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헤린 (2010). 《비잔티움: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 이순호 옮김. 글항아리. 671쪽. 38,000원.
Herrin, Judith (2007). Byzantium: The Surprising Life of a Medieval Empire. Allen Lane.
주제별 분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큰 틀에서 흐름을 조망하기 어려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연구서라면 당연히 장점이 되는 방식이지만, 일반적인 역사 애호가의 시각에서는 단점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피터 프랭코판의 《실크로드 세계사》를 읽으면서 처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세심히 선택된 주제로 책을 잘 이끌어나간다면 미시적인 세세함과 거시적인 통찰력, 두 가지 모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도 피터 프랭코판의 책과 마찬가지로 주제별로 책을 풀어간다. 그런데, 그 주제라는게 경제면 경제, 정치면 정치, 사회면 사회라는 식으로 딱딱한 도식이 아니다. 떄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안나 콤니니 같은 개인이 되기도 하며, 그리스의 불이 되기도 한다. 자유분방하게 퍼져나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비잔티움의 여러가지 측면이 하나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다.
책을 덮을때쯤 비잔티움은 로마, 이교, 기독교, 그리스의 유산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나 서유럽 등 당대의 세계에서도 배움을 거부하지 않은, 강한 활력과 창의력이 넘치던 사회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비잔틴 국가는 사라졌으나 그 유산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함께함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팔레르모의 팔라티노 예배당은 비잔틴 양식을 활용했다. 그리고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지을때 팔라티노 예배당에서 많은 점을 배워갔다. (309쪽) 뿐만 아니라, 1953년에 이루어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의식의 기본 뼈대는 비잔틴 전통에 의거했다. (92쪽)
학자의 저서에서 흔히들 나오는 실수들과 달리, 주 연구 대상이 아닌 부분에서의 통찰력도 꽤 훌륭하다. 본문 605~07쪽에서 저자가 묘사한 이슬람 사회에 대한 서술이 좋은 예다. 그는 교황 베네딕투스 16세가 “이슬람을 획일적이고, 암묵적으로 반유럽접이며 신도들 또한 충성심에 매몰된 나머지 이성과 신앙의 결합 능력을 본질적으로 상실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설명”한 설교를 인용했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베네딕투스가 인용한 사료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븐 루쉬드(일명 아베이로스)의 사례를 지목하며 이슬람이 결코 획일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전문 학자들이 때때로 자신의 연구분야 외에서 편견된 시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주디스 헤린의 통찰력은 더더욱 인상깊었다. 대체로 비잔틴에 비해 한수 아래로 파악되는 서유럽에 대해서도 큰 편견이 보이지 않는다. 556~57쪽에서 주디스 헤린은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가 스콜라 철한에 얼마나 심취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번역도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옮긴이 이순호의 작업은 항상 인상깊다. 애초에 한국어로 쓰여진 글처럼 표현이 풍부하다. 읽는 맛이 좋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순호가 옮긴이로 참여한 책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번역 능력도 탁월하지만, 재미있는 책을 찾아내는 능력도 그에 못지 않다고 느꼈다. 내가 읽은 책은 2014년에 나온 1판 6쇄였는데, 4년이 채 안되는 기간에 인문학 도서가 6쇄나 찍힌 것은 분명 이순호라는 출판번역가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것이다. 편집도 전반적으로는 좋다. 도판 인쇄 상태도 양호하고, 디자인도 깔끔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136쪽에서저자는 비잔틴의 상징이 쌍두독수리라고 설명했다. 588쪽에서는 튀르크인들이 비잔틴에서 받은 예술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로 셀주크 시대의 쌍두독수리를 들고 있다. 하지만 쌍두독수리는 팔레올로고스 시대나 되서야 비잔틴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쌍두독수리는 히타이트 문명에서 처음 사용했고, 로마 제국보다 사산조에서 더 빨리 이를 사용했다. 이란의 부이조는 10세기부터 사산조의 후예를 자처하며 쌍두독수리를 상징으로 삼았다. 셀주크 제국에서 사용한 쌍두 독수리는 그 영향이다. 오히려 비잔틴 제국의 쌍두 독수리 사용이 동방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서술도 그렇지만, 비잔틴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학술서보다는 대중을 위한 교양서를 주로 출전으로 활용하여 생긴 한계가 적지 않다. 587쪽의 티마르 제도와 프로니아 제도 사이의 관계나 593쪽의 오스만 병력에 대한 서술은 꽤 옛날 식이다.
번역이나 편집에서는 거슬리는 점이 대단히 많았다. 186쪽에 등장하는 유스타티우스 로마이오스의 예와 같이 표기 원칙이 대중없다. 523쪽에서 나오는 샴스 부하리는 대체 누구를 이야기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오탈자나 어색한 표현도 적지 않다. 174쪽에는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지역에 정착해서 롬바르드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적혀있는데, 그 반대 아닌가? 202쪽에서도 이슬람의 아랍을 대신해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가 등장했다는 서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실수야 번역 과정에서 왕왕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편집 과정에서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더 읽어볼 책들”도 좀 아쉽다. 주디스 헤린은 본문의 문장이 어떤 글에서 인용되었는지 상당히 꼼꼼하게 적었는데, 한국어판에 맞게 조정되지 않았다. 아예 빠뜨린 것 같다. 아까도 적었지만, 내가 읽은 책이 6쇄인데, 그때도 수정이 안된 것을 보면 그 다음 쇄들에서도 개선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은 꽤 성공적으로 비잔틴이라는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했다. 책의 구성도 고리타분한 역사책과 크게 달라서 읽는 재미도 있다. 사소한 오류가 없지는 않지만, 책의 전반적인 가치를 깍아먹을 정도는 아니다. 번역이나 편집도 전반적으로 양호하지만, 몇가지 사소한 실수가 아쉽다. 그럼에도 사소한 수준이고, 충분히 추천할만한 책이다.
* 2019년 11월 7일, 도서관에서 대출. 10일에 일독 시작하여 13일에 완료. 22일 기록.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0) | 2020.03.07 |
---|---|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0) | 2019.12.15 |
오르한 파묵, 《하얀 성》 (0) | 2019.12.10 |
Hanioğlu, A Brief History of the Late Ottoman Empire (0) | 2019.11.23 |
이규하, 《서양 근세 초의 새로운 모습》 (0) | 2019.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