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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Peacock, The Great Seljuk Empire

by hanyl 2019. 6. 23.

Peacock, A.C.S. (2015). The Great Seljuk Empire. Edinburgh University Press. 378 Pages.

 

 

The Great Seljuk Empire은 피콕(Andrew C. S. Peacock)의 전작, Early Seljūq History: A New Interpretation (Routledge, 2010)의 속편이다. 전작에서 피콕은 이란과 이라크, 소아시아를 정복할 셀주크 가문의 기원에 대해 유라시아 초원의 시각에서 조망하였다. The Great Seljuk Empire에서는 1040년부터 1194년까지, 셀주크 제국의 성립부터 중동 대부분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배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피콕은 두 권의 책을 통해 11세기와 12세기 셀주크 왕조와 이란의 역사 연구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피콕은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셀주크 제국 시대 정치사에 대한 학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 밝혔다 (11쪽). 사실 최근 몇년 동안 셀주크 제국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는 연구들이 거의 매해 등장하는 점을 생각해볼때, 피콕의 저서는 연구사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개설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The Great Seljuk Empire은, 오히려 현재 연구의 흐름을 조망하는, 예비적인 요약으로 평가받는 쪽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 시각에서, 이 책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피콕은 여러 주제에 대해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연구를 조망하고 요약한 뒤에 터키어나 영어, 그리고 여타 주요 언어로 된 참고문헌을 제공하였다.

이 책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 장은 정치사 연대기이다. 첫번째 장과 두번째 장은 1092년 말리크샤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여 나누어진다. 이는 보스워스(Clifford Edmund Bosworth)가 케임브리지 이란사 5권에 기고한 정치사 부분(Bosworth, 1968: 1-202)과 거의 일치하는 영역이다. 피콕 그 스스로도 인정하였듯, 보스워스의 연구에 비해 이 책의 정치사 서술보다 훨씬 더 자세하기에, 완전히 대체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피콕의 책은, 보스워스의 연구는 같은 해에 출간된 십트 이븐 알자우지(Sibt ibn al-Jawzī; 1186년 ~ 1256년)의 연대기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십트 이븐 알자우지의 연대기는 1055년부터 1092년까지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의 역사에서 튀르크인들의 역할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1092년 이후의 서술에서도 보스워스가 활용하지 못한 사료들이 활용되었으나, 그 이전만큼 극적인 시각의 전환이 이루어진 정도는 아니다.(11쪽) 따라서, 향후 얼마 간은 셀주크 제국의 정치사 내러티브 서술에 있어서 보스워스와 피콕의 연구는 함께 인용될 것 같다.

정치사 연대기의 내용은, 얼마간 수미상관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 셀주크 제국의 성립은 목초지를 따라 헤메이던 (차그르와 투그룰의 권위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튀르크멘들의 좌충우돌로 인해 발생한 사고와 같다. 셀주크 제국 초기의 지도자 차그르와 투그를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행운아로 보인다. 그들은 단지 가즈나 왕국에 패배하지 않았고, 앞서 이슬람 세계에 진입한 튀르크멘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적절히 등장하여 별 다른 전투 없이 이라크와 이란을 지배할 제국을 세웠다. 그런 면에서 1150년대 이후 셀주크 제국이 급작스레 붕괴한 점은 제국의 성립을 반대로 비춘 것과 같다. 제국의 동쪽에서는 카라 키타이로 인해 이란으로 몰려온 튀르크멘 부족들에 의해 산자르의 제국이 붕괴했고, 서쪽에서도 튀르크멘들의 이합집산에 따라 제국이 붕괴하는 현상을 보였다.

세번째 장은 셀주크 제국의 왕권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크게 중앙유라시아적 왕권 개념, 페르시아 이슬람적 왕권 개념, 그리고 압바스조 칼리프와의 경쟁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셀주크 가문은, 그 국가 내에서 돌궐 제국의 아시나 씨족과 같은 역할을 했다. 술탄의 권위는 다른 셀주크 왕공들에게서 언제나 도전받았지만, 결국 옥좌는 셀주크 가문의 구성원만이 차지할 수 있다는 개념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시리아의 튀르크멘들은 쿠틀루무쉬 이븐 아르슬란 이스라일〔Qutlumush b. Arslan Israʾil. 현대 터키어에서는 쿠탈므쉬(Kutalmış); 피터 프랭코판, 《동방의 부름》 소개에서 소개한 쉴레이만(샤)의 아버지〕에게 아트스즈 이븐 아와크(Atsız b. Awaḳ)를 대신해 자신들의 수령이 되어달라며 이렇게 애원했다. “전하께서는 셀주크 왕가에 속하신 분입니다. 만일 저희가 전하를 삼가 받들 수 있다면, 저희에게는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아트스즈는 왕가의 후예가 아니기에 저희는 그를 더 이상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128 ~ 129쪽) 페르시아 이슬람 왕권에 대한 단락은 부이조를 통해 페르시아적 왕권 개념을 받아들인 셀주크 왕가의 모습과 압바스 칼리프에게서 술탄으로 책봉되거나, 압바스 가문과 통혼을 통해 권위를 얻는 셀주크 왕가의 모습이 묘사된다. 마지막 단락인 셀주크 가문과 칼리프 단락에서는, 칼리프가 어떤 면에서는 시아파 부이조보다 순니파 셀주크조와 더 긴장된 관계를 보였음이 설명된다.

그 다음 장은 셀주크 궁정에 대해서 다룬다. 그 첫 단락은 셀주크 군주와 그 측근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다음 단락은 셀주크 궁정의 의례가 논의되었다. 셋째 단락은 셀주크 궁정이 수도에 존재하지 않고 유목민 집단과 같이 계속 이동했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셀주크 왕공들은 이스파한이나 바그다드 등 대도시권에 머물때도 도시에 입성하기 보다는 그 바깥에 텐트를 치고 머무르기를 선호했다. 그 다음으로는 셀주크 왕공의 생활양식과 왕가 여성의 역할 그리고 셀주크 궁정에서 튀르크 문화에 대해서 다루었다. 직접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최근의 연구는 셀주크인들이 결코 페르시아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궁정의 문화계 후원에 대한 단락을 마지막으로 이 장은 끝이 난다.

이에 이어지는 장은 관료와 행정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 주된 내용은 거의 관료계에 대한 것으로, 피콕은 “셀주크 제국 전반의 행정 구조를 개관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 뒤, “각 지역별로 다른 상황들을 비교해가며 셀주크 통치의 성질이나 충격파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2쪽) 이후 피콕은 각 지역별로 행정에 차이가 있었고, 중앙 관료들에게서도 지역에 기반한 당파가 극심했음을 보여주며, 셀주크 제국 행정 전반을 다루려는 시도가 왜 의미가 없는지 훌륭히 증명해내었다. 이와 같은 지역적 접근은 최근 셀주크사 연구의 신조류가 낳은 주된 성과이며,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이 장의 또다른 중요한 내용은, 셀주크 관료들은 압바스조 시대와 달리 정해진 봉급이 아니라 그가 낸 수익의 일부를 보수로 받았던 경향이 있었던 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역별로 봉급을 받았던 경우도 존재하기에, 그 경향을 전체에 적용하기는 힘들다.

6장은 셀주크 제국의 군사 부분에 대해 다루었다. 피콕은 이 부분에서 뒤랑·게디(David Durand-Guédy)와 다른 의견을 보였다. 뒤랑·게디는 후대의 셀주크 군주들이 튀르크멘을 이란 고원에서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했다(Durand-Guédy, 2013). 반면 피콕은 튀르크멘 전사들이 말리크샤 재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과 튀르크멘이 이란 고원, 특히 이라크 셀주크의 핵심 지역인 지발의 고원 지대에서 유목했음을 강조했다.

그 다음 장에서는 셀주크 시대 종교에 대해 다루었다. 피콕의 설명에 따르면 셀주크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열렬한 순니파임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제국 내 다양한 종교/종파 집단의 균형을 꾀했다. 그 결과는 상당히 관용적인 정책이었다. 시아파는 꽤 자주 고위 관료로 임명되었고, 그 종교 의례도 대체로 인정되었으며, 시아파 신학의 발전은 이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시아파 지방 왕조들은 셀주크 가문의 속신으로 계속해서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도 등, 딤미에 속했던 소수 종교집단도 전반적으로 셀주크 집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오히려 셀주크 왕조에 더 고민이 되었던 것은 셀주크 가문이 후원하던 하나피 학파와 대립하던 다른 순니 법학파들이었다.

이어지는 장의 내용은 셀주크 시대 사회와 경제사이다. 여기서 피콕은 대 셀주크 제국의 시대가 정주 사회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거나 경제 붕괴를 초래했다는 통념을 거부했다. 튀르크인 지배자들과 정주세계의 신민들은 협력 관계에 가까웠다. 때로는 정주민들이 그 관계를 주도할 때도 있었다. 87쪽에서 다루어진 내용이지만, 이스파한의 이스마일파를 토벌하는 일에서 주도적인 쪽은 셀주크인이 아니라 이스파한의 순니파 주민들이었다. 셀주크 시대 경제에서도, 피콕은 램턴(Ann K.S. Lambton)의 연구에 동의를 표하며, 유목민(즉, 튀르크멘)이 정주세계 부의 감소와 직결되지 않음을 지적했다(Lambton, 1968). 피콕이 보여주는 상에 따르면, 유목민은 오히려 이란의 경제에 활력을 더해주었다. 셀주크 시대에 많은 도시들이 오히려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유목민과 정주민의 관계도 대체로 상호간에 이익이 되었다. 셀주크 시대에 몇몇 지역이 경제적인 후퇴를 경험했지만, 이것을 꼭 튀르크멘이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셀주크인들이 출연하기 훨씬 전부터 이상저온 현상이 존재했음이 나타난다. 또한 셀주크인들의 등장과 함께 이상저온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후라산의 면화 생산이 셀주크 시대에 붕괴했다는 증거도 없다. 셀주크 시대 경제적 붕괴의 결과로 묘사되는 이란인들의 대량 이주 역시 셀주크의 등장 이전부터 이미 시작된 흐름이었다. 오히려 상업은, 몇몇 경로 변경이 있기는 했으나, 여전히 번영하였다. 전반적으로 셀주크 제국 시대에 경제는 이전보다는 성장하는 추세에 있었다.(이전에 유목제국의 정주지역 정복이 악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정복을 중심으로 정리한 바이 있다: 바그다드의 몰락)

마지막 장에서 피콕은 셀주크 왕조의 유산에 대해 설명했다. 놀라운 점은, 셀주크의 직접적인 유산이 놀라우리만큼 적다는 점이다. 셀주크의 이름은 튀르크멘 정치체들에 있어 통치 정당성의 상징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른 유산들은 오래가지 못했거나, 셀주크 제국과 상관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예를 들어, 수피주의, 이슬람, 페르시아어가 동쪽으로 확장된 것은 셀주크 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조류로, 어찌되든 일어날 일이었을 것이다. 이슬람 사회의 군사화 조류 역시 셀주크 시대 이전에 시작되었다. 튀르크인의 이슬람 세계 동부 지배에 대해서도, 셀주크인이 없었더라도 일어났을지 모를 일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피콕의 저서가 가진 연구사적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피콕은 셀주크 시대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대한 역사 연구의 새로운 조류를 성공적으로 소개해냈다.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과거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요약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대 셀주크 제국은 더 이상 술탄과 그 측근들이 주도하는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다. 이 정치체는 다양한 지방군주, 튀르크멘 수령, 도시 명사, 무슬림 학자 등이 다양한 권력 집단이 협력을 통해 운영하는 국가였다.

또한 The Great Seljuk Empire는 중앙유라시아 비교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란 세계의 영향을 다대하게 받으면서도 유목민으로써의 정체성을 지킨 것은 비슷한 시기 존재했던 거란 제국이나, 후대 이란의 튀르크몽골계 왕조들에서도 보인 일이다. 후라산 출신 관료와 그 남쪽 출신 관료들이 갈등을 보인 것은 중국의 정복왕조들에게서도 관찰된다. 아타베그 제도 역시 튀르크몽골 국가들 전반에서 관찰되는 바이다. 거란 제국이 후대 몽골 제국의 행정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많으나, 셀주크 제국의 영향에 대해서는 그만큼 연구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좋은 시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거란과의 비교에서 특히 눈에 띄는 바는 니잠 알물크가 말리크샤의 아타베그로 임명된 일이다. 거란 제국에서도 한족 출신의 한덕양(韓德讓) = 야율융운(耶律隆運)이 요성종의 어머니 소태후와 결혼을 통해 황제의 계부로 인정받은 것은 아타베그 제도가 중앙유라시아 세계 전반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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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worth C. E. (1968) “The political and dynastic history of the Iranian world (AD 1000–1217)” in J. A. Boyle ed.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 5: The Saljuq and Mongol Perio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02.

Durand-Guédy, David (2013). “Goodbye to the Türkmens? The Military Role of Nomads in Iran after the Saljūq Conquest.” In Kurt Franz and Wolfgang Holzwarth eds. Nomad Military Power in Iran and Adjacent Areas in the Islamic Period. Dr Ludwig Reichert Verlag:105-34.

Lambton, A.K.S. (1968). “The internal stucture of the Saljuq empire.” in J. A. Boyle ed.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 5: The Saljuq and Mongol Perio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3-82.

* 2019년 3월 8일 구매. 3월 19일 수령. 6월 15일 일독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