의 발행을 명하며 즉위식이 끝났다.

1918년 메헴메드 6세의 즉위식
터키 드라마 《무흐테솀 유즈이을: 쾨셈》에서 묘사된 아흐메드 1세의 즉위식

즉위 의식이 끝이 나면 곧 파발을 파견해 콘스탄티니예 전체에 새 황제가 즉위했음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제국 조병창과 해군은 축포를 발사하며 이를 축하했다. 즉위 의식이 치루어지고 며칠 내에 황제는 접견실Chamber of Petitions을 방문하여 즉위를 다시한번 축하받았다. 즉위하고 맞이하는 첫번째 금요일에 새 황제는 모스크들 가운데 하나를 방문하여 기도했다. 그 직후 모든 자미의 설교자들은 새로운 황제의 이름으로 금요기도회Khuṭba를 진행했다.

지도: 대관식을 위한 파디샤의 여정

두번째 즉위의식은 일종의 오스만식 대관식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신임 황제가 에윕 성자묘聖者墓(터키어로는 에윕 술탄 자미Eyüp Sultan Camii)에서 왕조의 시조인 오스만의 칼을 차는 의식kılıç kuşanması이었다. 이 의식이 공식적으로 즉위 의례에 속하게 된 것은 17세기의 일이었다.* 에윕 술탄 자미는 674년부터 678년까지 무슬림들이 처음으로 콘스탄티누폴리를 포위했을때 성벽 앞에서 죽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Aṣḥāb였던 에윕 안사리Eyüp Ansari(원래의 아랍어로는 아부 아이유브 알안사리Abū Ayyūb al-Anṣārī)를 추모하는 장소이다. 1453년 정복자 메헴메드의 정신적 스승, 아크 샴스 알딘Aq Shams al-Dīn(현대터키어로는 악솀셋딘Akşemseddin)이 기적적으로 에윕의 시체를 발견했고,** 메헴메드 2세는 그 자리에 묘와 모스크, 부속건물들을 짓게 했다. 이러한 성스러운 곳에서 오스만 왕조의 대관식이라 할 수 있는 칼을 차는 의식을 거행했으니§, 이는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의 신민들로 하여금 현임 황제를 13세기 선조들과 연결함과 동시에 예언자 무함마드로까지 연결시켜 생각하게끔 했을 것이다 (도널드 쿼터트, 2008: 155).

톱카프 궁전(탄지마트 이후에는 보스포루스 해변의 돌마바흐체)에서 즉위 의식을 치루고 2주 이내에 황제는 궁을 떠나 배편으로 성자묘로 이동한다. 황제 일행이 에윕 성자묘에 도착하면 셰이흐 알이슬람을 비롯한 울레마들, 각료들이 맞이했다. 오스만 1세의 검은 이른 아침에 미리 에윕 술탄 자미로 옮겨졌다. 파디샤는 측근 몇몇만을 거동하고 모스크로 들어가는데 그곳에는 셰이흐 알이슬람, 나킵 알아쉬라프 그리고 여타 종단의 셰이흐들이 있었고, 파디샤는 일단 이들과 기도를 했다. 이후 셰이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오스만의 검이 담긴 함의 봉인을 깨고 칼을 꺼내 검에 입맞춤을 한 뒤 파디샤에게 전달했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로 검에 입맞춤을 하고 셰이흐에게 칼을 돌려주었다. 이후 파디샤는 잠깐 묵념을 한 뒤 모스크 밖으로 나오고, 바깥의 군중들은 이에 갈채를 건내며 이 의식은 끝이 났다. 일종의 대관식을 치룬 황제는 육로로 에디르네 문을 지난 뒤 코스탄티니예 각지의 옛 황제들의 영묘가 있는 모스크를 들러 얼마간의 돈을 기탁하고, 최종적으로 아야 소피아를 거쳐 톱카프 궁으로 귀환했다.§§

앞서 나는 오스만 국가의 즉위의례 변화가 정치적 인민의 확대와 연관이 있다고 적었다. 본래 오스만 가문의 즉위의식은 단순히 코미타투스들과의 관계에서 끝이났다. 그러나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며 오스만 군주의 역할은 하는 것으로 한정되며, 통치하는 특권은 차츰 넓은 계층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제국 행정의 많은 부분이 무슬림 평민들에게 개방되는 것과 함께 즉위의례 역시 그들에게 개방될 필요가 있었다. 18세기에 들면 본래 정치적 권리가 없고 납세의무만 있는 자를 뜻하던 피지배민reʿāyā(아랍어로 가축을 의미하는 raʿiyya의 복수형인 raʿāyā의 오스만어식 표기)이 점차 비무슬림 농민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테즈잔은 이를 무슬림 남성은 암묵적으로 정치적 권리가 있는 ‘시민’으로 간주되게 된 것으로 해석하며, 식민지 백인과 원주민의 예를 들었다. (Tezcan, 2010: 235-236) 마찬가지로 에윕 술탄 자미에서의 대관식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무슬림에 한정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정치적 인민의 확대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1876년 압뒬하미드 2세는 자신의 대관식에 비무슬림 ─유대교도 랍비, 동방정교회의 대주교들 등─도 참여할 수 있게 조치했다. 1909년에 즉위한 메헴메드는 외국인들도 참관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정치적 인민이 차츰 확대되어 가는 와중에 오스만인들 스스로 이 의식의 기원을 비잔틴-로마 제국에서 찾은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로마 공화정은 오스만인들에게 있어서도 오래된 미래였던가?

도판 4: 대관식을 위해 에윕 술탄 자미로 향하는 메흐메드 5세 일행

* 이와 같은 의식이 처음으로 사료상에 등장하는 것은 1421년이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무라드 2세가 즉위할때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즉, 사이드sayyid) 에미르 술탄이 무라드 2세에게 검을 바치며 가짜 무스타파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표했다. 투르순 베이 또한 메흐메드 2세가 즉위한 뒤에 신의 검을 차는 의식을 가졌다고 기록하여, 에디르네 시절에 이미 유사한 의식이 이루어 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다.

즉위한 직후 에윕 성자묘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1566년, 셀림 2세의 즉위에 대해 셀라니키Selânikî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셀림 2세는 선임 황제들의 묘가 있는 영묘들을 차례로 방문한 뒤 마지막에 에윕 술탄 자미에 들렀다. 그러나 셀라니키는 셀림 2세가 각 영묘를 방문하여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셀림 2세가 오스만의 칼을 차는 의식을 수행했는지 알 수 없다. 사료상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와 같은 의식이 처음으로 치루어진 것은 1603년 아흐메드 1세의 즉위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Kawamoto, 2015: 39을 참조하라.

** 사실 당대 사료 어디에서도 에윕 엔사리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서술은 없다. 단지 그의 묘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적적인 발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라티피나 에블리야 첼레비의 시대에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Özaslan, 1999: 390-396 참조.

§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의 교회 자리는 본래 로마 제국군의 출정식이 이루어 지던 장소였으며(Gamm, 2014), 오스만 군대 역시 코스탄티니예에서 출정할때 에윕 술탄 자미의 인근에서 모였다고 한다. (Imber, 2009: 105-106)

§§ 일반적으로는 해로로 에윕 술탄 자미로 가서 육로로 돌아왔으나, 마흐무드 1세의 경우 육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왔고, 압뒬 하미드 1세, 셀림 3세, 무스타파 4세, 마흐무드 2세는 육로로 가서 해로로 돌아왔다. (Özcan, 2002: 409)

※ 1876년 압뒬하미드 2세의 즉위에 대한 뉴욕타임즈 기사는 이 곳에서 로마 황제가 갈채 의식을 치루며 즉위했다고 서술했다 (The New York Times, 1876). 그러나 로마 황제가 갈채 의식을 치뤘던 곳은 히포드롬이었다. 로베르 만트란Robert Mantran이란 프랑스 학자에 따르면 오스만인들은 별 근거 없이 이 의식을 로마 제국과 연관지어 설명했다고 한다. (Gamm, 2014 재인용)

참고문헌

도널드 쿼터트. 2008. 『오스만 제국사: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이은정 옮김. 사계절출판사.

이은정. 2014. “Book Review: Baki Tezcan, The Second Ottoman Empire: Polit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 in the Early Modern Worl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중앙아시아연구』 제19권: 167-172.

Gamm, Niki. 2014. “Eyüp Mosque, the Ottomans’ ‘coronation’ mosque.” Hurriyet Daily Newshttp://www.hurriyetdailynews.com/eyup-mosque-the-ottomans-coronation-mosque-70472

Imber, Colin. 2009. The Ottoman Empire, 2nd ed. Palgrave.

Kawamoto, S. 2015. “Courtyards and Ottoman mosques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Symbolism, mimesis and demise.” A| Z ITU Journal of the Faculty of Architecture, 12(2): 35-48.

Özaslan, N. 1999. “From the Shrine of Cosmidion to the Shrine of Eyüp Ensari.” Greek, Roman and Byzantine Studies, 40 (4): 379-399.

Özcan, Abdülkadir. 2002. “KILIÇ ALAYI.” İslâm Ansiklopedisi, vol. 25. TDV İslâm Araştırmaları Merkezi: 408-410. Retrived 18-05-31:
http://www.islamansiklopedisi.info/dia/pdf/c25/c250279.pdf

Tarım-Ertuğ, Zeynep. 2009. “enthronement and accession ceremony,” in Ágoston, Gábor and Bruce Masters (eds.).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207-209.

The New York Times. 1876. “Girding on the Sword of Osman.” Retrieved, 2018-05-31:
https://timesmachine.nytimes.com/timesmachine/1876/09/18/94655470.pdf

The New York Times. 1909. “New Sultan Breaks Moslem Traditions.” Retrieved, 2018-05-31:
https://timesmachine.nytimes.com/timesmachine/1909/05/11/101880440.pdf

Tezcan, Baki (2010), The second Ottoman Empire: Polit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 in the Early Modern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도판 출처

도판 1: Oriental Miniatures, Taşkent 1980, rs. 26.

도판 2: Topkapi Palace overview

도판 3: Ottoman Sultan Selim III (1789)

도판 4: Pierre de Gigord fotoğraf koleksiyonu

지도: Ágoston, 2009: 289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 관련 연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