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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처드 폰 글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by hanyl 2019. 8. 12.

리처드 폰 글란 (2019).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소와당.
von Glahn, Richard (2016).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 From Antiquity to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한국 웹상에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비난받는 대상은 캘리포니아 학파와 일본 역사학계가 있다. 캘리포니아 학파의 의의는 서양 우월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그들이 남기고 있는 족적은 “자료에 대한 정밀하고 꼼꼼한 천착, 유럽과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경제 제도와 실물 경제에 대한 탄탄한 비교 연구”이다(본문 31쪽). 한국 웹상에서 캘리포니아 학파가 실제 이상으로 비난받는 이유는 피상적으로 캘리포니아 학파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본의 역사학계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이다. 최근들어 일본 역사학계가 역사적 전개를 큰 틀에서 보는 시각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종종 보았는데, 사실 이 점은 최근 서구학계도 다르지 않다.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폰 글란 역시 캘리포니아 학파의 일원을 자처하고 있다. 포메란츠의 연구에 대해서도, 그가 든 구체적인 수치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를 자세히 소개하며 비판적으로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학자들과 달리 “어떤 제도라도 언제나 특정 맥락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든 역사적 상황에서 전적으로 타당한 제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며 크게 호평하고 있다. 또한 책에서 일본학계의 연구를 아주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교조주의적 일면 때문에 특히 조심스럽기는 하나, 중국 학계의 연구 결과도 꽤 참조했다.

이쯤되면 이 책의 목적과 의의에 대해서도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리처드 폰 글란은 이 책을 통해 3000년이라는 장기간 동안 중국이라는 거대한 지역의 경제에 대한 연구사를 총정리했다. 그가 참고한 연구는 영미권, 중국어권, 일본어권 그리고 프랑스어권을 망라하고 있다. 방법론의 측면에서도 캘리포니아 학파에 충실하여, 가능한 실물 경제 수치 자료에 의지했다.

물론 그런 만큼 장기간에 걸쳐 거대한 지역의 경제 전반에 대해 모든 부분에 대해 충분히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전에 쓴 몽·원 제국기 북중국의 경제에 대한 서술이 한 예가 될 것이다(저 글에서 내가 인용한 부분과 별개로 506-07쪽에서 저자는 원말 인구 감소에 대해서는 전쟁과 기근이 직접적인 이유였을 가능성이 크다며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다른 예로는 왕망의 화폐 개형 정책에 대한 설명이 있다. 본문의 257쪽에서 왕망은 “과거의 오수전을 녹여 새로운 화페를 주조했는데…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공인된 화폐와 금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적혀있다. 인플레이션은 통화량의 증가로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전반적으로 오르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화폐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서술은 이상하다. 283쪽의 서술로 볼때, 공식 화폐가 부족하자 오히려 질 낮은 위조 화폐가 만연하게 되면서 통화량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가 화폐 경제가 쇠락한 것 같다. 여하간 몇몇 부분에서는 책의 설명이 너무 소략하다.

중국만을 대상으로 적은 책이기에 나온 단점도 있다. 예를 들어, 554쪽에서 청나라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명나라의 행정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청나라의 영역은 명나라이 지배하지 못한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 티베트 지역, 내·외 몽골 등도 있었고, 이런 지역들에서 명나라의 행정 구조는 존재할 수가 없다. 쿠빌라이의 중국식 정책 채택에 대해서도 너무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존재한다(498쪽).

그러나, 이는 사소한 단점일 뿐이다. 내가 알기로, 청동기 시대부터 청조 멸망까지 중국의 경제사를 종합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연구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설사 존재했다 하여도, 지금과 같이 각 시대, 각 분야별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이렇게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다. 티모시 브룩은 같은 이유로 《하버드 중국사 원·명》에서 중국사에 대해 과거와 같이 일목요연한 연구서가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적었고, 나도 그 점에 크게 동감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쨋든 경제사의 시각으로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를 되짚어보니 흥미로운 서술이 많다. 예를 들어, 안록산의 난에 대해서 적으면서 저자는 양귀비 등의 이야기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균전제와 조용조 체제의 붕괴에서 발생했다고 적었다.

대신 과거의 일목요연한 연구서들이 보이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다. 9장 611쪽부터 630쪽까지 설명이 대표적으로, 이 부분을 읽어보면 과거의 경제 지표를 복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수치가 추정치에 불과하며 학자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420-21쪽에 제시된 여러 학자들의 송대 화폐량 추정치는 미친년 널뛰기하듯 각각 다르다. 모키어의 말마따나, “명백한 답을 원하는 사람은 경제사 연구에 감히 나서지 말아야 한다.”(Mokyr, 1985: 3; 노택선 2005: 3에서 재인용)

번역에 대해서는 대체로 크게 만족했다. 전에 벡위드의 《중앙유라시아 세계사》(소와당, 2014)를 읽으면서도 놀란 부분인데, 중국사에 대한 번역자의 이해가 굉장한 수준이다. 한문 문헌을 독해하는 능력이 있으니, 저자가 영어로 번역한 사료를 단순히 한국어로 중역하기 보다는, 원문과 직접 비교해가며 한국어로 옮겨서 정확한 번역이 가능했다고 느껴졌다. 원래 제목에 없는 ‘케임브리지’가 한국판 제목에 추가된 것은 꽤 귀여웠다.

편집에서는 전반적으로 만족하지만, 종이책에 색인을 빼버리고 E-Book을 참고하라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각주를 각 장의 끝에 일괄 배치한 원서와 달리 본문에 포함한 점은 마음에 들었다. 오탈자도 거의 없었다. 286쪽 각주 81은 di Cosmo를 Cosmo라고 잘 못 적었다. 412쪽에 1044년 송나라 군인 수가 1400만 명에 달했다고 적었는데, 영어 원서를 확인한 결과 ‘1.4 million’(140만)이었다. 또, 526쪽 각주 5에는 ‘Even Ōyama Masaaki’라고 적혀있는데, 아마 Even을 지우는 것을 까먹은 것 같다. 본문 내용만 700쪽 가까이 되는데, 이정도면 굉장히 선방한 편인 것 같다.

참고 문헌

Mokyr, Joel (1985). “The Industrial Revolution and the New Economic History.” The Economic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Government Institutes: 1-51.

노택선 (2005). 《전쟁, 산업혁명 그리고 경제성장》. 해남.

* 2019년 7월 23일에 도서관에서 빌렸고, 31일에 일회독 시작했으며, 8월 2일에 완료했다.